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국립 현충원 

한국전 베트남전등 전사자들의 유해가 모셔저 있는 곳이다 





그중 한국전쟁 전사자 묘역에서 

눈에 띄는 비석이 보이는데..




똑같이 1953년 7월 27일 전사했다고 쓰여있는 3기의 비석 






1953년 7월 27일




그날은 한국전쟁이 끝난 정확히 말하면 정전된 날이다. 



이날 전사한 전사자는 이 세명이 유일해






육군일병 이상열, 육군일병 이상준, 육군일병 윤석봉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사자








한국전쟁 전몰자 묘역에 나란히 묻혀있는 이 세사람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2010년 방송된 다큐 공감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했고 다시보기 캡처해서 화질 구린점 이해바람) 







먼저 이상열 일병의 유가족을 수소문 했는데



동생 이상학씨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 살고 있었다. 


이상열 일병은 7남매중 차남이였고 

1953년 1월 징집됐으며 당시 나이는 28살이였다고 해 

늦은 나이지.. 


그리고 당시 이상열 일병은 결혼한지 7개월된 

신혼이였는데 영장을 받고 군대로 떠났어.






남편이 떠난뒤 새댁은 매일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했으나 

편지한통 오지 않았다고해






그리고 애절한 기다림끝에 6개월만의 첫 소식은 

전사통지서였어. 


부인은 한동안 빈집에서 혼자 머무르다 버티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고 함.








그날의 또다른 전사자 이상준 일병








그의 고향 경남 남해엔 할아버지가 된 다섯째 동생 이상천 씨가 살고 있었다. 


이상준 일병은 8남매중 장남이였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머슴일을 하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렸다고 해 



동생 이상천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먼저 군대에 갔는데 

2년만에 부상 당해 돌아와 보니 큰형 이상준씨도 징집되어 

집을 떠난 상태였어







이상준 일병은 이미 7년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집되어 


군대갔다가 3년만에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었지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후 초반엔 나이가 많아 징집되지 않다가 

어린 동생들이 먼저 군에 징집되고 


52년 국군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확충하자 

28살의 늦은 나이에 영장이 날라와 

다시 한국군에 징집되어 갔다





징집될 당시 이상준 일병도 결혼한지 1년밖에 안됐을 무렵이였는데 마침 새로 신혼집을 

지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에서 몆개월 살아보지도 못하고 군대로 떠나게 되지.






6개월 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남은 형수는 더 머물지 못하고 

그 집을 떠났다고 함







이상열 일병의 부인 김명녀씨는 60년도 더 지난 지금 

얼마 멀지 않은곳에서 살고 있었어










군으로 떠나던날 이상준 일병에겐 두살된 딸이 있었고 

아내는 만삭의 상황이였지.







남편이 떠나고 사흘뒤 부인 김명녀씨는 혼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얼마뒤 매섭게 추운날 어린딸과 갓난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해.








김명녀씨는 이젠 무뎌졌을법도 한데 60년전 새댁이였던 그날처럼

떠나던 남편과 죽은 두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더라..








1953년 1월 이상준 이상열씨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됐다고 한다.




51년 9월엔 만 25세까지 징집대상이였는데 

52년 9월에 이르면 만 39세 미만으로 징집 연령이 높어져서 

28살이였던 이상열씨나 이상준씨도 징집될수 밖에 없었지



이렇게 징집연령이 높이진 이유는 전선에서 병력의 극심한 소모도 있었지만 

미국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루기 위해  한국군 10개 사단을 증설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야 




실제 1952년 10월에서 12월동안 한국군 2개 군단 7개 사단이 

새로창설됐다. 


이 시기에 징집된 이상열, 이상준씨 같은 장정들은 

논산이 아닌 제주도의 제 1 육군 훈련소로 입소해



1952년 제주도 제 1 육군 훈련소 정문





훈련소 연병장에 모인 훈련병들.. 말이 훈련소지 그냥 허허 벌판이네....





1952년 7월 제주도 제 1 육군훈련소를 방문해 사격훈련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 제주 육군 재 1 훈련소의 훈련기간은 2주에서 3주였다고 하는데 

전방상황에 따라 병력이 부족할시 1주만에도 자대배치 됐다고 해. 








훈련소 수료후 이상열 이상준일병은 자대로 배치되게 되는데 

보병 8사단으로 배치되게 된다


두명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제주도 육군훈련소를 마치고 같은 8사단으로 

배치받은 참전용사 할아버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수송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서있는 순서대로 자대 배치하고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이동, 춘천에서부터는 군용 트럭을 타고 전방 

고지로 바로 투입됐다고 함











고지의 주인이 자주 바뀌어 전사한 아군이나 적군 시체를 후방으로 이송하지 않고 그냥 교통호 주변에 

대충 쌓아놓았었다고 해. 



이렇게 이상준 이상열 신병은 짧은 기초군사훈련만 마치고 바로 최전방 고지로 

투입됐어.







1953년 7월 27일 세번째 전사자 윤석봉 일병 


그의 고향은 남해군 이동면 신곡리 이상준 일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였다 


지금은 형제들은 다 죽고 부인인 할머니들만 살고 계셨지





징집 당시의 나이는 25세 아직도 할머니는 시아주버님 윤석봉 일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석봉 일병 유골 발견당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는데...









발굴당시 처음엔 같은 남해 사람이 나오고 두번째는 

윤석봉일병 그 밑에선 충청도 사람이 

나왔다고 한다. 


충청도 사람이면 이상열 일병 남해사람이면 

이상준 일병의 고향이야







그래서 당시 병적기록부를 조사해 보니 세사람은 1953년 1월 16일 같은날에 입대 

8사단 16연대 1대대 1중대 같은 중대 소속이였고 



사망한 날짜도 같았어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는 1986년 작성된 매화장 보고서를 찾아보니







이상준 일병은 1953년 7월 27일 적 포탄에 의해 전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발견지는 강원 김화 원동 등대리 

작성된 나머지 두 사람의 보고서에서도 


유골 발견지는 같았어 







좀더 자세한 내막을 알기위해 당시 매화장 보고서를  기록한 군수담당관을 

찾아갔다.


홍중표  당시 8사단 군수담당관





1986년 세사람의 유해가 같이 발굴되 육군본부에서 조회해

소속부대인 8사단으로 유골이 왔다고함.

유류품들과 함께









세 사람이 같은 참호에 있다가 같이 전사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이상열, 이상준, 윤석봉 일병은 같은날 입대해 같은날 배치받은 동기였고 

한 참호를 나눠쓰는 전우 였었다.






이상준 일병들과 비슷하게 한곳에서 발굴된 실제 한국전쟁 전사자 사진.. 

클립에 꽃힌 M1 소총탄들도 보인다.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 위해 훗날 작성된 8사단 전사를 조사해 보면


휴전일인 7월 27일날 다수의 적군과 교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저 전사엔 북한군이라고 되어 있지만 미군의 기록이나 중공군의 기록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고지전때의 주적은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 였다고  한다


요 영화와는 다르게 말이지.. 솔직히 저 영화는 그점 말고도 오류투성이인 고지전 참전용사들도

인정하는 개 쓰레기 판타지물임.








북한군은 52년 초반이후로 거의 조직이 와해되고 중공군의 보조전력으로 전략했다고 해

사진은 1953년 7월초 금오지구 점령을 위해 바닥에 모의고지를 만들어놓고

전술 토의하는 중공군의 모습



금오지구는 세사람이 복무했던 8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등대리 근처야

사실상 이상준 이상열 윤석봉 일병이 교전했던 적은

중공군이였어.






고지전투중 가장 유명했던 백마고지 참전자들 증언을 들어봐도 입대이후

북한군은 한번도 본적이 없고 중공군하고만 

싸우다 종전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중공군이 기록한 "항미원조전쟁사"를 보면 53년 7월 17일부터 27일 

정전 날 때까지 중공군은 금성 이남(세사람이 주둔했던)에서 미군, 한국군과

1000여차례의 교전을 했다고 나온다






한국전쟁 사망자 400만명중 51년 1.4 후퇴때까지는 100만명 

51년 6월 정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현재 휴전선

근방으로 고착되고 고지전이 펼처지기 시작하면서

26개월동안 300만명이 전사한다.


그만큼 고지전은 처절했다고 해.







당시 세사람이 복무했던 8사단 16연대에서 같이 복무한 김달육 참전용사의 증언 

27일까지 이상준, 이상열, 윤석봉 일병이 어떤 교전을 겪었는가

알수 있었어.









정전일 즈음에는 고지 쟁탈전보다는 서로 포격전을 했다고 한다.

상호간에 몆만발에 이르는 포탄을을 퍼우었다고 함.






27일 정전일에 돌아가신 분들 시체는 그냥 버리고 온거냐는 질문












곧 정전발표가 있을꺼라는걸 몰랐었냐는 질문에



당시 27일 정전선언이 있을꺼라는건 전혀 몰랐고 상부에서도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병사들에게 알려주면 끝까지 한평이라도 더 점령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니

정전발표 방송이 나올때까지 전혀몰랐고 선언이 있던 오전 10시 직전까지 

서로 총을 쏴댔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이른아침, 

판문점에선 정전발표 준비가 한창이던때








이상준 이상열 윤석봉 일병이 주둔하던 등대리에서는 여느날 처럼 교전이 한창이였고....






세명이 사수하던 참호엔 포탄이 날아와 터진다.












그리고 불과 몆시간 뒤인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그날 오후 등대리에서는 총성이 멈추고 

협약에 따라 합의선 이남으로 부대는 철수해. 


호속에 파뭍혀 있는 이상준, 이상열, 윤석봉 일병을 남겨두고,.. 


그리고 1986년 발굴되어 대전 국립현충원 한국전쟁 전사자 묘역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음... 




정전협정이 몆시간 아니 몆십분만 빨리 발표됐더라면 세 사람은 살아남아 

틀딱소리 들으며 정게에서 놀고 계셨을지도 모르지 ㅋ 


그리고 세사람은 발굴되어 한국전쟁 마지막 전사자로 현충원에 안치되어 있지만 

8사단 참전용사 할아버지 말대로 27일날 고기조각이 되서 산화한 분들은 

이름없는 실종자로 남아있는 현실이 안타갑다...




요약


1.순국선열분님들 감사합니다..

2.그리고 참호 파면 개인참호 파고 절대로 한 참호에 2명 이상 기어 쳐들어가지 마라. 상식이다.

포탄 떨어지면 둘 다 뒈지기 때문이지.


한 참호 안에 주요보직 두 명 이상 들어가 있으면 좃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