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184년 7월 26일...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자공 하인리히가 영국으로 추방되었고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황제를 견제하던 강한 제후가 사라지자, 마인츠 대주교와 튀링겐 백작(Landgrave)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인츠 대주교가 튀링겐을 염려해 성을 쌓기 시작하고 갈등이 커지자 황제는 곧 폴란드를 쳐야 하는데 이 둘이서 후방을 어지럽히면 안되었기에 이들을 화해시킬 겸에서 폴란드 코앞에 있던 에르푸르트에 있던 피터스베르크 성에서 화해를 위한 회담을 열고자 했다. 물론 회담 개최는 본인이 아니라 황태자였던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황태자 하인리히 (후일 하인리히 6세)


피터스베르크 성


성 베드로 대성당


하인리히 황태자는 아무래도 화해 주선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장소를 숭고한 교회로 정하길 원했고, 결국 그렇게 해서 정해신 곳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Peterskirche)'이었다. 회의에는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황태자의 시종들과, 호위군, 마인츠와 튀링겐의 사신들과 인원들까지. 그리고 으레 회담은 연회와 같이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피터스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던 것이다.









당시 성당 바닥에는 들보가 많았는데, 특히 회의가 열리는 2층의 경우 건물 자체가 너무 노후한데다 관리가 안 되어 있는지 바닥 여기저기가 속에서 썩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공식적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약 100여명의 사람들이 성당 바닥에 섰을 때, 마침내 일이 터졌다. 낡고 썩은 성당 바닥이 바로 쩍쩍 갈라지면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공교롭게도 아래에는 성에 설치된 화장실 건물(garderobe)이 있었는데, 이 건물까지도 부식으로 망가졌는지 사람들이 떨어지자마자 같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사람들 중 상당수가 2층 높이에서 지하에 있던 거대한 정화조에 빠져버렸다.






회의를 주최한 황태자는 다행히도 단단한 돌 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빠지진 않았으나 대략 60여명의 인원이 무너지는 바닥으로 인해 똥물에 빠져 그대로 똥독이 올라 익사했다. 






전원 사망



참고로 회의의 네임드였던 마인츠 주교와 튀링겐 백작은 무사했다는 후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