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도날드 슬로빅

Edward Donald Slovik. 

1920-1945.

그는 1920년 미시간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손버릇이 나빠 공장 등에서 물건을 훔쳤고

교도소에 두 번이나 가기도 했으며




1942년에 가석방된 뒤에 앤투어넷 위즈니스키와 만나 결혼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집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었으나

유럽 전선이 격화되면서 전사·전상자가 급증하고

미군의 병력 수요도 늘자 징병의 폭이 확대되면서



 

징병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체 등급이 현역이고 중범죄 전과만 없으면

모조리 끌어내기 시작하는데, 

에디도 이런 이유로 육군에 징병 되었다.



그 후 텍사스에 있는 훈련소에 기초훈련을 받고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지만






본대에서 낙오하여 후방에 있는 캐나다군 육군 부대에서 6주를 보내 

탈영죄로 기소되었다


기소된 슬로빅은 '부대로 복귀하라, 그러면 기소가 유예되고 전출갈수 있다'

라는 군법무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을 받겠다고 하였다.


아마 자기가 탈영만 했으니 사형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 미군에서 탈영죄로 처형당한 범죄자가 여럿 있긴 했지만 

순수 탈영만으로는 사형이 집행된 사례가 이전이건 이후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제 무덤 파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소속됐던 육군 제28보병사단은 휘르트겐 숲 전투(Hürtgenwald)를 비롯해 

독일 국방군 육군과의 최전선에서 계속 사상자를 내고 있었고, 

워낙 전투가 처절한 나머지 정신줄을 놔버린 군인들도 수두룩할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사단에선 군기를 확실히 세우고 잠재적 탈영병들에게 

'탈영한다고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944년 11월 11일, 군사재판이 열렸으며 

9명의 장교로 된 배심원은 유죄로 판단했고, 

슬로빅은 적전탈영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1944년 12월 9일 슬로빅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에게 감형 청원을 보내지만 

12월 23일 기각되었으며



이듬해인 1945년 1월 31일 오전 10시 4분에 

프랑스 알자스의 생트마리오미느(Sainte-Marie-aux-Mines)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