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진주성 진투






조선군 7000~8000명이 일본군 9만을 상대로 약 8일간의 공성전 끝에 성이 함락되어 전원이 전사한 임진왜란 최대의 공성전.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해석 -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선조 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 기사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곽재우의 답변



당시 조선 정부도 진주성 근처에 있던 장수들도 이 싸움은 절대 못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조선 정부에서 진주성을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장수들중 홍의 장군 곽재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곤양군수 이광악, 전라병사 선거이, 영천군수 홍계남 등도 차라리 자살했으면 했지 저기는 못들어 간다며 성의 구원을 포기했으나 몇몇 의병장과 장수들은 끝까지 진주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려 하였다.



[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 어찌 왜적에게 함부로 성을 넘길수 있는가?]

- 전라도 창의사 김천일



[전라도는 아직 왜적이 침입하지 아니하여 곡식과 사람이 온존하니 필히 지켜야 하는 땅이다., 이대로 성을 넘긴다면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할지 누가 알겠는가?]

-경상우병사 최경의



[주위에서 부친과 형제가 모두 죽어 집안의 대사가 끊김을 염려하여 그(고종후)를 말렸으나 그(고종후)가 답하였다. "死(죽을 사)!"]

-복수의병장 고종후



[당초에 황진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 충청병사 황진




이렇게 성에 들어간 이들은 하나같이 이싸움에서 이기기 힘들고 십중팔구 죽을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끝까지 성에 들어가 일본군과의 싸움을 준비하였다. 


이들이 끝까지 성에 들어간것은 보통 두가지 이유로 보고있는데 첫번째는 진주성이 호남과 경상도를 연결하는 길목이자 중요한 요충지 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진주성을 함락시킨 이후 일본군은 정유재란때 남원성과 전주성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전라도를 초토화 시켰다. 비록 일본군은 성만 함락시키겠다고 하였으나 조선군 입장에서는 정말 일본군이 약속대로 성만 함락시키고 끝낼지 내친김에 전라도도 박살낼지 알 방법이 없었다.


두번째는 진주성으로 모여드는 백성들 때문이었다. 당시 진주성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영향으로 왜적들을 막아내는 성이라는 소문이 퍼져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이 모여 당시 성안에 모인 피난민이 3만(일본측 기록)에서 6만(조선측 기록)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기 사흘전까지 계속 피난민이 모여드는 통에 관군 입장에서는 도저히 성을 비울 시간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백성과 성을 지키기 위해 다죽을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성에 남았고 9일간의 혈투끝에 모두 전사하며 그 이름을 떨쳤다. 후세에는 어차피 일본군은 진주성만 함락시키고 물러날것을 괜히 싸우다 죽은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과연 그들이 그때 일본군이 성만 함락시킬지,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둘지 그들이 알수 있을 방법이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비판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사진출저: 나무위키 제 2차 진주성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