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소 제작 광고


1. 러시아가 핵무기로 위협하고 있다. 핵전쟁이 일어나서 그냥 죽으면 모르겠지만 만약 살아남으면 우린 뭘 먹고 살아야 할까. 지금이야 라면을 사둘까 생각하는 정도지만, 
공산주의와 핵전쟁의 위협으로 불안감에 떨고 있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좀 다른 생각을 했었다.

유래없는 호황속에 살던 1950년대 미국인들은 소련의 핵공격을 두려워했다,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가 그러했듯, 미국인들은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핵공격을 당했을 때의 대피요령을 가르쳤다. 민방위 싸이렌이 울리면 침착하게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있으라는 게 당시의 교육이었다.


다만, 땅이 넓고 돈도 많은 미국에서는 수많은 가족들이 자기집 지하실이나 뒷마당에 대피소를 만들어 두었다. 정부가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유서깊은 가르침을 따라, 미국인들은 총과 함께 핵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준비했다. 하지만 그런 미국도 도시에는 민간 방공호를 건설하는 게 어려웠기에 공공 대피소를 준비했다.


1950년대 미국인들은 핵전쟁이 일어나도 국민 대부분이 살아남을 것이고 지금의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해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미 정부는 살아남은 미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아 정권을 유지하려면 대피소에서 먹을 것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진 대피 요령과 비슷하다


2.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5년 미연방 대피청을 설립하고 핵전쟁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대피청은 공공 대피소를 확보하고는 그와 함께 미국민 전부를 2주동안 먹여 살리는 문제에 대책을 준비했다. 두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항을 겪으면서 물자부족에 시달렸던 미국인들은 대부분 경험적으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물품을 알았다. 연방 대피청은 모든 미국인에게 표준적으로 1주일간의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두라는 권고를 내놓았고 비상식량으로 수프, 음료수, 콘프레이크, 캔디바 등과 함께 구운 밀가루 크래커를 준비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부를 불신하는 게 미국인의 기본정서라도 모든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1주일간 먹을 물자를 준비할 거라고는 확신하는 정부 관료는 없었다. 특히 도시지역에서 민간인들이 자기 먹을 것을 전부 준비하고 대피소에 올 거라고 믿는 것은 아무리 1950년대 미국이라도 너무 낙관적인 가정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멸망의 날'을 완벽하게 대비하기 위해 돈과 노력,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값싸고, 먹기 편하고, 저장하기 쉬우면서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영양가도 풍부한 그런 '비상식량'에 맛과 모양 품질, 포장용기 까지도 미국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건 절대로 라면사재기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의 깡통에 들어 있음. 


3. 미 행정부의 '논리적이고 집중적이며 체계적인' 연구에 따라 최적의 비상식량으로 선정된 것은 '밀죽'이었다. 영양가 높고 식이섬유가 풍부한데다 미국의 대평원에 흔한 밀을 주 재료로 하는 밀죽은 아주 값싼 보존식품이었다. 가루에 물을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라면과 같았지만 이 '비상식량'은 언제 올지 모르는 '멸망의 그 날'을 기다리며 선반위에서 몇년 동안이나 보존되어야 했다. 당시 미연방 대피청은 '실증적인' 연구 끝에 이렇게 만든 밀죽 보존식이 약 52개월 뒤에도 맛은 덜해도 먹을만 한 수준을 유지할 것을 확인했다. 이들은 미 의회에 자신들이 찾은 밀죽 크래커들이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검증된 식품 보존법'이라고 보고서를 올렸다. 이들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3천년된 밀 크래커가 먹을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실증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들여 많은 석학들을 연구시킨 끝에 미 정부가 찾아낸, 핵전쟁시 미국인을 위한 보존식품 '밀죽 크래커'에는 '다목적 생존 크래커'라는 공식 명칭이 붙었다.


록펠러 가문의 기대주였던 넬슨 록펠러는 미국 공식석상에서 최초로 빡큐를 날린 사람 중 한명임.


4. 당시 뉴욕 시장은 넬슨 록펠러였는데 그는 '멸망의 날' 준비에 열을 올렸다. 록펠러 시장에 따르면 단 37센트면 미국인 한명을 하루동안 생존시킬 수 있을만큼의 크래커를 준비할 수 있었다. 특히 1950년대의 풍작으로 너무 남아도는 농작물들을 창고에서 비워내는 효과를 고려하면 더욱 싸게 크래커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류상 생산비용을 그 정도로 낮출수는 있었어도 7만 5천톤이 넘는 크래커를 실제로 만들고 저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당시 미국에 정부가 확보한 제분소는 시애틀의 피셔 농장 뿐이었는데 이걸로는 당장 내일이라도 벌어질 지 모르는 멸망의 날을 대비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 국방성은 1961년 미국 전역의 시리얼 회사들에 크래커를 대량으로 발주했다. 그리고 미국의 쇼미더머니는 불과 3년만에 2백억개의 크래커를 확보해 미국 각지의 대피소로 옮기는 걸 성공시켰다.


제조중인 크래커



5. 그렇게 해서 미국은 설령 당장 핵전쟁에 돌입해도 미국인들에게 2주간 제공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했다. 주식인 밀 크래커만이 아니라 식수, 각종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해줄 캔디, 젤리까지도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가능한 일인가? 미국인들의 조심성과 실용정신은 거기까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미 해군은 1962년 초, 상황의 확실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해군 장병 100명을 동원해 2주동안 대피소에서 버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북서쪽 베데스다 해군병원 지하에 위치한 대피소에서 명령대로 2주를 버텼다. 물론 실제 상황이 아니니까 수프와 땅콩버터, 젤리 같은 감미료와 커피가 추가적으로 제공되었다. 실험기간 동안 크래커가 너무 쉽게 부스러진다는 문제점이 발견되긴 했지만, 아무튼 병사들은 2주동안 굶는 것보다는 나은 상태를 유지한 채 대피소 생활을 견뎌내었다. 이제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2주를 버티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완료된, 미국의 핵전쟁 쉘터들에 비축된 생존 크래커 깡통들은 기약없는 기다림의 나날을 시작했다. 물론 미 정부는 빈틈없이 매년 신선도를 점검했다. 




그러고 10년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종합 서바이벌 키트 저장중의 사진


6. 1970년대에도 이 크래커들은 여전히 먹을만한 수준을 유지했다. 냉전으로 금방이라도 핵전쟁이 일어날 것 같던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세계각지에서 대리전이 일어나자 미 정부는 이 애물단지들을 기아에 시달리는 다른 저개발 국가에 공여하고 새 비스킷을 만들어서 순환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니제르, 차드 같은 아프리카 최빈국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동안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크래커를 퍼부었다. 1974년까지 약 15만톤의 밀 크래커들이 세계 각지에 공급되었고 새로 16만 5천톤의 새 크래커들이 저장되었다.

미국 정부 관료들은 불쌍한 외국인들을 돕기 위해 무료로 제공하면서도 크래커 맛을 확인해 보는 품질검사를 잊지 않았다. 어떤 관료는 직접 먹어본 다음 그냥 먹기에는 맛이 없지만 치즈라도 끼워넣으면 먹을만 한 수준을 유지할 거라고 보고했다.

미국 의회 지하 벙커



7. 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나고 1970년대도 저물어갈 무렵 이 '비상식량'들의 품질에 생겼다. 1976년 과테말라가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에도 밀 크래커를 공여하려고 했던 미국 정부는 스프링필드에 저장되었던 크래커들이 끔찍할 정도로 썩어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당시 뉴욕 트리뷴은 이들 '비상식량'이 식량이라기 보다 생화학 무기로 적합하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추진했던 사업의 결과물들에 대한 품질 조사에서 수많은 문제점이 나오기 시작하자 미 정부는 결국 밀 비스킷 저장 사업을 일단 중단했다. 그리고 1978년 미 정부는 공식적으로 밀 크래커들이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인정했고 더이상 곡물 기반 비상식량들을 보관하지 말라는 통보를 내렸다. 이집트 사막에서 수천년을 버텨낸 밀 크래커들은 습기찬 미국 지하실에서는 30년을 못 버텼다. 

먹어본 사람들



8. 1970년대가 지나가면서, 미 정부는 핵전쟁의 위협보다는 일본의 일개미들과 오대호 주변 공장지대의 파업, 실업과 월남전 뒤처리를 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고 미 정부의 '비상식량'들은 점점 잊혀졌다. 1979년 뉴욕시는 공공 방공호 계획을 중단하고 그때까지 준비되어 있던 1만8백개 소의 민간-공공 대피소에 저장되었던 물자를 비우기 시작했다. 뉴욕시는 썩은 크래커들을 땅에 묻거나 닭 사료로 처리해 줄 폐기업자들과 비스킷 '1톤'당 38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300억 캔이 넘는 건조 밀 비스켓이 만들어진 결과 여전히 수많은 크래커 깡통들이 잊혀진 채 남겨져 있다. 2008년 브루클린 다리 근처에서 공사하던 인부들은 봉인되어 있던 냉전시대의 방공호 물자를 발굴했다. 쉘터 안에는 드럼 50개 분의 정수된물과 종이 침대, 의료키트와 끝이 없는 '생존용 크래커' 박스가 비축되어 있었다. 이 크래커를 구해서 직접 맛을 본 사람들은 썩은 기름 맛이 난다거나 차라리 벌레를 잡아서 먹겠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꼭 먹어보고 싶으면 아직도 이베이에서 판다


9. 오늘날에도 일본과 미국의 부자들은 새롭게 대피소를 준비하고 있다.  뉴욕에만 258개소 이상의 대피소가 있고 오늘날의 최신식 쉘터들에는 군용비상식량들이 저장되어 있다. 1억명이 넘는 사람들을 세금으로 준비시키는 게 아니기에 이들은 예산의 제약을 훨씬 덜 받으면서 생존식을 준비해두었다. 


  


미국의 몇몇 기업이 선전하고 있는 17억짜리 염가판 대피처에는 민물고기들을 저장할 수 있는 수조와 수경재배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요약.

1. 일반인은 운좋으면 썩은 밀비스킷을 먹을 수 있다.

2. 17억 정도 여유돈이 있으면 약간 다이어트에 신경쓰는 정도로 지금처럼 먹고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