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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1942년 9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세르게이라는 이름의 소련군 병사가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의 편지에는 고향이나 집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오로지 승리를 향한 확신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력의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열세인체로 시작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장장 6개월 만에 기어이 승리로 이끈 소련군의 강인한 의지를 대변하는 듯한 아주 짧고 강렬한 메시지이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모든 소련군이 세르게이처럼 전의로 똘똘 뭉쳐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된 전장 한가운데서 셀 수 없이 많은 장병들이 무너져 내렸고, 눈앞에 펼쳐진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그리고 이들을 향한 소련 당국의 인식은 스탈린이 남긴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붉은 군대를 돕지 않는 자, 붉은 군대의 질서와 규율을 지지하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나 다름없으며, 가차 없이 처형해아 한다.”

소련군 수뇌부가 스탈린이 지목한 ‘반역자’로 간주된 자국의 병사들을 다루는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탈영병, 혹은 적에게 투항을 시도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되는 즉시 처형되거나 형벌 부대로 보내졌고, 그의 가족들은 270호 명령에 의거해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복지와 지원을 박탈 당했다. 공산주의 사회인 소련에서 이러한 처사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탈영하거나 투항하려는 동료 혹은 부하를 즉각 사살하지 않았을 때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1942년 7월 28일 붉은 군대에게 하달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로 요약되는 227호 명령에 따라 적을 앞에 두고 명령 없이 후퇴한 자들도 반역자 명단에 포함되어 똑같이 처벌됐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13,500여명의 소련군 병사가 무단 후퇴에서부터 자해, 탈영, 투항, 부패, 기타 각종 반소비에트 활동 등의 혐의로 군법 재판 혹은 즉결 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그 중 극히 일부를 따온 것이다.


1.
1942년 9월 12일 오전, 제6근위전차여단의 상사 한 사람이 같은 전차에 탄 자신의 중대장을 사살하고 조종수와 무전수를 권총으로 위협하여 전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그 전차를 몰고 독일군 제76보병사단의 진지로 넘어가 투항했다.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백기를 포탑에 내건 것을 본 독일군의 심문관들은 이 ‘노련한 배신자’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사의 협박에 순순히 전차를 내준 두 병사는 ‘비겁 행위자’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아마 둘 다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총살형을 선고 받았을 것이다.


2.
9월 16일 밤 11시, 제112소총병사단의 소대장을 맡고 있던 한 중위는 네 명의 병사와 하사관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을 찾아내어 반역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중대장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새벽 1시경, 정치장교인 코라바노프는 이 소대로 조사를 나갔다. 아군 참호로 다가가자 저 너머의 독일군 진지에서 러시아 말이 들려왔다. 소대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다같이 탈영하면 독일군이 잘 먹여 주고 재워 준다. 소련 편에 남아 있다가는 이래저래 죽는 길밖에 없다!”

이어서 코라바노프는 몇 사람이 독일군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도 소대원들 가운데 누구도 그들을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기가 막혔다. 그는 하사관을 포함하여 모두 열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하들의 탈영을 막지 못한 소대장은 그대로 체포되어 군법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아마 처형되거나 형벌 부대로 끌려갔을 게 분명하다.


3.
9월 25일, 스탈린그라드 남부 지역에 위치해있던 소련군은 볼가 강을 등진 채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42특수여단의 지휘관이 ‘참모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며 전선을 이탈’한 것에 이어 제92특수여단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9월 26일 여단 지휘관과 정치장교가 참모들과 함께 부하들을 버리고 볼가 강 한가운데의 고로드니 섬으로 피신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지휘부가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병사들은 강둑으로 몰려가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부는 통나무에 의지한 채, 일부는 직접 쳐서 고로드니 섬으로 향했다. 그들의 처절한 도주 계획을 알아차린 독일군은 가차 없이 박격포와 야포를 쏘아 댔고, 많은 병사들이 강물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놀랍게도 지휘부를 시작으로 한 장병들의 대규모 탈영을 맞은 제92특수여단은 남은 이들 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기관총 대대의 야코블레프 소령과 소루체프 중위의 지휘 아래 재정비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방어선을 다시 구축해 이후 24시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편 섬에 숨어들어간 원래의 지휘관은 남아있던 수비대에게 탄약을 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도주 사실을 숨기기 위한 허위 보고서를 상급부대인 제62군 지휘 본부에 올렸다. 그러나 62군 참모들은 한눈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그의 거짓말은 얼마 안가 들통나 버렸다. 그는 체포되어 ‘제227호 명령에 의한 범죄적 불복종’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모스크바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그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졌는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누가 봐도 관용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4.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8월, 스몰렌스크 출신의 한 하급 장교는 돈 강 부근에게 독일군에게 생포됐는데, 그는 그 직후 탈출에 성공했다. 그래서 다시 소련군을 찾아갔지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탈영자로 분류되어 체포된 다음 제149특수여단 휘하의 형벌 중대로 보내졌다.


5.
자해 역시 일종의 탈영과 같은 범주로 간주되었다. 제13근위소총병사단 소속의 한 병사는 자신의 손에 스스로 총을 쏜 혐의를 쓴 채 응급 치료소로 후송되었다. 그는 독일군의 포격이 시작된 틈을 타 탈주하려 했으나 체포되었다. 의사들은 그의 상처를 조사한 결과, 자해로 인한 상처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에 처해졌다.

제196소총병사단의 19살 난 소위 한 명도 자신의 왼손 손바닥에 총을 발사한 혐의로 공개 처형되었다.

6.
꾀병도 같은 범주에 포함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정치국장 도브로닌의 보고서에는 귀가 먹고 말도 못하는 증세를 보이는 11명의 병사가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의료 위원회가 그들의 군사 임무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서류를 군법 회의로 회부하자, 그들은 대번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7.
NKVD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정치국은 '반소비에트' 활동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독일군의 전단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된 병사들은 무조건 NKVD로 인계되었다. 담배를 말기 위해 무심코 독일군의 전단을 주웠다가 곤육을 치른 이들도 많았다.

잠시 이성을 잃고 상관에게 붉은 군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은 병사는 '반 혁명 선동' 혹은 '승리에 대한 불신'이라는 혐의로 고발되기 일쑤였다. 제204소총병사단의 한 병사는 붉은 군대 지도자들을 폄하하고 자신의 지휘관을 협박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제51군 소속의 두 병사처럼 체제를 비판한 자들도 NKVD에 체포되었다. 한 병사는 '집단 농장의 일꾼들은 노예와도 같다'는 파시스트적인 말을 퍼트렸으며, '소련의 선전은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죄악과 동의어로 간주되는 '반소비에트 활동'의 사례가 전투 일선에서 발생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장교들은 1812년부터 이어져 온 "병사들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군 특유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음과 마주 선 병사들은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병사들은 공산당 관료들의 무능, 부패, 과시욕 등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죽을 위기를 질리도록 겪은 병사들은 정치장교나 밀고자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바로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독일군의 총탄이든 조국의 마지막 배급품, 즉 NKVD의 '9그램짜리 납덩이'든  다 거기서 거기였다.

반소비에트 활동이 보고된 사례는 대부분 후방에서 발생한 것들이었다. 신병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가는 동료들의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인 분위기였다. 제178훈련연대에 소속된 스탈린그라드의 한 시민은 겨울이 되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거라는 말을 했다가 동료 훈련병의 '정치적 양심' 덕분에 금방 체포되었다.



8.
더 이상 전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제284소총병사단의 한 타타르 인은 탈영을 결심했다. 어둠을 틈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주간에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간신히 그가 찾아간 곳은 소련군 제684소총병연대의 주둔지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장교가 소련군 군복으로 위장한 독일군 장교라고 믿고 그에게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9.
전투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제45소총병사단에서 탈영병을 붙잡아 처형했는데 의무병이 확인해 보니 아직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려는 순간, 독일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탈영병은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독일군 진영을 향해 걸어갔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보고가 올라갔다.


10.
제45소총병사단 특무국의 저격수들은 사격 솜씨가 영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한번은 그들에게 자해를 시도한 병사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하달된 적이 있는데, 여느 때처럼 군복을 벗기고 총살형에 처한 다음, 시신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은 약간 덮었다. 그러고는 사단 본부로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총살된 병사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채 속옷 바람으로 자기 부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그는 다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11.
10월 17일과 18일 밤 사이에 제64군 제204소총병사단 소속의 두 병사가 실종됐다. 연대장과 정치장교는 중대장을 불러 탈영자가 소속된 소대의 소대장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19세의 소대장은 불과 닷새 전에 부임해 온 자로서, 아직 두 명의 탈영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장은 지시에 복종했다. 소대장은 정치장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