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그리스 신화 잡소리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는 황금사과에 적힌 이 문구는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장면임


대부분 이 황금사과를 두고 열린 경합에서 심판관을 맡게 된 미남 양치기 파리스가 내린 선택이 의아하기 때문




최고의 권력과 부를 쥐어주겠다고 약속한 헤라, 지혜와 승리를 통한 명예를 선사해 주겠다고 한 아테나, 그리고 세상의 어느 여인이든 유혹할 수 있는 매력을 선사하겠다고 유혹한 아프로디테


그리스 신화를 읽는 이들은 대부분 여기서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고르는 것을 보고 여색에 눈이 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나 합리적인 시선에서 해석해보려고 노력함


혹자는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골랐기에 사랑의 여신이 내리는 저주에 당해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는 결말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파리스가 세 여신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더욱 상위의 여신에게 황금사과를 봉헌하거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입을 잘 털어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궁금해하지




하지만 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함


파리스가 제3자에게 사과를 바쳐도 괘씸죄로 인생 조진다느니 제3자가 안 받아주면 땡이라느니, 아프로디테를 골랐기에 최악을 피했느니 그런 건 다 필요 없음


그리스 신화에서 개인의 노력과 선택 따위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파리스가 심판관이 된 날 운명은 그의 파멸과 트로이의 멸망을 확정했기 때문임




운명은 그가 선택을 내린 때가 아니라 심판관이 되었을 때 결정되었음, 즉 파리스가 어떤 선택을 하였든 간에 트로이는 멸망하게 되었다는 거


밀프 취향 확고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바치고 얻은 유혹의 기회를 30대 유부녀 헬레네에게 썼고, 분노한 아카이아인들과 10년 동안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사랑 때문에 죽고 트로이까지 멸망함


그리고 파리스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본인의 죽음과 조국의 멸망이라는 결말은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거임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대신 헬레네를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아카이아 전체와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언젠가는 그가 선택한 사랑이 그를 옥죈 끝에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그를 죽게 만들었을 것이요,


파리스가 헤라를 선택했다면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만 그 권력과 부를 시샘하고 탐낸 자들에 의해 공격받을 것이고 결국은 권력에 짓눌려서 트로이와 함께 파멸하였을 것임


그리고 아테나를 선택했다면 지혜와 승리를 통해 명예로운 자가 되었겠지만 어느 순간 그 지혜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서 드높은 명예가 무색하게도 허망하게 죽게 되었겠지, 트로이도 함께




결국 파리스는 어차피 파멸하게 될 운명이고, 그 파멸은 선택받지 못한 여신들의 보복이 아니라 선택받은 여신이 준 선물에 의한 것이 됨


이는 일리아스를 포함한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환>에서도 볼 수 있는데, 흔히 파리스가 사랑을 얻은 대신 두 여신들에게 미움받아 권력도 명예도 얻지 못했다고 묘사한 만화 등의 매체와 달리 서사시환의 파리스는 트로이 왕자로서의 권력과 아카이아인 영웅들을 저격함으로 얻은 명예를 둘 다 누렸음


오히려 파리스를 죽게 만든 것은 그가 사랑을 택해 헬레네를 데려올 때 버림받은, 그래서 파리스가 필로크테테스의 독화살에 맞았을 때 배신감에 치료를 거부한 오이노네였지




파리스는 트로이 전쟁의 원흉이라고 비난당하지만, 사실은 신들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급물살에 휩쓸린 희생양일 뿐임


제우스조차도 트로이의 멸망을 직접 결정지은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운명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한 것일 뿐인데 한낱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는 법




다음 이야기는 제우스의 계획과 트로이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