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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그냥 한 몇년전부터 그냥 죽 조선군은 절대 갑옷 안 입었다고 주장하는 병신들이 있음.


https://arca.live/b/ilbbongwillbedie/83877487?p=1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레전드 일2뽕 책사풍후임.


https://namu.wiki/w/%EC%A1%B0%EC%84%A0%EC%A0%84%EC%97%AD%ED%95%B4%EC%A0%84%EB%8F%84



거기다 나무위키에서도 분탕치는데.


공통점은 사료를 제시해 줘도 그걸 무시함.



저 지랄하는 이유는 조선은 병신나라고 일본에 나라 먹혀야 마땅한 나라였다고 지랄하기 위해서 억까하는거임.

하지만 팩트는 조선은 말기 부패해도 일본 일반인보단 사람답게 살았다는거.

일본은 세율 기본 70프로라 마비키라고 애들 태어나면 죽이고 오바스테라고 가족중 늙고 병들으면 산에 버려다가 죽게 둔거.





일단 저 병신들 주장은 이 복장이 고증에 맞는거라는거고


근거로 조선시대 그림이랑


‘인조 27년 1649년 03월19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의 일부.


또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밝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비록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의 공역(工役)으로는 치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은 모두 적을 막는 군병입니다. 전선에는 그래도 참나무으로 된 방패가 있어 한 배의 사람들을 보위하고 있으므로, 육군의 경우처럼 막아줄 수단 없이 직접 화살과 돌을 맞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수륙의 병사로 하여금 모두 견고한 갑옷과 투구를 입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군병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육군이 마땅히 먼저여야 하고 수군은 뒤에 해야 합니다. 모두들 이 일을 말할 때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지 선상의 장령(將領)이라 칭호하는 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면, 마련하는데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거행하는 실효도 있을 것입니다.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의 기사다.



아뢰기를 "각진 갑주의 경감에 관한 비변사의 초기에 대해 전교로 '경감한 이 숫자는 영원히 경감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1년에 제조할 수를 경감하는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이를 기준수로 삼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갑주는 말 위에서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배위에 방패를 벌려놓고 몸을 가린 병졸로 하여금 모두 갑주를 입게 하면, 실로 제승(制勝)을 위한 급무가 아니며 단지 수군에게 유지하기 어려운 폐단만을 줄 뿐입니다. 더구나 전선은 덩치가 크고 위에 누로(樓櫓)註 001 를 설치하므로 그 바탕이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움이 걱정인데, 이에 또 갑주를 입힌 군졸을 태우면 곱이나 되는 무게를 더하는 것입니다. 해상에서 군졸을 연습시켜 본 자는 대부분 불편함을 말합니다. 옛날 수군을 용병하는 지혜와 기계 제조의 정밀함은 고 통제사 신 이순신 만한 사람이 없어 그 바다를 횡행한 공렬(功烈)은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도 갑주를 입고 배에 오른 제도가 없었으니, 어찌 그 지혜가 지금의 사람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 크고 부유한 주읍(州邑)에서도 관에서 자력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민결에까지 침범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으며 연해의 주현에서는 하나의 크나큰 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선의 수졸(守卒)은 바람이 잔잔할 때는 1백명 혹은 80명이요, 바람이 거셀 때는 40명 혹은 30여 명으로서 모두 선제(船制)의 대소에 따라 가감합니다. 이 밖에 전곡(錢穀)과 인민이 없는 변장(邊將)이 먹는 것은 제방군(除防軍) 약간 명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무릇 책응(策應)이 있을 경우 모두 수군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수영은 각포에 배정하고 각포에서는 수졸로부터 무명을 징수하니, 착취하는 상황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변장이 어찌 모두 탐학을 부리겠습니까마는 그 사정이 자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변(三邊) 수군의 역은 다른 곳보다 10배나 더하여 군사가 연이어 흩어져 달아나고 피해가 인족(隣族)에까지 미침은 곧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갑주에 대한 역을 간신히 유지하는 가난한 포에 해마다 요구하여 수에 따라 준비하여 바치게 한다면, 각포의 수졸은 견디어 갈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신 등이 본래 아뢰어 변통하려 하였는데, 지금 전남 우수사 윤창구(尹昌耉)의 장계로 인하여 그 폐단을 대략 진달하고 감히 참작하여 경감하시기를 앙청하는 바입니다. 갑주는 전선에서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그 폐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경감하는 수를 여러 해를 두고 계산하면 이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신 등의 뜻은 이렇게 경감하는 수를 해마다 있는 것으로 하는 경우 과연 편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하교를 받들고 아울러 그 이해관계를 진달하고 앞서의 계사를 도로 들이며 엎드려 성상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체로 이 일은 어떤 사람의 건의로 설립한 것인가?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본래의 문서를 찾아 들이라." 하였다.



저거 1줄요약하자면 돈 없어서 갑옷 못 만듬. 이순신때도 갑옷 입는 제도 없었음임.




그리고 내가 쓴 반박글은 일단 일본 자료임. 왜냐? 역사는 교차검증 그러니까 다른나라 기록이랑 일치해야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지니까.


그게 기본이니까.거기다 일본 자료엔 조선군 갑옷 안 입었다 그딴 개소린 없음.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루이스 프로이스란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가 쓴 기록중 일부임.


조선군은 갑옷 입었다고 적혀있음. 저거 쓰기전에 수없는 자료와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저 사람이 종합해서 작성한 기록임.


https://cultural.jp/item/iiifman-sagalibdb_06000002


朝鮮蔚山合戦之図


라고 일본에서 그린 울산성 전투 그림인데.


https://ja.wikipedia.org/wiki/%E8%94%9A%E5%B1%B1%E5%9F%8E%E3%81%AE%E6%88%A6%E3%81%84



임진왜란 끝나고 3년 지난 뒤의 그림임.



그리고 이건 조선전역해전도라고 칠천량 전투 일본이 그린거.

갑옷 안 입었다고 발광하는 것한테 조선쪽 그림은 당대에 그려진게 없고 다 18세기에 그려진거고.


당시 일본군은 다 갑옷 입었는데 하나도 안 입었다고 함.


거기다 보면 일본군이 조선이나 명나라 무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림보면 일본군이 당파,월도,조선창 명나라 창을 씀.ㅡㅡㅋ 이건 뭐냐고 말했음.



이건(울산성 공성그림) 당대에 그려진 그림에 실록기록이나 일본측 기록과도 일치하는 모든 병사가 갑옷을 입었다는게 일치하는 그림이다.

보면 병사들 갑옷은 모두 제작이 쉽고 유지보수가 간편한 두정갑.

두정갑을 모두 입은 것으로 보아 조선의 주력갑옷이자 흔하게 쓰인 갑옷은 두정갑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남은 갑옷 유물들의 대다수가 두정갑인데,이는 조선의 주력갑옷은 두정갑이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리적이고 납득적인 이유인것이 두정갑은 생산이 다른갑옷보다 쉬우며 유지보수도 간편한데 방어력도 다른갑옷보다 좋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측에서도 두정갑을 주로 목격하였기에 그림에도 그린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전역 해전도는 이러한 그림을 보고 참고하여 그렸을것이며. 수군과 육군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했다는 점,권율등의 수군 육군편입등을 보면 무장은 같았을것이다.



그리고 조선전역해전도는 18세기에 그려졌지만 그 전에 그려진 울산성 전투 그림을 기반으로 그렸을것이라고 했음.


그리고 병신이 갑옷입음 무거워서 빠져죽으니까 갑옷 안 입었다고 지랄하길레.


갑옷을 입고도 활동이 무리없이 가능한것은 판금갑옷이라도 가능한데.심지어 수영도 가능하다는 영상을 첨부했음.

https://youtu.be/TLcT5J7yg9k

https://youtu.be/bwd2ZEav2vE


무겁다고 활동이 힘들다고 전투에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당장 왜란시기 왜병들은 갑옷을 그럼 왜 입었는지 설명이 안된다.


또한 당시엔 물에 빠지면 어차피 죽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갑옷을 입던 안입던 어차피 죽는다면 갑옷을 입는게 더 안전하다는건 당연한 이치다. 라고 적어줬음.


근데 씹데?


그래서 사료기록도 줬음.


우선 조선같은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갑옷 비싸서 못 입는다는거 반박해줬음.


동시기 타 국가들은 1명에게만 무기류를 구비하도록 하여 그 무장이 상당히 빈약하였다고 주장하나, 조선은 애초에 땅을 가진 농민, 즉 정민을 군사로 모았고 그 정민도 다른 농민 3명이 경제적으로 보조하여 무장을 갗추게 하였으므로 그건 말도 안 된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185



이 때의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정을 1보로 한다. 둘째 토지 5결을 1정에 준하도록 한다. 셋째, 노자(奴子)도 봉족수로 계산한다. 넷째, 각 병종별 급보 단위는 갑사(甲士) 4보, 기정병(騎正兵)·취라적(吹螺赤) 3보, 평노위(平虜衛)·파적위(破敵衛)·근장(近仗)·별군(別軍)·보정병(步正兵)·대평소(大平簫)·기선군(騎船軍) 2보, 봉수군(烽燧軍)·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 1보이다. 다섯째, 누정·누호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도록 되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4%89%EC%A1%B1

보통 3~5가정이 병사 1명의 갑옷 등 무장을 갗춰주었다.



애초에 경국대전으로 조선 초기 국법부터 병사들이 갑옷 다 갗춰입게 하게끔 하는게 조선이었다. 이유는 타 국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여 병사의 무구나 질적우위를 통해서 이를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왜란 전 왜구 천여명을 70 조선군이 학살한 을묘왜변을 보면 조선군이 갑옷을 안 입었다면 저게 가능하긴 할지 의문이다.



라고 해줌.



초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우는건데 이러한 기본지식도 없는거같았음.


그리고 마찬가지로 씹었고.


갑옷 안 입었다는 실록을 반박해줬음.




당대의 실록과 비변사 기록을 보면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갑옷을 생산하도록 하는것과 갑옷을 입고 싸울 수 없음을 확실히 기록해두었다.


선조실록 내용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810029_001


"지금 마땅히 민간에 있는 장인(匠人)을 널리 모아 방어가 요긴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화살을 만들도록 하고 또 호남에 있는 전죽(箭竹)을 많이 베어 배에 실어 운반하여 시일을 정해 놓고 일을 하되 새로 만드는 갑주나 창칼은 정예롭게 만들도록 하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에 민첩하고 옮기고 실어나르는 데에 편리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왜란시기에도 갑옷을 계속적으로 만들고 병사들에게 입혔음을 알 수 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6_010

🌕備邊司啓曰: "戰用之具, 莫切於甲冑, 而武庫所儲, 其數不敷, 西北邊上留置之數, 亦甚零星。 當此調兵守禦之日, 許多軍士, 不可赤身赴戰。 頃間各道兵、水營及各官, 有月課措備之令, 想已准數措備, 今依別定差使員, 及今月晦日內, 沒數上送, 以備軍前之用, 爲當。" 傳曰: "依啓。"


"전쟁의 용구는 갑주(甲胄)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무고(武庫)에 저장된 것이 그 수가 많지 않고 서북 변방에 남겨 놓은 것도 심히 적습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지키고 방어하는 때를 당하여 허다한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각도 병영·수영 및 각 고을에 월과(月課)로 조치하여 갖추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미 수효대로 맞추어 조치하여 갖추었을 것이니, 지금 별정 차사원(別定差使員)을 보내서 이달 그믐 안에 전부를 올려와서 군용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비변사 기록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확실하게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다 고 적혀있다.




그리고 저 갑옷 안 입었다는 실록의 내용도 자르고 지 유리한대로만 가져왔다고 지적해줌.


저 위 실록의 그 뒷 이야기가 있는데.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bb_014_001_04_0340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

啓曰, 昨因全南右道水使尹昌耉各浦甲冑量減事狀啓, 本司粘目, 各官與鎭浦, 殘盛有異, 依狀啓量減宜當, 大鎭則十二部內減四部, 中鎭則減六部, 殘鎭則減九部, 自本營參酌, 分等減定後啓聞事, 入啓蒙允矣, 慶尙·洪淸道及全南, 左道各鎭, 亦當一體施行, 以此竝爲知會于三道監司及水使處何如, 答曰, 依啓。

아뢰기를

"어제 전남 우도수사 윤창구(尹昌耉)가 각포(各浦) 갑주(甲胄)의 경감문제에 관해 올린 장계의 본사 점목(粘目)에 '각 고을은 진·포(鎭浦)와 형편이 다르므로 장계에 의하여 경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진(大鎭)은 12부(部) 안에서 4부를 경감하고 중진(中鎭)은 6부를 경감하며 잔진(殘鎭)은 9부를 경감하는 문제는 본영에서 참작하여 등급을 나누어 경감할 것을 결정한 뒤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경상·홍청도 및 전남 좌도의 각진도 다같이 시행하라고 아울러 3도 감사 및 수사에게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각 도의 형편에 따라 그해 년도의 생산을 경감을 시켜주었다고 하였지 생산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년도만의 생산 경감이 전면폐지고 조선군은 절대 갑옷을 안 입었다고 생각하는거같은데 능지가....



그리고 흉년이 들어도 갑옷과 무기를 마련하게 한 게 조선이다고 지적해줌.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709001_004

🌕兵曹啓: "近因凶荒, 諸道民生可慮。 今考雜色軍丁甲冑兵仗, 一時盡點, 非徒騷擾, 盡賣田産, 必致失業, 姑令每一戶備冑一、甲一、劍一, 其弓箭及槍, 不必皆備。 每一牌內五分之三備弓箭, 五分之二備槍, 以爲定數, 漸次而備。 每隔一年, 加備一物, 隨備隨點, 勿令監司都節制使差使員巡, 行點考, 只使其官守令點考, 以待都巡檢使下界。" 從之。

병조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인하여 여러 도(道)의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러우니, 지금 잡색 군정(雜色軍丁)의 갑주(甲胄)와 병장기(兵仗器)를 상고하되, 한꺼번에 다 점검(點檢)한다면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서 반드시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니, 잠정적으로 매 1호(戶)마다 투구 한 개, 갑옷 한 벌, 칼 한 자루만 준비하도록 하고, 그 활·화살과 창은 반드시 다 준비하지 아니하여도 되며, 매 1패(牌)내에 5분의 3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5분의 2는 창을 준비하게 하여 정수(定數)로 삼아 점차 준비하도록 하되, 매양 1년씩 걸러 한 가지 물건을 더 준비하게 하고 준비하면 곧 점검하도록 하되, 감사·도절제사·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순행 점고(點考)하지 말도록 하고, 다만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도록 하여 도순검사(都巡檢使)가 지경에 내려가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를 보면 흉년이라도 갑옷과 투구,칼은 반드시 준비하도록 한 것이 조선이다.라고 지적해줬음.



근데 무시됨 8ㅁ8





그래서 다른 기록도 제시해줬음.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



전선 1척과 사후선 1척을 운영했을 당시에 작성된 함평현 읍지에서 <수군기물 목록>에는 함평현이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했다고 적혀 있다. <영암읍지> 진보鎭堡 편에는 당시 영암현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진진과 어란진에 각각 철갑과 철 투구 47벌씩 비치돼 있다고 기록됐다. 어란만호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하고, 이진만호진은 여기에 방선 1척이 더해졌는데도 철갑과 투구 보유량은 함평현보다 오히려 더 적다. 그런데 어란진은 피갑주皮甲, 즉 가죽찰갑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20벌을 추가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진도군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했는데 철갑과 철 투구 69벌에 종이로 만든 엄두, 엄심갑 각 4벌을 보유했다.


병선의 승무원은 17명이며 이 중 격군은 12명이며,사후선은 5명 승무원 전원이 격군이다. 판옥선은 총원 130~200명 중 대선의 격군은 100여명이다. 판옥선은 격군의 수가 가장 작은배는 80여명인 경우도 있다.(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의 인용)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각 진과 보에 약 47~69벌의 철갑과 20벌의 피갑을 보유했다고 할 시, 판옥선의 승무원은 대략 130~200여명인데, 격군이 작은배일시 80여명이며 큰 배는 120여명인데, 그럼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갑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한 진의 병사를 점검했고 그 갑옷을 봐서 헐거나 한 것을 보고 벌 주거나 하였다.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이순신 <난중일기>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임진년 2월~3월 6일>





임진왜란시기 가장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고 공인받는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의 갑옷을 점검하였다고 적어놓았다. 더욱이 그러한 점검이 많았으며 한 진의 갑옷 수를 구체적으로 적어놓아 거의 모든 병사가 갑옷을 입었음을 증명한다.이것으로 해당 비변사 등록을 인용하며 조선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라는 주장하는 것은 바로 반박된다.



라고 기록을 줬음.


그러니까 반박을 하던데.


그 반박 전문은 이거임.



1. 난중일기에 충무공이 휘하 진영을 검열할 때, 갑옷을 점검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으로 조선수군의 수졸도 갑옷을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과대 해석으로, 난중일기의 기록만으로는 갑옷의 수량, 갑옷을 지급 받은 T/O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수군의 장비중 갑옷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적어도 임진왜란 때는 수졸에게 입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2. 또 포르투갈인 천주교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 조선군은 갑옷을 입었다고 하고 있으니 조선수군의 수졸도 갑옷을 잘 갖춰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우선 루이스 프로이스는 왜란 당시 종군하지 않아 모든 내용을 조선에 다녀온 사람에게 전해 들었을 뿐인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 대부분은 조선육군을 상대했던 자들일 것이다. 적군의 시신을 확인해 어떤 갑옷을 입었는지, 어떤 투구를 썼는지 확인하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과를 확인하고 전장을 수습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패배하지도 않았고 대부분 적을 크게 포격으로 깨트려, 왜군은 도망가기에 바빠 조선수군의 시신을 확인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3. 함평현읍지의 수군기물목록을 봤다면서, ‘수군 진영에 갑옷이 몇 벌 있고, 이는 승선 인원 숫자와 일치하니 조선수군은 임진왜란 때도 갑옷을 충분히 갖췄다’고 주장하는데, 군대의 비품이라는 것은 전란과 노후화에 따른 손망실과 신규 도입, 노획 등으로 얼마든지 바뀌기 때문에 비품 현황이라는 것은 어느 시점에 작성된 것인가가 중요한데, 문제는 함평현 읍지가 어느 시점에 작성 된 것인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모르는 것인지? 숨기는 건지?)


4. 광해군일기의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다’는 문구 하나에 집착해서 갑옷이 없이는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 갑옷을 갖췄다고 하는데, 광해군일기 기사 본문 자체도 서북 변방(평안도)과 중앙에 저장된 갑옷이 적으니 지방에 갖추라고 했던 것(수량에 대한 언급은 없음)을 거두어서 모으겠다는 것이고, 또한 왜란 끝난 지 20여 년이나 지난 뒤에 갖추라고 했다는 문구를 갖고 왜란 때도 갖췄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왜곡이다.



그래서 거기에 답해줌.



1.난중일기에 한 진의 군사 수를 7백명이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그들을 점검하고 처벌한 것이 난중일기에 적혀있는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고 수가 적혀있지 않다는걸 보니 반박 적은 것은 논리가 뭔지 모르고 숫자도 모르는거같다. 조선에서 병사가 갑주를 못 갗추면 병사로 복무할수 없다는 기본 규정도 모르는거같다. 그리고 다른기록도 없고 우기는 것이라 해봤자 실록의 1구절 뿐이고 다른 실록 기록들과 난중일기,그리고 외국의 자료들을 교차검증해도 갑옷을 입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역사의 기본중의 기본인 교차검증도 모르는 초등학생 정도 수준 혹은 그 이하의 금치산자이다. 여러차례라는데 개소리다.1구절밖에 없다.쫄리면 증거 가져오던가.그냥 무지성 우기기기 전부다.




2.다른 일본의 기록화를 보아도 모두 갑옷을 입고있는데 거기다 실록과 난중일기도 그것을 증명한다.자료 자체를 무시하고 억지로 우기는 꼬라지를 보면 우스울 따름이다.최원종의 기질이 다분히 보인다. 전국시대 다이묘도 모두 갑옷을 입혔는데 최원종 2세는 통일된 왕조가 그것을 못했다고 자껄이는걸 보면 인생을 뭐같이 살은게 드러난다.애초에 수렵시대부터 갑옷 입고 다녔는데

한 국가의 정규군이 갑옷 안입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거 자체가 상식이 없고 기본 지식이나 개념도 없다고 밖에 안보인다.



https://youtu.be/6T90NGMRyDY


그리고 왜란 당시 수전은 200보 내의 근접거리에서 벌어졌다.이것은 국립 진주박물관에서 사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내놓은 결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저 일2뽕 병신이 상병신임이 다시 드러난다.대부분의 적을 포격으로 크게 깨트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약이 부족한 조선에서,그리고 당시 포환으론 적선을 침몰하게 하는게 극히 어려운데 저딴 개소리를 적은거 보면 진짜 그냥 답이 없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냥 알수있는데 화약이 부족하기에 근접하여 활을 쏘고 불을 질렀다.그런데 저 일2뽕은 그것도 안한것이다.하다못해 국립진주박물관의 영상을 보면 된다.저정도로 수준이 낮은것이다.


이거를 모르는걸 보면 그냥 저 일2뽕은 존재해서는 안돼는 인류의 쓰레기다.




3.조선은 전례를 따라서 하는게 당연한데 그럼 돈 드는 그 짓을 왜 하는지 이 최원종2세는 모르나보다.전부터 하던것을 그대로 했다고 이해하는게 맞다.왜란때던 전이던 이후던 조선이 망할때까지도.그게 경국대전에 적힌 조선의 국법이니까. 거기다 저 수군기물목록이 제작된년도를 알아보면 저 일2뽕이 개소리를 해봤자 지가 가져온 저 실록 기록 이후에도 갑옷을 인원수보다 많이 계속 만들어 전원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인조 때 입지 않아도 되게 하자 << 라는 장궤를 올리고 건의했다는 것은

반대로 계속 입는게 당연했다는 뜻 아닌가???

오히려 왜란 때 수군이 갑옷 입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물론 그런 지능이 없어서 그랬겠지만)궤변을 늘어놓는것을 보면 진짜 수준 한심하다.링크 걸은 '안 입은' 혹은 '안 입돌고 하자는' 글은 전부 17세기 이후 기록인데,

왜란으로 보면 입은게 120% 맞는게 된다는 것도 생각 못하는거같다.거기다 그것도 난중일기에 적힌것으로 보아 그 실록기록도 사실이 아니다.갑옷을 다 안 입었다고 우기는 일2뽕은 글을 못 읽는거같다.




4. 없는걸 입히겠다,그리고 갑옷 없이 전장에 나가는건 싸울 수 없다는건 당연한 상식이라 필요한 만큼 모으겠다 그렇게 실록에 적은것인데 일2뽕은 상식도 없이 냉병기가 난무하는 전장에 갑옷도 없이 나가려나보다.

그리고 일2뽕은 내가 가져온 링크가 왜란 끝난지 20년 운운하며 왜란때도 그랬을거라 하는건 왜곡이라 지랄하는데.지가 주구장창 물고빠는 실록기록 1구절은 왜란 이후 50년이 지난 이후 기록이다.

거기다 왜란 당시 기록인 선조실록기록은 무시하고 끄적이는 꼬라지를 봐라. 수준이 드러난다.거기에 더해 난중일기 기록이나 일본 기록도 모두 무시한다.


병신만이 할 수 있는 개병신소리다.



근데 저 답엔 답변 안하더라.



근데 그 이후 한다는 거 보면 위에 저것들은 싹 다 생략하고 한다는게 인신공격,허위사실 글 쓰는거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사실을 지적해주는게 조선군은 갑옷을 입었다라는 잘못된 사실에 집착한닼ㅋㅋㅋㅋㅋㅋㅋ라고 글 싸던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뭐라해야 돼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최원종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