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중농학파로 분류되는 실학자 유형원, 정약용, 이익은 크게 다음과 같은 농업 개혁을 주장했음


유형원(균전제) : 신분에 따라 토지를 차등 있게 재분배 + 조세, 요역도 재조정


정약용(여전제) : 일정한 구획인 '여'를 설정해 공동 경작, 세금 등을 제외한 수확량을 노동량에 맞게 분배


이익(한전제) : 한 가구가 생활할 수 있는 영업전을 두고 매매 금지, 그 이상의 토지는 매매 가능


농업 개혁의 논의만 보면 아주 생뚱맞지는 않고, 충분히 해볼만한데? 싶은 내용임


그러나 여전히 중농학파의 개혁은 가장 중요한 문제점을 놓치고 있었음



바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의 강역이 확정된 이후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 토지는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음


토지의 절대적 크기가 증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농업 개혁을 주장해도 실질적인 효과를 보긴 어려움



가령 유형원이 주장했던 '균전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가 최초로 주창한 바 있음


물론 세부적인 제도의 작동방식은 크게 달랐지만, 대토지 소유 억제와 토지 분배라는 핵심은 같았음


그리고 이러한 균전제는 북위 이후 북제, 북주, 수, 당나라 대까지 이어짐



그런데 이러한 균전제가 작동될 수 있었던 배경을 알아야 함


북위는 오호십육국을 종결시키고 북조를 통일한 나라였음


그 이후 수나라 대까지 남북조라는 중국의 혼란은 지속되었고


수나라도 몇십년 채 가지 않아 수양제가 삽질을 한 끝에 당나라로 세워졌음


이렇게 수백년에 걸친 대혼란의 결과는 황폐해진 땅은 많고, 인구는 적었다는 점이었음


때문에 사람들을 토지에 결박시켜 호구를 작성하고, 노동력을 바탕으로 다시 생산력을 높이고


그렇게 높인 생산력은 다시 인구를 늘렸고, 조정은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런 당나라의 균전제 역시 인구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1인당 토지 소유량은 줄어드는 결과를 맞이했음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나라의 황제들은 온갖 힘을 다했음


당 고종은 아예 영업전과 구분전의 판매 자체까지 금지시키기까지 했음


그러나 대외전쟁으로 인한 부병제 붕괴, 당 현종대 이후 민간 지주와 불교 계층의 성장을 맞닥뜨렸고


결국 현종은 군사개혁의 일환으로 군진제를 실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나라의 몰락을 야기한 번진과 절도사의 등장이었음



여하튼 1인당 토지 면적은 조선 초기때 정점을 찍고,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음


물론 조상들은 그에 맞춰서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옮기고 이모작을 하고, 자투리 땅에 작물을 심는 등


부족한 여건에서도 최대한 땅을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해왔고


조선 초기 때보다 단위 면적당 농업 생산량은 월등히 높아질 수 있었음


하지만 여전히 토지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인구도 늘었기에


당시 조선의 농업 문제를 완전히 뜯어낼 수 없었지



때문에 함경도와 같은 곳에서는 삼정의 문란과 같은 수탈 문제 속에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간도)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한 뒤 다시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와 겨울을 나는,


월경민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나중에 가서는 아예 간도 땅에 터를 잡고 정착하게 되었음


이로인해 청나라와 영토 분쟁을 하게 된 것이 토문감계였고, 이 토지 분쟁은 대한제국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됨



한편, 균전제를 기반으로 통치하던 당나라가 무너지고 오대십국시대를 지나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균전제를 포기했고, 때문에 사적 토지 매매를 크게 제한하지 않았음


대신, 부동산 거래를 할 때 관부에 계약세를 납부시켜야만 거래를 성립되도록 하고


상인들의 활동에 세금을 매기는 등 다양한 형태로 세수를 확보하고자 했음



이러한 조세 제도는 조선에서도 공상세라는 이름으로 비슷하게 실시되는데,


태종은 장인과 상인을 관청에 등록시키고 매달 저화 1장을 납부하도록 명했음


이는 상업 활동을 억제해 농업을 진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동시에 화폐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


그럼에도 현물 경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세종은 저화 대신 쌀과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바꿨지



어떻게 보면 농사 짓을 땅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상업을 진흥시키는 게 또 하나의 해결책이라 볼 수 있음


국가는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을테니 말임


그러나 명청이 은본위제로 세계 은을 커비 마냥 빨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조선은 후기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화폐 경제가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지


물론 이에 대한 원인을 단순히 조선 정부가 탄압했다고 보는 건 편협한 시각이긴 함



은광을 개발하기엔 한국의 은 매장량은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터무니 없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주변 나라의 은화를 화폐로 쓰게 되면 조선 경제는 주변 나라들의 은화 유통에 좌지우지되버림


그나마 믿을만한 상국이었던 명나라 대는 오히려 조선한테 은을 내놓으라고 압박했었고,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입장에선 잠재적 적국 내지 웬쑤였으니 어떻게 저들 나라를 믿겠음




결론적으로는 중농학파들의 개혁이 아주 터무니 없던 건 아니지만,


당시 조선이 처해있던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음


또한 당대 조선 조정도 실학자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지


가령 유형원의 균전제를 비롯한 개혁책이 담긴 반계수록은 영조 대 여러 학자 및 관료들에게 인정받았고,


정조는 직접 자기 입으로 반계수록을 언급하며 유형원을 이조 참판으로 추숭하기까지 해주었으니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