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돌아왔다. 

 

 

 

 

"오늘은 주제가 삼국시대네?" 

 

이번엔 오랜만에 삼국시대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작에 앞서, 사실 본격적으로 하려는 얘기는 나당전쟁이다. 

 

그런데 나당전쟁 이야기를 하려면 삼국통일 이야기가 필수다. 

 

그러려면 최소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중엽에 이르는 시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예 프리퀄을 더 자세히 다뤄보는게 낫겠다 싶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뭐 써봐야 알겠지만, 이것만 해도 분량이 꽤 된다. 

 

심지어 이 글도 요약본이긴 한데,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여기서 말하는 거 이상을 알 필요까지는 없지 싶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일단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6세기 신라 전성기 지도다. 


익숙하지만 여기서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딱히?" 

 

6세기 중엽 즉위한 진흥왕이 신라 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런데 전성기라는 게 무슨 뜻일까? 

 

 

 

 

"제일 잘나갔던 시기죠." 


"어... 근데 통일은 6백 몇 년이니까 7세기인데?" 

 

바로 이 부분이다. 

 

해당 지도는 6세기 후기 지도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나당 동맹 결성 직전의 지도다. 

 

 

 

 

"뭐야 진흥왕 때 그 웅장하던 영토는 다 어디감?" 

 

설명해 무엇하리. 다 잃었다. 

 

오늘 얘기해볼 건 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잠깐 근데 삼국시대.zip 압축풀기라며?  

 

삼국시대가 700년인데 시발 70년으로 날먹하려고?" 

 

나머지 부분은 나중에 또 하면 되지. 

 

그리고 국제 사학계에선 삼국시대를 4세기부터로 정의한다. 

 

 

 

 

"????? 그럼 꼴랑 한 300년 언저리라는 소리?" 

 

일단 '꼴랑'이라기에 300년은 긴 시간이고, 

 

사료가 왜곡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학설로서

 

 

 

 

"국뽕의 패배! 국뽕의 패배! 국뽕의 패배! 국뽕의 패배!" 

 

 

 

 

자, 그런 게 아니라,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국가들이 되게 많다. 

 

 

 

 

"부여, 동예, 옥저, 가야, 마한, 진한, 변한...." 

 

그래 걔들. 걔들 꽤 오래 살아남아 있었다. 가야는 6세기까지도.

 

그런데 왜 굳이 삼국시대일까? 

 

얘네들과 삼국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뭘까? 

 

 

 

 

"글쎄요?" 

 

나머지는 부족연합의 성격을 끝내 벗지 못했지만, 

 

삼국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며 고대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했다. 

 

 

 

 

"고대 중앙 뭐시기 그게 뭔데요?" 

 

쉽게 말해 다른 국가들은 독자적 권한을 지닌 부족의 연합이고 

 

왕은 그냥 부족장 회의의 의장인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 세 나라는 세습되는 강한 왕권과 체계화된 제도를 바탕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 중앙의 법률로써 이를 다스린다는 거다. 

 

 

 

 

"모르겠어" 

 

이것도 어렵니? 

 

 

 

 

 어...

 

 

 

 

그래, 그러니까 부여, 옥저 이런 애들은 동네 조기축구회다. 

 

짬 제일 많은 103동 동식이 아빠가 대충 주장에 대표 달고, 

 

김 과장이 공격수 겸 총무, 최씨는 골키퍼 겸 코치, 뭐 이런식이다. 


조직도 허술하고 주장, 대표라고 뭐 거창한 권한도 별로 없다.

 

 

 

 

반면 FC 고구려, FC 신라 이쪽은 적어도 2군리그 정도는 된다. 

 

감독이 있고, 각 포지션 별 코치에 의료진과 프런트. 

 

선수들도 부여아파트 축구회는 잘하는 사람 11명 뽑아다 

 

적당히 골키퍼 할 사람? 하는 식으로 구성하지만

 

FC 고구려는 주장도 있고, 11명의 포지션이 각기 정해져 있다. 

 

 

 

 

"아하!" 

 

물론 고대 중앙집권 국가는 체계화된 전제군주제는 아니다. 

 

감코진 내분에, 프런트가 SNS에 좆같은 거 올리다가 사과문 쓰고, 

 

선수들은 감독 말 씹고 각만 보이면 슛부터 때려박곤 하지만, 

 

그래도 FC 고구려랑 부여축구회의 전력은 비교불가다. 

 

 

 

 

"체제에서 기인해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는 거군요!" 

 

그래서 마지막 신라가 중앙집권화된 4세기 중엽부터 삼국시대, 

 

그 이전의 시대는 열국(列國)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여러 나라'라는 제목으로 배웠을 것이다. 

 

암튼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샜다. 


본론으로 돌아가, 삼국의 상황을 대강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먼저 문자명왕 사후부터 고구려는 정치 분쟁이 이어지다  

 

평원왕 시기에 이르러 내부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유능한 장군을 통해 백제와 중국의 북주를 물리쳤다. 

 

평원왕 본인보다도 이 장군이 더 유명할 것이다. 

 

 

 

 

"? 연개소문... 은 한참 뒤고... 또 누구 있지?" 

 

 

 

 

온달이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그 온달. 

 

 

 

 

 

"온달이 실존 인물이었어요? 그냥 설화인줄" 


애초에 설화도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는 법이다.  

 

온달은 590년에 한강 수복을 위해 출정하지만, 

 

아단성(아차산성으로 추정) 전투에서 전사한다. 

 

온달의 전사 직전, 평원왕이 사망하고 영양왕이 즉위한다. 

 

 

 

 

"영양왕이라면 수나라를 물리친 왕 맞죠? 을지문덕이랑." 

 

맞다. 하지만 영양왕은 단순히 외세를 막아낸 임금 이상이다. 

 

영양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의 또 다른 칭호는 "大興王"이다. 

 

 

 

 

"대흥왕? 크게 흥했다는 건가요?" 

 

영양왕은 왕권 강화 및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수나라에 서신을 보내며 길잡이를 자청하던 백제의 뚝배기를 깼다. 

 

거기에 사서 편찬을 비롯해 문화적으로도 업적이 화려하다. 

 

 

 

 

"거의 제 2의 전성기, 뭐 그런 개념인 거네요" 

 

사후 영류왕이 즉위하고 중국에선 수가 망하고 당이 등장했다. 

 

영류왕은 당에 화친하고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며 안정을 추구했다. 

 


 

이제 둘째로 백제 얘기를 해보자.

 

백제의 성왕은 진흥왕의 한강 진출 시기 사망했다. 

 

 

 

 

 

"정확히는 신라한테 통수를 맞았죠" 

 

약속을 어기고 한강을 독차지한 신라에 분노한 성왕은 공세에 나섰다. 

 

이때 태자였던 부여창은 관산성을 선봉에 서서 공격하겠다 청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성왕은 이를 수락하였고, 

 

부여창은 애를 먹었지만 일단은 관산성을 함락시킨다. 

 

 

 

 

"엥? 관산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전사한거 아님?" 

 

백제군은 왜군까지 동원해 가며 간신히 관산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직후 관산성에 합류하려던 성왕이 매복에 걸려 사망하며 

 

지휘체계를 잃은 연합군은 신라의 반격에 전멸한다. 

 

 

 

 

"잠깐 잠깐. 합류? 매복? 그냥 가다가 죽은거라고?" 

 

그렇다. 삼국사기엔 야습을 시도하다 역으로 당했다고 했지만, 

 

다른 책도 아니고 같은 책 같은 대목에 기록되어 있기를 

 

성왕의 병력은 기병과 보병을 합쳐 고작 50명이었다고 한다. 

 

 

 

 

"50으로 무슨 기습을 해? 말도 안되는 소리네요." 

 

이 숫자는 호위병이라 보는 것이 맞다. 

 

함락 소식에 성왕이 연합군을 직접 지휘하고자 향하던 길에

 

그 정보를 알아낸 신라가 매복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사후엔 관산성 전투를 기획한 태자 부여창이 즉위했다. 

 

패전에 책임을 지고자 동생에게 양위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삼년상을 꼬박 채우고야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즉위한 위덕왕은 당연히 이를 갈았다.

 

 

 


"하지만 신라가 그렇게 만만하진 않았겠죠" 

 

거듭된 공세로도 좀처럼 진전이 없던 중 수나라가 등장하자

 

길잡이까지 자청하며 통일 중국을 이용해 고구려를 꺾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양왕이 백제를 공격했고,  

 

신난 신라는 고구려에 뱃길을 터주고 지원군까지 보낸다. 

 

역으로 박살이 나는 와중에 598년 위덕왕이 병사했다. 

 

뒤를 이은 혜왕은 위덕왕이 양위하고자 했던 동생이다. 

 

 

 

 

"동생이면 나이가 꽤 될텐데?" 

 

우려대로 1년도 못가 죽고, 그 아들인 법왕마저 요절하며 

 

1년 반 동안 왕이 세 번 바뀌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걸 안망했다고?" 

 

뒤를 이은 백제 무왕 부여장의 현명한 치세 덕분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이 바로 무왕이다. 

 

재위 초기 고구려와 신라의 공세를 물리치고, 

 

치세 후반기엔 주변국들과 중립외교를 하며 국력을 길렀다. 



 

신라가 오히려 말할 것이 적은데, 진평왕 1명뿐이기 때문이다. 

 

진지왕이 3년만에 폐위되고, 53년에 걸친 진평왕 치세가 열렸다. 

 

참고로 이 사람은 웅장한 -지의 크기로 유명하다. 

 

 

 

 

"?" 

 

암튼 이 사람의 경우 나름 업적도 많고 무능하진 않다. 

 

하지만 주변국의 지속적인 공세와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진흥왕 시기의 영토를 상당 부분 잃었고, 


거기에 진평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라,

 

말년에는 정치 혼란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용하게 무너지는 중이었네요" 

 

그래도 잡음 끝에 공주였던 덕만이 즉위하고,


덕만, 즉 선덕여왕은 이내 혼란을 수습하였다.



 

한편, 중립외교를 펼치던 백제 무왕이 641년 사망했다. 

 

 

 

 

뒤를 이은 것은 패기 넘치고 호전적인 젊은 의자왕이다. 

 

우연히도, 바로 다음해 마찬가지로 말년에 평화정책을 펴던 

 

고구려의 영류왕이 살해되고 보장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왕은 꼭두각시일 뿐, 실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 

 

 

 

 

사실상 섭정인 대막리지 겸 재상인 태대대로, 연개소문이다. 

 

 

 

 

 

그와 동시에 중국에서는 훌륭한 정치를 펼치던 당 태종이 

  

640년 위구르 지역의 고창국을 격파해 서역을 완전히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동방의 이민족에게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20여년 간의 소강상태는 끝나고 

 

동아시아는 30년을 넘게 이어질 전쟁의 시대를 목전에 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다음번엔 나당전쟁을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