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0월에는 통일 독일이 출범했고 같은 달 한국과 중국은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속도를 내고 있었다.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북한 외무성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듯 했다. 급변하는 정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밤을 세우면서 회의를 거듭했다.
이듬해 12월 북한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던 소련이 해체됐다. 그렇지만 사회주의가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남한과의 체제나 이념대결에서 진 것은 더욱 아니라고 믿었다. 소련의 힘을 잃고 급작스럽게 붕괴된 것으로 인한 일시적인 어려움이라고 봤다. 그러나 북한은 고립돼 갔다. 북한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은 중국밖에 없었짐나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 마침내 국교를 열었다. 북한과 북한외교는 사면팔방으로 포위되는 형국이었다. 한중수교가 이뤄졌을때 외무성 성원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이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때 김일성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로마 바티칸 교황청과도 접촉을 모색했다.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때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뉴스를 보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북한에 오게 한다면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기대했다. 김일성은 김영남에게 관련 조치를 지시했고 1991년 외무성 내에 교황을 평양에 초청하기위한 상무조가 편성됐다. 이때 나는 상무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어릴때부터 종교는 나쁘다는 교육을 받았다. 북한 영화 <최학신의 일가> <성황당> 등을 통해 반종교적인 성향을 키워왔다. 북한에 교인이 있을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에 북한의 천주교 신자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교황청이 "북한에 진짜 가톨릭 신자가 있다면 바티칸에 데려와달라"고 요구하자 북한 노동당 가톨릭교협회가 한 할머니를 찾아냈다. 사회안전부(지금의 보안성) 주민등록부를 뒤져 6.25전쟁 전까지 독실했던 신자를 골라낸 것이다.
노동당의 가톨릭교협회 간부들이 할머니를 찾아가 "아직도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수령님과 노동당이 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며 당 간부를 안심시켰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다. 아직도 하느님을 믿는 신자를 찾아 로마 교황청에 보내야할 필요성이 있어서 물어보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을 찾아내면 당과 국가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
할머니는 그때서야 마음을 열고 "한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 간부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 물었고 할머니는 그들을 집 뒷담으로 데려갔다. 뒷담 앞에 꾸려진 예배단의 분위기만으로 이곳이 종교적 장소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당 간부는 할머니가 신자임을 확신하고 "혁명의 이익을 위해 대표단 성원으로 바티칸에 한번 가셔야 되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 일생을 열심히 기도를 드렸더니 이렇게 어린양을 불러주시네요"
당황한 당 간부는 "하느님이 부른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익을 위해 바티칸에 가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주지시켰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하느님이 불러주셨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내가 밤마다 여기서 기도하는 사실은 아들도 모르니 제발 아들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대표단을 따라 바티칸에 간 할머니는 북한에 종교의 자유와 가정예배소가 있음을 증명했다. 교황 앞에서 가톨릭 예법대로 경의도 표했다. 교황청 사람들은 할머니의 눈빛만 보고서도 진짜 신자가 분명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이일을 통해 노동당은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통전부 관계자들이 교황 초청 사업에 열성을 내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교황이 평양에 오면 실제로 북한에 가톨릭 열풍이 일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교황 초청을 위한 상무조는 출범 두달만에 슬며시 해산되었다.
<3층 서기실의 암호>
요약:혹부리우스 우방국들이 수교맻거나 "소련"당하자
바티칸 시국이랑 접촉을 시도하였는데
바티칸에서 되도록이면 신자도 데리고 오리고 권유함.
가까스로 찾았는데 노인 신자가 아직까지도 신앙을
유지하는걸 보고 종교의 무서움을 실감함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찾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