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작가에게 보여줄 만큼의 팬픽을 썼다는 부분에서 글 쓰는거에 흥미가 있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거임
그리고 그 사람이 "아ㅋㅋ 소설 좆밥이노ㅋㅋ 내가 써도 이 작가보다는 훨 잘쓸듯??ㅋㅋ" 하면서 그 작가를 깔보는 목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닌 이상
"우쭈쭈 우리 새끼 잘했쪄요~" 하는거 보다는
"내 기준에선 이 부분은 이러고 저 부분은 저러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게 훨씬 크게 와닿을거라 생각함
대명사-보통명사 연달아 말한거 보면, 일본 웹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판타지물 서술법을 가리키는 듯?
예를 들면 이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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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발치에 떨어진 손가락을 집어 기사에게 건넸다.
방금 마왕이 으깨버린, 성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조각이었다.
"먹어라, 너를 위한 한 조각이다."
기사는 그 손가락을 집어들었다.
기사의 손가락 끝을 대신하여, 성녀의 손가락이 경련하는 듯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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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명사인 마왕/성녀/기사가 대명사처럼 쓰이며 반복되는 서술법.
이건 클리셰적인 이미지를 독자에게 계속 상기시켜서 묘사를 최대한 없애고 스토리만 빠르게 전개하기 위한 기교라서, 문장력이 수려한 사람이 보기에는 뭐 이런 식으로 글을 쓰나 싶어질걸.
ㅇㅇ 인물의 내면 심리 본질, 그리고 세계관의 섬세한 표현, 이걸 위해서는 고유명사가 명확하게 등장하는게 좋아.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그 인물의 이미지가 독자에게 조금씩 구체화되기 때문이지. 보통명사만 썼을 때는 기존의 클리셰적인 이미지가 영향을 줘서 구체화에 방해가 돼.
하지만 반대로 저 기교가 오히려 효과적인 경우도 있긴 해. '이 인물의 내면이나 본질 따위가 뭐가 중요해? 얘는 그냥 역할을 수행하는 인형(기사, 마왕, 성녀)일 뿐이야'라는 느낌을 주고 싶은 경우. 그때는 그 인물에게 고유명사 같은걸 주지 않는거야. 인간성이 없거나, 인간성이 없는 취급을 받는 캐릭터를 다룰 때 이건 꽤나 효과적일 수 있어.
그렇다면 반대로 초반엔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성을 가진 등장인물이 작중 서사를 거침에 따라 인간미를 말살당하고, 종국에는 타락하여 감정이 거세된 악역으로 바뀔 때마다 그 호칭을 바꾸는 것도 좋겠네.
"아서스 메네실"이라는 야심 넘치면서도 온화했던 왕자가 전쟁으로 감정이 무너진 "사령관 아서스"가 되고, 다시 그런 이가 마지막 기회로 붙잡았던 힘이 저주가 되어 "리치킹"이라는 인간미 없는 존재로 변모하는 식으로 말이야.
나라면 최종적으로 타락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그 인물에게 고유명사를 부여하지 않을거같아.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라는 걸 처음부터 암시해주는거지.
예를 들어 아서스를 계속해서 '왕자'라는 보통명사로 서술하다가, 최후의 클라이막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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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윌리엄을 향해 서슬퍼런 악령의 검을 겨누었다.
"윌리엄,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군지 말해봐라.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냐? 네가 모시던 아서스다.
아서스가 누구냐? 네가 충성을 바치던 왕자다.
내가 누구냐? 나는 이 나라의 왕자..."
"너는 더 이상 왕자가 아냐!"
왕자는,
"내가 모시던 아서스님은 너같은 사악한 괴물이 아냐!"
아니, 더 이상 왕자라 불릴 수 없는 존재는,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윌리엄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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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
반대로 노예였다가 주인공에게 구원받아 인간성을 회복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그 캐릭터는 노예라도 이름을 중요하게 다뤄주면 따뜻한 느낌이 들거같지.
애초에 주연이 피카레스크? 혹은 인간성의 붕괴로 나아간다면 네 말이 맞는 듯. 이 경우, 인간성을 포기함에도 놓을 수 없던 의무를 강조하는 게 쓸만하겠지.
가령, "혁명가"가 주인공인 소설을 쓴다고 쳤을 때, 초반에는 혁명가가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지들과 왁자지껄 술도 마시고 동료애를 겪는 묘사를 할 수 있을 거임. 이때는 동지들도 주인공을 이름으로 자주 부르겠지.
하지만 서사가 무겁게 가라앉는 중반부로 이어지게 되면, 주인공은 점차 혁명의 이상과 인간성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게 될 거임. 이 과정에서 인간성에 초점을 두는 전개가 나온다면... 그건 아마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인간찬가 계열일 테니 넘어가고, 결국 혁명의 이상에 초점을 두며 하나씩, 자신의 인간성을 베어내기 시작할 거임.
동지들을 정치적 팻말로 소모하고,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을 진압하며, 점차 이름보다는 위원장이니, 장관이니 하는 호칭으로 불리겠지. 그러다 완전히 선을 넘어버리는 순간에 네가 말한 식으로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하며 터뜨리는 게 가능하겠지.
개인적으로 이런 묘사 재밌게 봤던 게 리첼렌 작가의 "대통령 각하 만세"였음. 피카레스크 묘사와 선 넘는 묘사를 아주 능구렁이 담넘듯이 잘 표현했거든.
독자가 그렇게 느끼게 할 수 있다는게, 바로 이 보통명사 서술의 장점...
마왕/기사/성녀의 구체적인 데이터를 하나도 주지 않고도 독자 스스로 상상해서 안쓴 부분을 다 메꿔준다는거지. 그래서 작품 초반에 이 기교는 독자를 이야기에 몰입시키는데 도움이 많이 돼. 다만 작품 중후반부에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니 조금씩 고유명사로 바꿔나가야하는거지.
이건 볼때마다 주사 대기열 가장 뒤에 선 꼬마가 된 기분이야.
맨 앞에서 주사 맞는 애는 울고 의사선생님은 냉혹하게 주사기를 누르고 '다음'을 외치고, 줄은 줄어들고 내 용기도 줄어드는 대신 빨리 맞고 편해지자는 자포자기와 맞으면 아파서 뒤지겠다는 공포에 뱃속이 땡기고 머리가 어지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