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주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행하던 증류 기술이 원나라 지배하에 놓인 비단길을 통해 고려로 전파되면서 텁텁한 탁주를 주로 마시던 고려에서도 증류식 소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 설렁탕 & 곰탕     ※ 일설 중 하나임





어원 자체는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조선의 몽골어 사전이었던 몽어유해(蒙語類解)에는 몽골어 '슐루'는 「몽골에서 먹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공탕(空湯)을 의미한다」 고 되어 있다. (즉 슐루와 공탕이 각각 설렁탕과 곰탕의 어원이라는 얘기) 


아무튼간에 고기를 즐겨먹는 유목민족 출신 국가가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 위주을 하는 농경국가 고려를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그나마 밋밋한 밥상에 뜨끈한 고깃국을 올려놓게 만들어줌.






3. 타락죽(우유죽)



곱게 간 쌀가루에 우유를 부어 끓인 죽. 어원도 몽골인들이 말젖이나 양젖으로 해먹던 '토라크(말린 우유)'에서 따왔으며 한반도에서는 많지 않은 양과 말보다는 농사에 자주 쓰이는 소의 젖으로 만들었으나 귀한 재료라 임금이라도 맘껏 먹을 수 없었다. 어찌보면 유제품이 일반 식탁에 들어온 계기가 된 식품이라고 볼 수 있다.






4. 수유(酥油)



용어가 안 들어본거라 그렇지, 오늘날로 치면 소젖이나 양젖으로 만든 버터다. 이 수유는 고려가 처음부터 즐겨먹은 건 아니고, 원나라가 고려에 소나 말, 양을 키우게 하고 꼬박꼬박 공물로 받아낸 물품 중 하나다. 당시에는 이 기름덩어리가 보약으로 인식되었는지 왕이 병이 있을 때 먹기도 했고, 혹은 병이 나거나 연로한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참고로 수유 만드는 장인들은 '무조건 군면제'의 혜택이 있었다. 왜냐하면 만드는 기술이 너무 까다로웠기 때문에 해당 인원이 사망할 경우 실전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






5. 몽골식 호모(胡帽), 비갑(比甲)




이건 사실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 더 가까운 부분이긴 한데, 중국인들의 전통 복장인 '한푸', 그 중 여성 한푸의 구성 중 하나인 '비자(비갑)'의 유래는 사실  몽골이다. 그리고 이걸 발명한 게 바로 원 세조인 '쿠빌라이'의 아내이자 원나라의 황후였던 '차브이'다.



又製一衣,前有裳無衽,後長倍於前,亦無領袖,綴以兩襻,名曰比甲,以便弓馬,時皆倣之。

또 옷을 한 벌 지었는데, 앞은 치마처럼 되어 있으나 섶이 없고, 뒤는 앞보다 길며 소매가 없고, 두 개의 옷끈으로 잠그니 비갑이라 불렀는데 말타고 활쏘기에 유용해서 당시에 모두가 따라 입었다. - 원사 114권 후비 1편


즉 중국이 자랑스러워 하는 한푸 중 일부는 몽골의 창조물인 셈.








차브이 황후의 발명은 그것 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 몽골식 모자(호모)를 발명했다고도 전해진다. 정확히는 모자의 챙을 덧댄 게 바로 차브이였다는 얘기.



胡帽舊無前簷,帝因射日色炫目,以語后,后即益前簷。帝大喜,遂命為式。

호모에는 옛부터 앞에 처마(챙)가 없었고 황제는 이로 인해 쏟아지는 햇빛으로 눈이 시리다고 황후에게 말하니, 황후는 곧바로 처마를 붙였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널리 제도로 정했다.  - 원사 114권 후비 1편






6. 철릭



조선시대 사극에 보면 흔히 나오는 빨간 무관복인데, 이 역시 몽골에서 고려로 들어오면서 유행했는데 복장 자체가 동작하는데 편하다보니 이래저래 많이들 입고 다녔다.   






7. 수라



다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수라(水刺)라는 말 자체가 몽골어로 음식이라는 뜻의 '슐라' 에서 나왔다. 수라상, 수랏간 등도 당연히 거기에 관련이 있다.






8. 족두리           ※ 일설 중 하나임 



조선 여인들은 화려한 사치품에 해당한 가체(가발머리)를 썼지만 그것이 부담이 되고 금지령까지 떨어지자 다시 사용하기 시작한 패션 아이템이 바로 족두리였다.




몽골의 귀부인들은 '복타크' 라 불리는 굉장히 길면서 화려한 모자를 썼는데, 이 모자가 전래되면서 한반도인에게는 의미없는 높은 길이(몽골에서는 이 높은 부분이 몽골 설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산을 상징)가 사라지고 작고 귀여운 형태가 된것으로 보인다.


이 복타크를 낙타털(족도르)로 만들 경우, 이름이 '족타이'로 바뀌는데 족두리라는 말 역시 여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9. 곤지






 붉은 점을 뺨에 찍어서 악귀를 몰아낸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원래 고구려의 벽화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풍습 중 하나이나, 중간에 한번 실전되었다가 원나라 시기에 한반도로 재유입 되었다. 오늘날에도 전통 혼례식에서 볼 수 있는데 몽골 사람들도 신기하다면서 사진 찍는다고 한다.






10. 보라색




다른 거 없다. '보라색'이라는 말 자체가 순우리말이 아니라 '귀화어' 이다. 사냥을 좋아하던 몽골인들은 고려에서 바치는 사냥용 매, 이른바 해동청(海東靑)에 열광했다. 이 매의 가슴쪽 털을 뽑을 경우 '짙은 갈색'을 띄는데 갈색을 의미하는 몽골어 '보르' 가 그대로 남아서 '보라'라는 말로 바뀐 것이다. 






11. 휴지





이건 좀 의외이긴 한데, 휘인유성황후, 즉 쿠빌라이의 첫 아들이었던 '칭킴'의 아내 '코코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侍昭睿順聖皇后,不離左右,至溷廁所用紙,亦以面擦,令柔軟以進。

순성황후(차브이)를 모시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변소에서 종이를 쓸 때에도 표면을 비벼 부드럽게 한 다음 올렸다.

-  원사 116권 후비 2편 



이전 송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글과 글을 쓸 수 있는 종이에 대한 이미지가 높았기 때문에 그걸로 응꼬를 닦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뒤를 닦을 때는 측주(厠籌)라고 불리는 좀 작은 대나무로 쓱쓱 닦아냈다. 그리고 그 측주는 물에 씻은 뒤 잘 말려서 다시 썼다고 한다. 즉, 종이로 똥 묻은 응꼬를 닦아낸다는 발상을 한 건 본의 아니게도 몽골인이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