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대한민국 해병대가 대한민국  공군비행장 습격!!


1966년 8월 8일 월요일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들이 새벽에 대한민국 공군의 舊 공군비행학교를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당했던 실제 사건이다. 군대에서 카더라 풍문으로 나도는 근거없는 허구썰들이나 괴담들과는 달리 기록이 있는 역사적 사실이며 해병대측에서 사망자까지 나왔던 큰 사건이었다.


해병대 전역자 사실 왜곡


--개병대전역자 스스로 밝힌 아래 글--


본인 35기 소위들이 김해공군기지 습격사건 진상에 대해 공개한다

66년 8월 8일에 발생했던 이른바 해병학교 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진상을 공개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즉 주말인 8월 6일 부산에서 외박을 한 전도봉(全道奉) 소위를 비롯한 7명의 해병학교(35기) 기초반 소위들이 승차한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가 구포다리 건너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승객이 많아 버스의 앞문으로 승차하기가 어렵게 된 빨간 마후라를 두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이 주먹으로 버스의 후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는데, 그 때 그 후문쪽 좌석에 윗저고리를 벗은채 앉아 있던 35기 소위 하나가 앞문으로 타 하고 소리치자 공군소위들 중의 하나가 이 새끼들…하며 앞문으로 갔고, 또 차안에서 누군가가 저 새끼가…하며 뒷문을 열어 제치고 뛰쳐 나간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은 윗저고리를 벗고 앉아 있던 7인의 해병소위들에 의해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솜씨를 발휘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황우'라는 두목을 굴복시켜 부산바닥의 주먹계를 평정한 패기만만한 투사들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공군소위들을 길바닥에 뉘여 놓고 버스에 올라타고 졸면서 가고 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한참을 달리고 있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버스를 앞뒤에서 가로막은 2대의 공군 닷지차에서 뛰어 내린 수 십 명의 공군장교들이 손에 든 몽둥이로 소위들이 앉아 있는 뒤쪽 창문을 박살을 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35기 소위 2명은 머리를 다쳤고, 승객들 중 진해여고 학생 1명과 해군소위 1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해병소위들은 운전기사로 하여금 군용트럭 옆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게 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공군장교들도 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않았다.

한편 귀교후 머리에 중상을 입은 1명의 동료장교를 진해병원으로 실어 보낸 35기 기초반 장교학생회에서는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중대장학생 김도삼 소위와 부중대장학생 김무일 소위, 군기부장 전도봉 소위 등 3인의 간부와 각 근무자들과 소대장 등 13인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자존심에관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행동계획으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하되 일절 무장은 하지 않고 복장은 정모와 카키 근무복을 착용키로 결정했다.

즉 전체인원 142명 중 입원환자와 당직자 등 13명을 제외한 129명이 8일(월)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은밀히 철조망을 타넘고 경화역에 집결, 04시에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하여진영역에서 하차, 역전 도로변에서 3개 제대로 나누어 시계나 돈을 주고 화물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공군기지 정문 앞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결국 화물트럭을 타고 6시 10분 전에 공군기지 정문앞에 도착했던 1.2제대는 서둘러 제대별로 대오를 정비하여 정문으로 진입을 했으나 낌새를 챈 2명의 공군 헌병이 당직실 보고 운운하며 제지를 하는 바람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던 한 장교가 이 새끼 말이 많아하며 아구창을 일격을 가한 다음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그들을 앞세우고비행학교 조종반중대의 막사가 있는 곳까지 기상나팔 소리를 들어가며 질서정연하게 구보를 해 갔다.

그리하여 6시에 기상하여 막사 안팎에서 내무정돈과 세수를 하고 있는약 50명의 조종반 장교들을 닥치는 대로 주먹과 내무실에 있는 운동기구 등으로 가격하여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그 현장에 버스를 타고 왔던 약 40명의 3제대 장교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갑자기 터진 연막탄을 신호로 전 기지의 장사병은 즉시 상의를 벗고 중앙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사방에서 들리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기초반장교들은 몇몇 간부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즉시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학교본부로가서 정열을 했다.

그런 다음 당직실로 들어간 간부장교들이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에게 양측 학교장에게 사태 수습을 건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자 이양호 대위는 학교장이 7시에 출근하니 그 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기에 기초반 장교들은 당직실밖에 정열하여 왼쪽 손을 왼쪽 허리춤에 갖다대고 오른손을 흔들며 '나가자 해병대'가와 '청룡은 간다'등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구름떼처럼 연병장에 모인 갈고리와 쇠스랑 같은 소방기구와 돌멩이를 손에 쥔 약 2000명의 병력이 일제히 돌멩이를 던지며 접근해 오는 바람에 누군가의 제의로 격납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습기의 날개 밑에 피신을 했으나 새까맣게 날아온 돌멩이가 격납고 속으로도 날아드는 바람에어쩔 수 없이 철수를 단행, 활주로 끝에있는 철조망 지대까지 공군들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약 2키로를 구보하여 견고하게 가설돼 있는 철조망을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타 넘었으나 철조만 바깥쪽에 있는 70~80 야드 너비의 수초가 우거진 천연늪을 헤엄을 쳐서 건너는 과정에서 이 소위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맨 뒤쪽에 쳐져 맥없이 껍북거리고 있는 이 소위를 발견하여 늪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김무일 소위와 이무수 소위였고, 이강오 소위를 비롯한 3~4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입과 항문이 열려 있는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군기지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이 된 이 소위는 7시 50분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는데, 그 때 그 의무중대 병실에는 부상을 당한 20여 명의 비행종대 피교육 장교들과 12~13명의 해병학교 기초반 장교들이 엠불란스에 실려 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 사건이 남긴 사법적인 처리문제와 관련된 비화이다. 진해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전도봉 소위를 비롯한 6명의 주동자를 구속하는 한편


요약


해병대가 개병대 짓하다 공군 장교에게 쳐맞음


복수한다고 부대 단위로 아군 공군비행장 습격함


공군부대 쳐들어가서 잠자던 내무반 몰래 쳐들어가 갑자기 구타하나 역으로 또 쳐맞음(그와중에  약 백몇명을 수천명이라 졌다고 뻥깜)


열 받아서 공군부대에 있던 아군 전투기(?) 부수면서 도망감(그 와중에 해병 한 명 늪에 빠져 사망)


'주모자 전도봉"은 개병대의 혼으로 인정받아 해병대사령관 까지 해쳐먹음


그러나 똥별이라 뇌물 처먹고 짤림


정계 진출함

망함


20년 회고록

 <그러나 해병대는 영원하다>를 발표


내용:  사관후보생 시절에 남포동에서 깡패들과 100대 1로 싸웠다..


그만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