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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은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정유재란 당시 침공을 맡았던 다이묘들과 휘하 병력을 일본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후퇴하던 "후퇴전"임.


당시 이순신이 출병을 왜 감행했느냐. 이는 백사집에 나온 이순신의 말에도 나와있음.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니 하늘에 바라옵건데 필히 이 적을 멸하게 해주소서"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300척가량의 전선을 굳이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에 일본군은 공세여력을 상실하여 육전에서 패주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던 참이였고, 일본 내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내부 상황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년간 조선에서 온갖 똥꼬쇼를 펼치며 살려고 하던 일본 군인들 또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잃을 게 없는 적을 굳이 왜 쳤겠는가. 이순신이 저 말을 한 이유는 일본군의 물리적 섬멸 또한 있겠지만, 일본의 침략의지를 멸하고자 하였던 것이 크다. 당시 일본은 심유경-고니시 조서 조작사건으로 인하서 상당히 분개했었으며, 이로 인해서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유재란으로 침공하였다. 만에 하나 세키하가라 전투에서 친도요토미 히데요리파 이시다 미츠나리가 승리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재침공할 가능성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전략적 사유로 인해 이순신은 굳이 조선에서 퇴각하려 하는 일본군을 치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는 실제로 성공을 거두어서 기유약조를 광해군 대에 받아낸다. 노량 해전 이후 기유약조를 체결하기 전 까지는 공식적으로 정유재란은 끝난 것이 아니였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조선을 다시 침공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면에서 노량 해전이 의미가 없었는가?


 전투가 전개된 이후에 조선-명군의 피해가 컸던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1. 야간전으로 인한 시계 확보의 어려움과 이로 인한 접근전의 허용이 있다.  노량 해전은 야간에 치러졌다. 당시에는 시계에 의존하지 않는 탐지수단이라고는 귀밖에 없었다. 이말은 즉슨 조선군은 주특기인 장거리에서의 일방적 포격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돌격하는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를 보는 족족 공격할 수는 없었던 것이며, 이로 인해서 함선들이 파괴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2. 명군이 일본군의 돌파구로서 작용했다. 명나라 함대의 정크선은 판옥선과 같이 포격전만을 위해 설계된 함선이 아니였으며, 평저선이라고는 하나 화약 무기를 발사할 때의 반동이 판옥선과 차원이 달랐다. 또한 판옥선과 같은 따로 설계된 포구가 비교적 부실했기 때문에 사격 편의성 면에서도 불리함이 있었기에 판옥선들과의 탄막 형성에 차질이 있었다. 이로 인해서 시마즈 함대는 명군을 상대로 일점돌파작전을 펼쳤고, 야간전으로 인해 중/후열에 위치한 일본 함대들은 비교적 피해가 덜했기 때문에 일점돌파로 이를 빠져나갔다.


당시 조선 함대는 명량 이후 60여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명 함대는 난중일기에 따르면 1백척의 함대를 보유, 고니시 함대 총 전력은 300척 이상으로 파악된다. (일본 함대는 자료마다 다르나 전부 300척 이상임을 시사하고 있음)


야간의 난전으로 인해 포격전의 이점도 적고, 또한 일점돌파로 인해 혼란한 상황에서도 조선군이 일본군 함대 약 200척 가량을 파괴했다는 것이 어떻게 작은 공이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파한 것에 의해 이후 기유약조가 체결될 때 까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억제한 것이 어떻게 작은 군공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인다.


*본 글의 내용은 '세계의 역사', '朝/明 連合艦隊의 형성과 露梁海戰의 경과', '난중일기', '선조실록', 국회도서관에서 대여한 '임진전란사', '정유재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재건활동과 고하도'를 참고했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