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지만 동시에 미국에 엄청난 부를 안겨준 1차대전이 막 끝나갈 무렵인 1918년의 미국.

켄터키주에 속해있는 작은 소도시, 에크론(ekron)에서 백인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헤롤드 헨리 리즈',  '피 위 리즈'*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왜소한 아이였다.

(그리고 이 별명은 훗날 그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때에 그대로 정식 등록명으로 박히게 된다.)







허나 리즈가 전도유망한 선수는 아니였다.

오히려 그는 절망적인 전망을 보이던 그저그런 선수 중 하나였다.

162cm에 54kg이라는, 야구선수로서는 물론, 일반인으로서도 왜소한 체형을 보유한 탓일까.

그는 고교시절 3년내내 단 6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하는, 소위 '물주전자 당번'으로서 쓸쓸하게 졸업하고만다.

어떠한 프로팀들도 리즈를 원하지도, 아니, 리즈라는 선수가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하게도 고교졸업 후에 어떤 팀에게도 연락을 받지못한 리즈.

그렇게 그는 루이빌의 한 통신회사의 배전공으로 취직하며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사랑했던 야구를 취미로만 남겨둔 채,   'church league' 라는 사회인야구 경기에만 출장하면서.


(루이빌 시절의 리즈)


허나 기연은 언제나, 어떻게든 그 주인을 찾는다고 했던가? 

리즈가 뛰던 야구팀은 사회인 야구리그에서 우승, 부상으로 당시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의 마이너팀인 '루이빌 커넬스' 와 경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리즈는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커넬스의 구단주에게 눈도장을 새긴다.


이 경기에서 크게 감명받은 구단주가 직접 리즈를 찾아와 계약을 제안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퍼포먼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록은 내려져오지 않지만 대충 짐작은 가리라.


그리고 구단주는 리즈에게 200달러의 계약금을 제안(현재가치 약 500만원정도), 이에 리즈는 마이너리거로서 야구선수의 꿈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거가 된 리즈는 고교시절의 울분을 푸는 듯  마이너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그의 팀동료들이 그를 '리틀 커넬' 이라는, 농담반 칭찬 반인 별명으로 불렀겠는가?


당시 루이빌 커넬스의 메이저리그 팀이었던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탑 유망주로서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렇게 커넬스의 최고 유망주중 한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리즈, 허나 그런 그에게 다시한번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


(보스턴의 레전드 조 크로닌, 리즈완 달리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소속팀 커넬스가 매각되어 피츠버그가 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로 들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스턴 구단의 수뇌부는 레전드 유격수 '조 크로닌'을 보내 리즈를 관찰 하게끔 한다.

이는 같은 유격수이자 구단의 베테랑인 크로닌이 직접 그를 대체할 후임자를 평가하게 함이였다.

그리고 그는 별 생각없이 리즈를 스카웃 하러가게 되는데..

그는 충격에 빠진다, 리즈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고 곧 "아 내가 스스로 내 자리 차지할 놈 스카웃 하러 온 거구나" 라고 깨닫게 된 것.


이에 분노한 크로닌은 리즈의 재능을 고의적으로 폄하하는 리포트를 제출, 이듬해 리즈가 4명의 선수와 함께 LA 다저스(당시에는 브루클린 다저스) 투수 한명을 댓가로 트레이드 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이 트레이드는 아직도 mlb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트레이드로 기록되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빅-똥을 싸지른 크로닌은 이듬해 마지막 불꽃을 터트리곤 에이징커브를 직격탄으로 맞은 뒤 하향세를 걷다가 4년동안 풀타임도 소화 못하는 후보선수로 전락, 그저그런 시즌들을 보낸 뒤 은퇴하며 빤스런을 친다.


그렇게 어찌어찌 고생길을 걸으며 메이저리거가 된 리즈.

1940년 데뷔시즌엔 발꿈치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2할 7푼의 타율에 3할 6푼이라는 출루율로 가능성을 보이더니 다음시즌인 1941년에는 확고한 주전으로 성장하게된다.

하지만 또, 또 다시한번 불운은 리즈를 찾아온다.


바로 퓌러 히틀러의 흥겨운 춤사위가 유럽을 휩쓸고 엉클 히데키의 침략야욕이 태평양을 덮친 그 전쟁.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 것.

거의 모든 신체건장한 미국남성들이 징병되어 참전했으며, 리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즈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니폼 대신, 해군의 세일러복을 입게 되었다.


(해군복무시절의 리즈)


그렇게 1943~1945년을 군머에서 보낸 리즈 그리고 이 시기에 메이저리그는 한번의 대격변의 서막을 맞게된다.

바로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이자 훗날 "미국을 바꿨다" 라고 평가받는  재키 로빈슨이 그의 소속팀으로 오게 된 것.

무려 흑인이 본인의 팀으로, 그것도 같은 포지션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리즈가 동료에게 물어본건 단 두가지였다.


"그가 나와 포지션이 겹치는가? 니그로 리그에서의 성적은 어떠하였는가?"



리즈는 그가 피부가 검은지, 아님 프라이드 치킨을 뜯으며 수박에 열광하는 '니그로' 인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던 것 이다.


이것만해도 당시 백인이 보여줄 수 있는 사고로선 가히 파문적인 것이지만, 리즈는 거기서 멈추지않았다.

리즈가 전역하고 팀에 복귀하자 팀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적지 않은 수의 선수들이 "흑인을 세우겠다면, 우리 트레이드 하고 나서 해라" 라며 서명운동을 주도 한 것.

그리고 이들은 루이빌 (당시 루이빌은 인종차별이 극심하였다) 출신이자 팀의 스타인 리즈가 그들과 뜻을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리즈는 단칼에  거절하며 서명운동을 거절한다.

그리고 재키가 당신의 포지션을 뺐지 않을까 두렵진 않냐며 물어보는 기자에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기에 이른다.


"그가 나를 대체한다면, 그건 충분히 자격이 있는겁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재키는 타격에 집중하기위해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한다.

그렇게 재키 로빈슨은 리즈와 구단주인 리키의 지지를 받으며 메이저리거로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데...


(미국의 인종인식 개변의 신호탄을 알린 장소, 크로슬리 필드)



그러나, 재키의 첫 원정인 크로슬리 필드에서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만다.

"깜둥이"가 필드에서 백인선수들과 같이 경기하는것을 볼 수 없었던 신시내티의 팬들은 경기전 몸을푸는 재키에게

"nigro" 라며 연신 재키를 모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재키가 멘탈이 흔들리며 불안에 떨기 시작하자 리즈는 미국 야구계, 아니 미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해당 장면을 묘사한 재키로빈슨의 전기영화 42 中)


바로 두려움에 떠는 재키에게 다가와서는 어깨에 손을 두르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야유에 정면으로 대항한 것.

그러자 신기하게도 금새 야유는 멎어 들었고, 재키는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 리즈는 농담으로 "어쩌면 내일은 우리모두 42번(재키의 등번호)을 입을까봐, 최소한 우리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가 누군지 모를테니 말일세"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현재 모든 mlb 선수들이 42번 저지를 입는 기념일, '재키 로빈슨 데이' 의 시초가 되었다. 




후일 이 일은 미국 전역에 신문으로, 또 라디오로 중계되며 큰 파장을 낳았다.

하물며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유명한 켄터키 주 루이빌 출신인 리즈가 벌인 행동이었기에, 더욱이 미국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때문에 리즈는 은퇴후 루이빌로 돌아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죽을때까지,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하는 사진을 집 거실 한켠에다 잘 보이는 위치에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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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STOP & CAPTAIN OF BROOKLYN DODGERS 1940 - 1957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격수이자 주장 1940-1957


U.S. NAVY 1943 - 1945

미합중국 해군   1943 - 1945 


ANNOUNCED TV GAME OF THE WEEK 1960 - 1971

 이 주의 TV 중계 경기(해설자) 1960 - 1971
 

 ELECTED BASEBALL HALL OF FAME 1984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 1984


 HIS LEADERSHIP HELPED WIN 7 DODGERS PENNANTS 

그의 리더쉽은 다저스를 7번의 패넌트 우승으로 이끌었고


 HE EASED THE ACCEPTANCE OF BASEBALL'S FIRST BLACK PLAYER INTO THE MAJOR LEAGUE.

그는 메이저리그 첫 흑인선수를 받아들이는데 동의한 사람이었다.


 HE WAS A LOVED AND GENTLEMAN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온화한 사람 


 HAROLD "Pee Wee"


해롤드 '피 위"


JULY 23.1918
AUG 14. 1999
 

You can hate a man for many reasons. Color is not one of them.

사람을 미워하는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피부색 따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피 위 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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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써서 용두사미로 끝났지만 첫 정보글이니 재밌게 봐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