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인도의 비정상회담 사진이다.


이 글을 보면 "시발 혐성새끼들 염치 있음?"


소리가 나올수 있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좀 다르다.

영국 입장에서 풀어보자.

한국은 일본에 16.7% 우호적이고

48.1% 부정적인 반면


2014년 BBC에서 조사한 바로는

인도인의 43%가 영국을 긍정적으로,

27%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사이좋다는 

몽골-한국 관계보다도 높은 수치인 것이다.


왜 그럴까? 



위에는 인도의 민족 지도이다.

존나 섞여있다.


인도는 지난 5000년동안 통일된적이 없었다.


"무굴제국은 그래도 북부 통일한거 아님?"

이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무굴 제국도 이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몽골처럼 단순 복속시킨것 정도에 불과하고,

심지어 저것도 100년을 못가고 내부 반란을

이기지 못하고 쇠퇴한다.


그럼 언제 통일됬을까?

1498년부터 1764년까지 인도는

여러 회사의 결투장이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s

포르투갈 동인도회사vs

프랑스 동인도회사vs

영국 동인도회사 


의 4파전에서, 

프랑스 왕국과 영국의 마지막 결전이라고 할수있는

7년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며 인도는 점차

영국 회사들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1848년에 이르면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일어나니, 

아마 잘 알고있을 세포이 항쟁이였다.


1857년, 동인도회사에서는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일단 회사에서 기득권층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협조하는 전략을 취한것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사실상 

무굴제국의 확대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배층이였던 세포이들의 세금 감면 해택이 

축소되고, 하층민이였던 힌두교가 점점 출세하는

경우가 증가했다.


이에 이슬람교 세포이들은 총포에서 소기름이 

사용됬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구실로 항쟁이 일어난다.


참고로 당시 동인도회사에서는 기름을

직접 만들어 쓰라고 지시했다.



평소에 이슬람에게 탄압받으며 대우받지 못하던

힌두교와 시크교는 영국에 적극협조해 

이슬람과 힌두교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찐한 남색이 새포이 항쟁 지지 지역)

결국 영국군에 의해서 실패한다.

영국은 이로인해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1870년대, 인도가 안정화되자

토마스 베어링 총리는

영국이 재정난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근을 구제하고 세금을 인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근으로 인도에서는 500 만명이 사망했는데,

중국과 남미 등지에서는 5000만명 이상 사망했다.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재임한 총독 

커즌 경은 보수적이었던 선임자들에 비하여 

유난히 개혁 정책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철도 건설, 세금 인하, 치수 공사 확장, 

금융 안정을 위한 금본위제 채택, 

농노들의 빚 감면, 

농업 은행 창설, 도서관과 대학 창립 등 

여러 개혁적인 정책들을 펼친 것이다.


인도에서 소아성애와 과부들을 화형하는

악습들이 철폐되기 시작했으며, 

카스트 제도를 막기위해 카스트 제기법등을 통해

하층 카스트의 출세를 보장했다.

그렇게 인도인들은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즉 1900년대 초부터는

영국은 인도에 정치적 자유를 형식상이나마 

부여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에 있던 영국의

 군,공무원, 민간인의 총합이

15.7만명에 불과한데 반해, 

인도의 인구는 2억이 넘었다.

당시 인도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독립은 손쉬웠으나,

인도인들을 이때까지 영국에 우호적이였다.


왜 그랬냐?

당연히 착해서는 아니고, 

돈 잘 빨아먹고 있는데

독립해버리면 돈이 날아가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이슬람의 기득권을 줄이고

힌두교를 올려치기해 

힌두교의 지지를 받아 더 쉽게 통치하기 위함이였고,

이것은 영국의 경영방침이였다.


그리고, 곧 1차대전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기록에서는 

대영제국군이 890만이라고 나와있지만


영국에서는 5~400 만이라고 나와있다.

어떻게 된걸까?


영국에서는 인도군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300만정도의 인력이 자원입대하며

저치권을 보장받는대신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보통 

0.1%~0.3%정도의 징집률이 나오는 반면

영국령 인도는 3% 가까이 자원입대하며

영국령 인도의 지지가 든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인도는 신인도통치법으로,

행정권과 자치권을 이양받게 된다.

사실상 외교권을 제외한 

대부분 권력을 이양받은 것이다.

(물론 캐나다랑 호주등은 외교권까지 받음)


모든 권한이 백인 영국인들에게 잡혀있던 이전과

 비하면 놀랄 정도의 진전이었다.


 영국의 유화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고 

시골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친영 성향의 인도인들에게

 의회의 의석들을 배정해주거나 

지주, 사업가, 옛 귀족층 등 인도의 엘리트 계급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베풀어주면서 

인도인들의 지지를 다시 받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영국은 독립여론을 은근히 탄압하며

완전한 개혁은 계속 뒤로 미뤘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벵골대기근이 일어났다.


벵골지방은

1901년부터 40년 동안 인구가 4,210만 명에서 6,030만 명으로 무려 43% 폭증했다.

 농지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20세기 초부터 부를 축적한 인도의 부농들은

고리대금으로 재산 불리기에 열중했다. 

자영농들의 빚은 날로 불어났고

 빚을 갚지 못하면 바로 땅을 빼앗겼다.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심해졌고 

1940년대에는 수 백만명에 달하는 자영농들이 죄다 땅을 지주와 부농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추축국은 

1942년 1월부터 1943년 5월까지 인도양에서만 추축국은 총 873,000톤에 달하는 

영국 및 연합군 상선 230척을 침몰시켰다. 


또한 런던 정부는 벵골에 잉여 식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판단하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벵골대기근이 일어났다.


이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영국 본국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대대적인 지원을 했고, 

1943년 말부터 대규모 구호품들이 들어왔다. 

1만 5천 명의 영국 군인들이 농촌 지방까지 구석구석 식량들을 구호하기 시작했고 

주 간 무역장벽이 철폐되며 펀자브 지방에서 쌀이 대량수입됐다. 

치솟았던 쌀값은 서서히 떨어졌고, 

결국 대기근은 점차 줄어들더니 

1944년 즈음에 종결된다.

 하지만 이 대기근이 남긴 경제적, 

사회적 악영향은 엄청났고 

영국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와 자치에 대한 요구는 한 층 더 거세졌다.



결국 영국은 인도에서 민심을 잃고,

1947년 인도를 독립시켰다.


인도정부는 파키스탄도 독립시켜달라는 

말을 계속 무시하며 갈등이 강해졌으나.


영국 입장에서는 이제 딱히 알빠가 아니였다.

그렇게 결국 인도는 독립하게 되었다.


요약)


이새끼 말도 완전 잘못된건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