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세력의 명분이 되서 그러는 거임 이성계처럼 순수 본인의 무력을 가지고 쿠데타 했으면 모를까 병자호란 이후의 새정부라고 가정하면 사실상 대놓고 여진족한테 형님 형님 이러겠다는 입장이 될 텐데 그때 그랬으면 한반도 정치가 안정적으로 잡히진 않을 거임 인조야 북벌북벌 이러다가 포기했으니까 다른 양반이 봤을 때 아 우리가 노력해도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라도 들었지 병자호란으로 처맞고 새정부 나왔으면 암살하려고 하는 정치 세력 많아졌을 거라고 봄
그렇다고 새정부도 인조랑 비슷하게 북벌 타령하면서 분노 게이지 옆으로 배출하다가 포기했다면 큰 반란은 없었겠지만 청나라가 결국에는 쇄국하다가 아편 먹은 미래를 생각하면 새정부도 조선이랑 다른 운명은 없었을 거임 유교라는 사상은 계속 있었을 테니까
기득권과 그 세력의 사상에 변화가 있어야 뭐가 바뀌지 정치 사상이 안 바뀐 상황에서 정권 바꿔봤자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함
그리고 재수 없으면 기존의 조선이 북이나 남으로 런한 다음에 내전 일으켰으면 오히려 남북 분단의 역사가 이때 시작됐을 수도 있음 (청나라 입장에선 한반도가 분열되면 견제하기 쉬우니까 도와줄 이유도 없고)
개선이야 되겠지만 문제는 아시아는 워낙 제국 하나가 들어오면 온갖 꼬장을 다 부리니까 한계가 있다는 게 내 뇌피셜임 일본처럼 섬이라서 접근하기 힘들고 간간이 유럽이랑 교류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지 나폴레옹처럼 새로운 조정에 역대급 위인이 등장한다면야...
일단 내 뇌피셜 ㅈㄴ 굴려봐도 역대급 위인이 개입하지 않으면 별 차이 없을 거 같음 감투만 바뀌는 거지
이게 사람들이 조선시대 '예'라는 것에 대해 치를 떨 만큼 싫어해서 그런 것 같음.
그래서 유럽 대관식에 대입해보면 충분한 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예송논쟁은 '예의 때문에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다'라고 느껴지니깐 진짜 병신같고 불합리성이 극으로 달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는거 아닐까?
우리나라 역사가 너무 긴게 문제야...나도 역사 별로 안좋아했는데 역사교육과 와서 저런 사건들이 내포하는 의미를 배우니까 진짜재밌더라고. 그래서 교생실습가서 애들한테도 알려줘야징 했는데 파트가 너무 짧아....대학에서는 흥선대원군 파트만 3개월을 배우는데 학교 교과서로는 2페이지 분량인데 수업 50분 안에 흥선군 운요호 제너럴셔먼호 경복궁중건에 갑신정변하고 모둠활동해야되니까 예송논쟁은 상복입는걸로 논쟁했던얘기랍니다. 하고 넘어가야됨....
그렇게 긴 것도 아님 이집트는 기원전 왕조까지 무식하게 암기로 외워야 하고 땅 파다가 뭐 또 나오면 그거 교과서에 추가되서 또 공부해야 함 한국은 적어도 기원전 교육이 길지는 않잖음 걔들은 파라오 숫자만 해도 더럽게 많고 1세 2세 이딴 것도 뒤죽박죽으로 써먹어서 개판임
내가 왜 한국 역사가 안 길다고 했냐면 소실된 기록이 ㅈㄴ 많아서 그럼 특히 조선 기록 제외하면 그 이전 기록은 국내에서 파악이 힘들어서 중국이나 유럽 이런 곳에서 조사함 그래서 전쟁사 이야기 나오면 은근히 기록 없어서 남의 나라 기록에 의존하고 그러는 모습 나옴 말박이 북방민족과 섬나라 우끼끼들이 불 태우고 갔으니까 관련 서적들 증발한듯
역사 잘 모르거나 시간 부족했던 교사들이 상복 몇 년 입냐로 존나 싸웠어요~ 하고 대충 넘기니까 병신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지, 다른 나라였으면 내전 벌이고 분열되거나 대숙청 벌어졌어도 이상할 게 없음. 왕위의 정당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생각하면 더더욱. 단순하게만 봐도 왕 면전에다 님 애1비 정당성도 없는데 걍 장례 대충 치르고 넘기죠? 박은 거고, 여기에 고인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사상과 세력 싸움까지 얽힌 문제라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음
필연적이긴 했음. 안 그래도 정통성이랑 예의 존나 따지는 조선인데 둘째였던 효종은 정통성 면에서 많이 약했거든. 서로 품 안에 성냥 하나씩 들고 다니는 와중에 왕의 장례라는 개쩌는 휘발유가 떨어졌으니 불이 붙는 건 필연적이었지. 세력 싸움이 엮이기도 했고. 물론 그거 가지고 지들끼리 지랄하고 싸운건 병신이 맞음
문제는 예송논쟁을 위시한 당파싸움을 양당정치와 민주주의의 맹아라 주장하는 멍청이들이 있어서 그렇지 당파싸움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한건 국가의 발전이나 학문의 진전따위가 아니라 정적들을 제거하고 한정된 관직 자리에 자기 파 사람들을 채워넣는것이었음에도 그리고 그 전근대성이 작금의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잘못된 정치 풍토로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도 그걸 마치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정치 체제의 근간인냥 포장하고 있음
한국 민주주의의 탄생에 큰 영향을 준 건 맞음. 효종의 죽음으로 벌어진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이겼는데, 이 서인들이 주장하던 핵심 사상이 "왕이면 뭐 하늘에서 천사 끼고 내려오냐? 어차피 다 똑같이 태어난 똑같은 사람 아님?" 이라는 이기일원론이었거든. 이런 사상은 노예제의 해체를 이끌었고, 이렇게 풀려난 노예들이 점차 정치적인 자유와 권리를 찾기 시작한게 민주주의의 태동임
바로 이런 주장이 맹아론의 문제점임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같은 근대적 사회 체제는 어느 비슷한 조문 하나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발생하는게 아님
민주주의는 교육받은 민중의 정치참여와 힉문과 사상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의 보장이 전제조건임에 조선 중후기는 그중 그 어떠한것도 달성하지 못했음
노예제의 소멸이라고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조건은 절대 아니며(그러면 링컨시대까지 남아있던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나?) 심지어 니가 주장하는 노예제는 영정조는 커녕 고종 시대에나 명문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그 명맥은 일제시대에까지 잔존하다가 625전쟁때에 와서야 완전히 사멸함
요새 혁명으로까지 격상하자고 난리인 동학마저도 정치적 목적을 걷어내고 보면 사실 근대적 시민 혁명의 요건은 거의 갖추지 못한 민란이었을뿐임 그 어떠한 미사여구를 갖다붙여도 동학 중심 세력이 내건 기치는 척왜근왕, 일본을 비롯한 외세를 몰아내고 왕 주위의 간신배들을 처단해 왕을 보필하자였음
조선에서의 군신관계는 성리학이라는 건국이념의 특수성에 기반하고 있음 제 아무리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한들 왕권의 틀안에서 허용될뿐 민주정이나 공화정에 기반한 근대적 입헌군주정의 권력관계와는 수억광년 떨어진 통치 체제임
심지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킬때 고종이 블러핑으로 아무리 그래도 백성들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나 라고 할때 일본측에서 니들 어제까지만해도 가산제국가 하더만 이제와서 입헌군주정 흉내내겠단말이냐? 라는 반박에 한마디 말도못한 일도 있을정도임
애초에 왕정 국가에서 왕을 인정하냐 안하냐를 내전까지 안끌고 당쟁으로만 끝냈다는 것 자체가 진짜 성숙한건데, 어떤 애들은 예송논쟁은 "찐따들 말싸움"이고 일본 전국시대는 "영웅의 시대"라 평가하더라 ㅋㅋㅋㅋㅋㅋㅋ
현대 기준으로 이승만, 박8정희 같은 인물들 국부 취급 안해준다고 칼찌놓고 내전 일으키는게 얼마나 ㅂㅅ같은지 생각해보기 바람
다들 조선은 명,청 이란 인접국의 신하국이었단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거 같음 효종은 청나라 '책봉' 을 받은 정식 왕인데 거기에 장자가 어쩌고저쩌고 모후가 어쩌고저쩌고 예송논쟁 따지는건 찐따새끼들끼리 니가 돈을 얼마 더 상납했으니 진짜 셔틀이네 아니네 이런 개헛짓거리 맞는거 아녓음? 어차피 명나라 청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실권을 가진 왕이 되는 신하국이었는데 예송논쟁 따져대면 대체 뭐가 더 좋아지는거임?
첨 댓글에서는 공녀라는 단어를 쓴걸로 봐선 님의 조선에대한 불호가 좀 센것같은데, 호불호와는 별개로 명나라랑 청나라는 둘다 조선을 단순히 찐따셔틀로 생각하지 않았음. 기왕 조공 얘기를 꺼냈으니 조공책봉의 외교적 성질을 보면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역학적 관계, 중국의 주변국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후의 사건사고와 관계들을 볼때 단순히 일진과 셔틀관계로는 설명이 안됨. 이에대해서는 너무 적을거리가 많고 나의 설명이 많이 부족할것같아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읽어보는것을 추천함.
공녀 썼다 다시 지운건 원말 명초 시기완 다르게 청나라 시기엔 그닥 없었단거 생각한 뒤 지운거고... 글쎄 난 좀 다르게 보는게 정복자의 입장에서 '얘네를 정복한다 한들 얻는 이익이 있을까?' '반란, 소요사태가 계속 일어날 경우의 손해' 이런걸 어느정도 감안하고 책봉 및 신하국, 조공 받는 관계가 더 맘편하니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전세계적으로 식민지 붐이 일어나니 바로 청나라가 집어 삼킬려고 시도 햇던거 보면 철저하게 손익계산을 하고 있었다 라고 볼 수도 있지않나? 17세기에 조선을 집어 삼켰으면 대외적인 인정 같은건 없고, 반란, 소요사태에 골머리 앓기만 할뿐인데 식민지 붐의 19세기 말에 집어 삼키면 대외적으로 '식민지' 인정 받으면 깔끔하니까 강대국 끼리 '거긴 너네 식민지해 여긴 우리가 먹을게' 이러던 시대니까 ㅇㅇ
내가 말꼬리잡는것처럼 보일수가 있는데, 그런 의도는 없음. 다만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답글 남김.
1. 얘네를 정복한다 한들 얻는 이익이 있을까? 반란 소요사태가 일어날 경우의 손해? 이런것은 사실 의미가 없음. 정복할 수 있으면 무조건 정복하고, 뺏고, 여의치 않으면 부시는게 좋음. 특히나 농업사회에서는. 그러지 않은건 중원을 유지하기 위해선 조공책봉시스템을 답습하는게 좋기때문임. 조공책봉시스템은 식민-직접통치 혹은 식민-자치권 과는 성질이 다름. 중국과 한반도가 동등했다고까지는 얘기를 못하겠으나 일종의 파트너쉽에 가깝다는 것이 현대의 해석임. 왜냐면 책봉을 거부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실질적인 규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임. 또한 조공을 할경우 중국에서는 더 많은 물산을 돌려줘야했음. 일종의 무역관계로 보는게 현재의 해석임. 심지어 조공품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줘야했기때문에 재미있는 현상들이 벌어짐. 중국에서는 하사품 주는게 부담스러워서 조공을 받길 싫어하고, 조공을 바치는 입장에서는 바칠수록 이득이니까 어떻게든 구실잡아서 조공 횟수를 늘리려고 했음. 걔중에는 중국이 원하지 않았는데 강재로 중국을 두들겨패서 책봉관계(동생을 자처)를 맺는 경우도 있었음. 요컨대 명청은 기존의 조공책봉관계를 답습했고, 이건 찐따외교관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물론 명나라에 비해서 청나라 조선의 힘의 역학관계는 분명함 두들겨 맞았으니.
2. 전세계적으로 식민지붐이 일어났을때 청나라도 주변국의 식민지화를 꾀했던 걸로 보면, 청나라가 철저하게 손익계산을 했다... 는 것은 예송논쟁때와 근대시기의 손익계산이 달랐다고 말하는거지? 여기서 몇가지 역사적 오해가 있는거 같은데 예송논쟁은 1650년 즈음에 일어난거임. 국가는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고, 지배층 피지배층 포함 소속 구성원들이 성질이 끊임없이 변하며, 또한 주변부와의 관계도 실시간으로 달라짐. 요컨대 이승만시절의 대한민국을 머리에 담아두고 현재의 대한민국을 얘기할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임. 청-조선 외교관계를 17c와 19c를 비교할 때 '식민지화 효율성' 이라는 관점으로 해석이 안된다는 것임. 예송논쟁당시 중국은 아직 남명이 남아있는 등 외부의 혼란과 더불어 내부의 권력의 향방도 불명확한 상황이었음. 이런부분으로 해석을 한다면 모를가 19c의 청나라와는 시기도 차이나고 여건도 많이 다름.
3. 피책봉국=셔틀찐따, 조선=피책봉국, 어차피 셔틀찐따의 왕은 명청에서 점지해주는건데 찐따들끼리 왕위 정통성을 두고 싸운 예송논쟁이 무슨 의미느냐? 이렇게 되면 실제로 일어난 99퍼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방법이 딱 한가지밖에 없음. 다 병신이라서 병신했을뿐이다. 근데? 그러면? 또 실재하는 역사적 현상을 제대로 인식할수가 없음. 왜 조선은 병신유교를 신봉해서 병신이 됐나? 애초부터 병신이었기떄문에 유교를 신봉한거다 ㅇㅇ; 아! 예송논쟁같은 병신짓을 왜했나 병신이라서 그랬구나... 왜 영조는 세자 정하는건 어차피 왕 맘인데, 아니 어차피 청나라 맘인데 사도를 굳이 뒤주에 가둬서 어렵게 죽였나? 청나라한테 정조 왕한다고 결재받고 그담에 사도죽이면 되는데... 인조가 병신이라서 ㅇㅇ;; 그런데 그게 병신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사실은 이런이런 이유가 있음~ 이러면 제대로 설명이 됨.
답글이 장황하고 조금 비꼬는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의도는 없음. 님한테 다는 댓글이면서도 가끔 보이는 이상한사람들한테 남기는 글이기도 해서 그럼. 이제 점심시간인데 맛있는거먹고 좋은하루 되길 바람.
명청에서 조선 왕의 책봉을 할때 여러 왕후보 리스트를 뽑아서 입맛에 맞는 애를 픽업해서 강제로 왕으로 쑤셔박는다거나, 강제로 혈통을 합친다던가, 왕이 입맛에 안맞는다구 새로 갈아끼우던가, 조선에 별도 기구를 설치해서 좆대로 휘두른다던가 하면 님 말이 맞음. 그런점에서 원간섭기 고려는 찐따셔틀이 맞는거같음. 그런데 이거에 대한 평가도 여러 논쟁이 있음.
청나라가 그때 진짜 부모도 모르는 금수 천지라 청나라 책봉이 호란 시즌3 피하기 위해 필요한 건 맞는데 죽어도 숭정제 못 버리는 조선 사대부들 설득에 필수적인 건 아니었음
그래서 예송 논쟁처럼 별도로 국내 정통성 보정용 논쟁이 필요했던 거지. 아니면 광해군 마냥 칼침 맞을 수도 있고 실제로도 무수리 출신이라 정통성 하자있던 영조는 그 유명한 삼종 혈맥을 내세우고도 이인좌의 난이라는 초대규모 반란을 마주해야만 했음
당시 논쟁이 벌어질 상황보면 헛짓거리가 전혀 아니었음.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 동생인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어 효종이 된건데 종법을 따지면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면 안됐음.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멀쩡히 있었기 때문에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적장자, 즉 원손이 세손이 되야함. 근데 소현세자를 경계한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히고, 민회빈 강씨를 사사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유배보냄. 그래서 효종이 즉위할 수 있었음.
그리고 효종이 승하한 이후에도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살아있었음. 당시 신하들은 경국대전에 근거해서 1년복을 입자는 의견과 효종을 적장자로 보고 3년복을 입자는 의견이 나뉨. 의견이 정해지지 않자 영의정 정태화가 송시열한테 물었는데 송시열은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를 4가지 말함. 문제는 그 4가지 중 하나가 "아들이지만 적장자가 아닌 경우"가 들어있었음. 즉 효종은 적장자가 아니니 1년복을 입어도 된다는 건데, 그 얘기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어짐
효종은 적장자가 아니니 1년복을 입자. -> 원래 세자는 적장자가 되어야 하는데? ->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중 맏이가 세손이 되었어야 하는데? -> 그럼 효종은 원래 왕이 되면 안되는거였네? -> 따라서 지금 왕(현종)을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자 라는 논리가 되버림. 누가 봐도 내전각이 보이는 주제였고 그래서 예송논쟁이 벌어진 거였음.
참고로 청나라에서는 봉림대군이 왕이되든, 소현세자 아들이 왕이 되든 상관없음. 그냥 조선에서 세자가 누가 되었다 보고하면 청은 사후 승인하고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