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4살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 Le Journal Illustré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사실, 당시에는 시체 관람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로 된 영안실은 가장 인기 있는 관광명소 중 하나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영안실은 거의 모든 파리 가이드북에 언급될 정도로 많은 방문객을 끌어 모았다.

영안실 주변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오렌지, 쿠키, 코코넛 따위를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에 다른 영안실은 관광객을 유치했지만 파리에 견줄만한 곳은 없었다.



인기에 힘입어 영안실의 디자인도 다양했다.

한 번에 50명의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영안실도 생겨났다.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새벽까지 영업하는 곳도 있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차가운 물이 떨어졌고,

1882년 즈음하여 냉방 시스템이 갖춰졌다.



경찰은 살인 용의자를 데려와 피해자와 대면하게 했는데

그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

자백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데,

파리 경찰 기록에는 처음에 협조를 거부한 용의자가

영안실을 나온 후 자백한 여러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러한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인기가 점점 줄어들다가

1940년대 전후하여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