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긴 애초에 우리땅이었잖아;;;
조선민족의 시작은 요하강유역이고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에 우리가 돌아간다는데, 만주족놈들이 뭔 헛소리를 할 수 있음?
애초에 청나라가 먼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는데, 청일전쟁 발린 뒤에 나라 개판되어서 대한제국한테 따일 정도가 된거임.
강약약강이고 자시고 자기한테 주먹질하던 깡패가 약해졌을 때, 보복하지 않는 인간이 있음? 보복하지 않으면 호구거나 병신인거지. 청나라가 조선에 처맞은 것은 업보다.
일단 우리땅 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태클을 좀 걸어야겠음.
고조선~고구려 때 까지는 부족국가, 연맹왕국 수준이라 윗대가리 정도나 나중에 한민족으로 편입되는 예맥친구들인거지
밑에 피지배 계층은 다른 여러 부족이었음.
발해도 위에 지배계층은 고구려인 밑에 피지배계층은 말갈인이었고.
발해가 망한 이후에 유민이 고려로 넘어왔다지만 그건 고구려출신들 얘기고 피지배계층이었던 말갈애들은 그 땅에 계속 남아서 살았음.
사실상 저긴 말갈애들 땅이고 거기에 한민족이 들어가서 종종 지배자 노릇 하다가 천년도 전에 망해서 쫒겨난게 맞음.
그리고 말갈=여진=만주족임 시대에 따라 명칭만 바뀌었지 같은애들임.
우리는 부대끼면서, 경쟁하면서 살다가 천년도 전에 서렌치고 내려온거고
만주족 애들은 계속 버티면서 거의 반만년을 살아온 땅이 맞음
틀렸음.
서구식 민족개념때문에 예/맥과 한을 다른 민족으로 봐야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 맥, 한은 다른 부족이었는지 몰라도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이 맞음.
언어적으로 분화되지 않았음으로 예, 맥, 한은 언어가 아니라 생활사로 나뉜 개념이라고 예족과 맥족은 유목을 하거나 반농반목을 한 반면에 한은 쌀농사가 되는 남쪽으로 내려와 일찍이 농업민족으로 전향한 사람들이었음.(조선민족이 본래 유목민족이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따로 알아보시길 권장)
그리고 서구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고대 조선민족의 시작점이 요하강 유역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며 요하강 유역부터 송화강 유역까지가 조선민족의 터전이었던 것이 맞음.(고대 여진족-말갈족의 시작은 흑룡갈 유역이라는 설이 유력)요하강 유역에서 시작한 조선민족은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서 한반도의 토착민을 밀어내고 한반도를 차지했음.
즉 예맥이 한에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예맥에서 한이 분리되어 나왔고 후에 발해가 멸망할 쯤 인구가 너무 적어져서 유지가 안되게 된 북쪽의 예맥계 동포들이 남으로 내려와 고려의 한계에 합쳐진 것임.(참고로 우리가 쓰는 표준어가 고구려어기반에 신라어가 합쳐졌다는 학설이 다수임.)
그렇다면 만주의 인구비율은 언제 어떻게 왜 바뀌었나? 왜 조선민족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나?
그것은 바로 수-당의 고구려 침략 때, 너무 죽어서 인구비율이 급진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임. 고구려 전까지 부여지역과 고구려지역은 순수 고구려인이 절대 다수였는데, 수-당전쟁 당시 총력전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특히 남성이), 청야전술로 농업기반시설도 박살나서 인구가 회복이 안되었고 결국 고구려가 진 다음에 당나라가 고구려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까지 하면서 인구 변동이 심화됌. 당연히 조선계(고구려인)가 사라진 자리에 여진족이 들어왔고, 고구려계 인구가 회복되지 않는 와중에 여진족 인구비율이 늘어나면서 만주의 인구구조가 바뀜.
결과적으로 후발 개척이었던 한반도는 순수 조선계 지역이 되었는데, 선행 시작시점은 만주에서는 조선계가 사라진것이 되었음.
만주에서 조선계가 완전히 사라진 시점은 원나라 멸망 후인데, 참고로 원나라가 고려 왕을 심왕으로 임명했을 때만 해도 만주에 조선계가 남아 있었음(심왕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만주의 조선계 인구 관리였음)
추가적으로 인구구조가 바뀌는 사례를 보고 싶다면 레콩키스타에서 바스크족 영역이 줄어드는 과정이나 인도의 왕조변화에 따른 민족지역 변경사례를 찾아보길 권함.
여담)저긴 원래 조선민족의 땅이었던 곳이다. + 청일전쟁에서 참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원세개가 조선에서 행패부렸던 것도 그와같은 맥락.
애초에 백두산정계비의 해석문제로 간도지방은 조선령인지 청나라령인지 애매했으며, 삼전도의 굴욕이후 조공책봉관계가 되자. 전방이 아니게 된 저 곳에 조선인들이 건너살기 시작했기에 조선인 인구가 꽤 되었다. 오히려 청나라가 의도적으로 조선인 인구를 줄이려고 해서 대한제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랑스가 간도를 조선령으로 보았다는 자료도 있다.)
팩트 : 백두산 정계비는 1710년에 세워졌는데, 조선사람들이 계속 건너가서 살려고 국경을 계속 넘어가니깐 거주지를 기반으로 한 국경이 맞지 않아서 세운 것이다.
926년, 발해멸망 이전까지 조선민족의 땅이었고 그 이후에는 거란족의 땅이었다. 거란의 요나라 1125년까지 존재했으므로 적어도 1125년까지 거란족의 터전이었다. 후에 금나라가 정복했지만 원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를 정복할 때, 현지의 거란인들이 몽골인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거란족이 대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34년부터 약 1400년대까지는 원나라땅이었고, 원나라가 몽골인과 거란인들을 동등하게 대해서인지 아니면 문화적 동질감인지 몰라도 거란족은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따라서 약 1400년대까지는 몽골인들의 땅이었다.
1368년부터 서간도는 명의 영토였고 북간도는 여진의 영토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자국의 몽골병을 데려왔다는 말이 있으므로 그 서간도에 몽골인과 한족이 어울려 살았을 것으로 추정댐. 북간도는 1400년대부터는 확실히 여진족의 영역이었음. 청나라 성립이 1616년이고 병자호란이 1635년이므로 여진족이 온전히 차지하면서도 조선인이 없는 간도는 저 시기 뿐임.
즉 백두산정계비 설립 전후로 조선인은 계속 건너가 살았음. 조선인이 조선말에나 건너간게 아니라. 그 시기에 조선경제가 피폐해지니깐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난 것 뿐임. 간도 전체가 온전히 여진의 땅이었던 시기는 100년도 안됌.
조선민족은 역사전 '원시 한국인'(단군조선을 의미하는게 아님. 그냥 조선계 원시인 포함)부터 발해시기까지. 수천년임.
애초에 여진족은 유목민족이라서 유목민 특유의 낮은 인구부양력을 해결할 수 없었기에 만주지역 전역을 차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음. 여진족은 명나라 시기에 가서야 반농반목을 했고 청나라 시기가 되서야 온전히 농경민족이 됌. 즉 만주전역을 여진족으로 채울 수 없었고, 정복한지 얼마 안되는 간도를 여진사람으로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었음. (실제로 이 인구부양력해결이 늦어 버리는 바람에 청나라 형성 이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는 원흉이 됌. )
동양이 원체 민족에 국가를 필수조건으로 봐서 그렇지 국가간 국경선이 반드시 민족간 경계선과 일치하는 것이 아님, 또한 어느 지역에 100% 한가지 민족만 사는 것 또한 아님.
거란족은 북서쪽과 북쪽에서 남진해왔고 여진족은 본래 말-갈족(말-갈이 왜 금지어임?)으로 불리던 민족으로 동북쪽에서 남진해 옴. 송화강유역에서 시작한 여진족은 고구려시절에 연해주지역에 살면서 슬금슬금 고구려 땅으로 들어옴. 발해가 건국된 이후에 발해 동쪽은 여진족비율이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됌.
발해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이 대놓고 한반도 지역으로 남진하는데, 최소 의주-청진선까지 여진족이 남하함. 괜희 서희가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을 때, [[여진족 때문에 통교를 못해요 ㅠㅜ]]라고 핑계를 댄 것이 아님. 아마 이때 강동 6주를 못 얻었으면 평양-원산선까지 내려왔을 수도 있음.
여진이 조선민족계 영토를 강탈할 때 쓰던 수법이 이슬람난민 마냥 들어온 다음에 수를 불리고 자신들이 유리해지면 지역의 조선계를 없애는 방식이었음.(더러운 수법이지?)
때문에 만주가 거란령이었을 때도 있던 조선계 인구가 여진이 만주를 먹은 뒤에 없어졌던 것임.
각설하고! 한반도 지형을 보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특히 북쪽은 [[개마고원]]이라는 인간이 도저히 살기 힘든 곳이 있어서 동서간 괴리가 상당한 곳임. 서쪽은 평야지대고 고구려의 핵심지역이었던 터라 조선계인구도 원래 많고 고려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빠르게 수복함.
반면 원산-흥남 이북은 여진들이 빠르게 내려와서 작업질한지 오래 되었고, 이곳에서 조선계와 여진계의 알력타툼이 심각했음. 왜냐하면 북한지역에서는 동예와 옥저가 들어설만큼 물산이 풍부한 편인 곳이었기 때문임.
위대하신 세종대왕께서는 원산-함흥지역을 지키려면 적어도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으로 보임.4군 6진이 들어설 경우 여진 입장에서는 원산-함흥을 공략하는 것이 영원히 불가함. 그리고 강변은 농사를 짓기 적합한데, 조선이 "응~ 두만강이 국경선이야 ㅅㄱ! ㅋ"이래버리면 두만강유역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음.
당시 만주는 농사하기 척박한 지역(괜히 반농반목을 한게 아님)이었던 고로. 원산-흥남라인은 여진족에게 꿈의 지역이었음. 그리고 위대한 지배자. 세종대왕의 4군 6진 건설은 조선민족에게는 판도학적으로 안정감을 여진에게는 꿈을 걷어차는 일이었음.
당연히 반발할 수 밖에....
1860년 이후에나 조선인이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는데, 간도의 조선인 인구가 10만이 넘어간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가?
고려 심(양)왕이 만주의 고려인관리를 했다는 일이나 백두산 정계비 세워진 이유를 데봤자 뭐 씹을거고.
조선인 십 수만이 넘는 인구가 1860년 이후에나 간도로 넘어가 간도에 살던 토착민의 반발을 겪지 않고 농지를 얻어 정착했다는 소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쓴 글이지? 당신 머리속에서는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이 뭐 무장집단이라도 되었나보네;; 조선정부랑 청정부는 40년간 10만이 넘는 인구가 국경선을 넘는데도 통제하지 않은 병신집단이라는거고? 놀랍네. 10만이 넘는 인구가 움직이는데 기록도 없고.
일본이 간도파출소를 짓던 논리니 뭐니 헛소리하는 것도 웃기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시길.
왜냐하면 1881년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월경 문제를 제기하기전까지 간도 조선인에 대한 문헌 기록 자체가 없는게 사실인데 어떻게함. 우리가 아는 간도 신화는 20세기 초중반 일본의 주장을 그냥 답습한 것이 많음. 자세한건 https://blog.naver.com/nermerschool/222714176322 참고해봐라. 그리고 10만명이 이주한게 가능하냐고? 1860년대 만주 봉금령이 해체된 이후 20세기 전반 만주의 한족인구는 3천만명인데 그에 비하면 10만명은 퀘스트 난이도 아닐까 ?
왜냐하면 1881년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월경 문제를 제기하기전까지 간도 조선인에 대한 문헌 기록 자체가 없는게 사실인데 어떻게함. 우리가 아는 간도 신화는 20세기 초중반 일본의 주장을 그냥 답습한 것이 많음. 자세한건 https://blog.naver.com/nermerschool/222714176322 참고해봐라. 그리고 10만명이 이주한게 가능하냐고? 1860년대 만주 봉금령이 해체된 이후 20세기 전반 만주의 한족인구는 3천만명인데 그에 비하면 10만명은 퀘스트 난이도 아닐까 ?
만주의 한족인구는 원래 있었음. 요동이 명나라땅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자구. 청나라가 명나라를 명망시킬 때 한족병사도 있었던 것을 보면 요동의 한족인구는 원래 적지 않았던 것이 맞을 것임. 만주 봉금령도 그곳에 원래살던 주민을 전부 쫓아내는건 아니잖아?
그리고 아편전쟁 이전에 동아시아의 질서는 중화천자가 천명을 가지고 제후국이라 부르는 조공국들과 조공책봉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었고, 조공국 신민도 명목상 천자의 신민이라 기존 질서상에서는 조선인이 만주에 사는 것이 문제가 안되었음.
아편전쟁 이후(중국의 패전 1860년), 기존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조선이 개방을 시작(강화도조약 1876년)하자 조선인은 더이상 천자의 백성이 아니게 되었음. 애초에 임오군란(1882년) 이후, 청나라는 조선을 근대적인 식민지로 바꾸려고 했음. 더이상 조선인을 자신들 울타리 안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지.(즉 조선인이 간도에 있는게 1881년에 와서 문제되는 것은 당연함)
일본이 간도와 만주를 침략할 때, 어떤 명분을 썼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님. 그 새끼들 지들 입맛에 맞게 명분조작한 것이 한 두번도 아니라서 일본의 주장따위는 믿지 않음.
일본의 행태 때문에 민감한 것은 인정함.
나도 간도문제를 다룰 때, 되도록 사실을 연구해서 우리민족의 이득이 되게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 일본이 쓴 빌미를 믿으면 일본이 우리한테 같은 짓을 해도 믿어야 된다는 공식이 나오니깐 위험하기 때문이지.
혹시 정보가 더 있으면 부탁함. 나도 틀린건 고쳐야지....
참고로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후는 개혁에 필요한 세수를 확보하지 못해서임. 전근대적인 세금수취제도를 개혁하지 않은 탓에 농민들은 세금지출로 고통받는데, 정작 조선조정은 돈이 없었음.(중간에서 빼먹는게 많았다는 소리겠지?)
세종대왕시기 조선인구가 약 800만 명이었고, 고종황제 때, 조선인구는 1800만 명 이상이었음. 그럼에도 고종 때, 조선의 세수는 세종대왕 때의 겨우 절반 수준이었음.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 공정하게 세금을 수취하셨던 것을 보면 고종황제는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을 끝내주었고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는데도 세수확보에 실패한 것임.
고종은 무능한 것이 맞다... 고종 뿐만이 아니라 성리학에 경도되어 있던 고종의 측근들도 무능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저 꼴인데도 어느정도 근대적인 국가의 모양은 만드는데 성공했던 것을 보면, 왕만 다른 사람이었어도 우리 민족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임.... 슬픔...
내가 항상 우리나라 역사교육에 있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건데 니 의견도 그렇고 거시적으로 보는 걸 못함. 왜냐하면 첫째, 구조는 무시하고 사건 위주로 다루며 둘째, 세계사랑 융합해서 비교 분석 해야 되는데 조선사만 존나게 파서 거기서만 원인/결과 따지고 있음. 외국에도 반례가 있는데 걍 무시하고 우물 안 개구리됨. 일본 막부도 성리학을 주요 통치이론으로 삼았고 후반엔 썩어빠져서 국민들은 세금으로 고통받았지만 막부도 부패땜에 망해가기 일보직전이었음. 근데 근대화에 성공함. 그 이유는 세수확보실패, 성리학 그런 잡다하고 세세한 이유가 아님. 사회 구조적 문제가 더 큼.
나도 고종 욕했지만 사실은 고종이 아무리 잘했어도 개혁은 무리임.(물론 고종은 조선에서 손에 꼽는 암군이었다.) 과학 혁명 이후로 강대국이 되는 조건은 지도자 몇 명이 그 시대에 바로 고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님. 강대국이 되려면 다음의 역순으로 조건이 필요함. '외교적 지위-군사력-경제력-금융/무역 경쟁력-기술/혁신 경쟁력&국민들의 교육수준'임. 이전의 조건이 달성 안되면 사상누각으로 흉내밖에 안되고 몇번을 시도해도 실패함. 달성이 되어 있다면 지도부가 찐빠를 내도 국민들이 알아서 혁명을 일으키든지 해서 자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줌.
저 조건은 해당 문화가 가진 전통에서 기인하고 그 전통은 지정학적 이유나 수백년 전에 시행한 정책이나 세계사적 큰 이벤트에서 기인함. 전통을 고치려면 내전을 치르든가, 역성혁명이 일어나던가, 세계사적 큰 이벤트가 발생해서 사회구조가 바뀌어야함. 조선은 세종 이후로 노비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이후로 농업 혁명도 거치지 못해(당연히 노비 존나 많은데 걔네 돌리면 되는데 농업기술을 왜 발전시킴? 물론 이 또한 세종의 문제는 아님. 노비제를 손본건 통치목적 일환이지 아무리 갓세종이라도 몇백년 뒤에 경제문제까지는 생각하기 어렵지.) 산업에 투입할 잉여 인력마저 없었고 그로 인해 기초적인 교육의 개념도 없는 좆망국가였기에 망하는 게 맞았음(안 망했다면 지금도 조선 후기와 생활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 반면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막부의 전근교대 정책등으로 이미 상업이 어느정도 발달한 상태였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막부가 아무리 찐빠를 내도, 혁명과정에서 수많은 역경이 있었음에도 성공한 것.
어... 이야기의 주제가 산업과 경제라서 그것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한 것인데,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좋아 그럼 조선의 과학기술과 보편기술이 망한 원인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고.
일단 성리학이 조선을 망친 과정을 설명하기 전에 유교가 들어온 과정부터 짚어 보자고?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에 유교가 소개된 것은 다 알테지? 하지만 유교가 널리 퍼진 것은 신라였어. 고구려는 (특히 연개소문이)불교를 견재하는데, 도교를 사용했고 백제는 불교의 세가 너무 강해서 불교 원툴이라 유교가 정착하지 못했지. 신라의 경우 불교가 늦게 들어와서 틈이 있었다는 것을 포함에서 관직에 오르기 힘든 6두품들이 [[당의 빈공과에 통과해서 자신를 과시하기 위해서 + 그리고 혈통이 안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서 보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유교공부를 했기 때문에 유교가 퍼질 수 있었어.
(여담으로 고려 초, 신라중심사관이나 영남+ 기호가 유림세력이 가장 많이 퍼졌던 이유도 이 때문이고 조선이 무너진 뒤 성리학의 세를 대체하여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들어와 그 빈자리를 채웠지만 6.25전쟁으로 영남의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기독교가 사상/이념적인 빈자리를 채워나갔고 영남이 현재 기독교 최대 발흥지역이 되었다.)
각설하고 신라가 가장 확실하게 유교를 들여왔음에도 신라에서 유교가 활약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신라의 귀족(진골)들이 교종-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실망한 6두품이 신라를 등지고 호족이 되거나 호족들 아래로 갔지만, 지방세력도 유교보다는 선종-불교를 이용해서 교종-불교의 귀족들과 싸웠다.
고려 초, 고려는 분명히 불교국가(호족이었을 때는 분명 선종이었지만 고려를 세운 뒤 교종으로 갈아탐)였지만 유교를 들여와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지. 대표적인 군주로 광종과 성종이 있는데, 이 때 고려에서 활약한 유학자들이 신라출신이고 이들은 사대주의적 사고방식과 신라중심사관을 가졌던 고로 고려의 왕권이 강화될 수록 고구려를 이었다는 고려가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 것으로 생긴 마찰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지?
어쨌거나 불교의 세는 유지되었고 유교는 힘을 못 썼다. 왜냐하면 고려의 국교는 어쨌거나 교종-불교였고 고려를 지배했던 문벌귀족들이 불교를 밀어줬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상황이 바뀌니,
바로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이난 것이다. 무신정권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교종을 탄압하기 위해서 선종계를 키워줬고 국가를 통치하는데 필요한 인재를 뽑기 위해서 유학자들을 썼다. 훗날 무신정권이 무너졌을 때, 군인 세력이 박살났어도 이 때 성장한 선종불교세력과 성리학자세력은 어디안갔지. 참고로 지금 대한민국 최대 불교 종파인 조계종이 선종이다. 이 때 커진 선종이 한국을 지배해 왔던 교종을 밀어내고 다수를 차지하게 된거지.
각설하고 고려 유학의 변화는 또 있었는데, [[송나라의 성리학]]이 고려에 전파된 것이다. 그 전까지의 고려 유교는 훈고학이었는데 성리학이 빠르게 퍼져서 고려의 대중 유교관이 되었지. 대륙에서는 성리학의 문제점들 때문에 양명학이 등장하고 양명학이 대세가 되었는데 말이야.
쨌거나 고려말, 원나라가 불교국가여서 불교에 관용적이었다는 점 + 권문세족이 불교를 믿고 있다는 점 + 불교가 세속화되어서 큰 문제를 만든다는 점 때문에 고려의 개혁파들이 불교와 불교세력을 미워하게 되었고 이들이 불교 대신에 선택한게 [[성리학]]이었다.
그리고 고려의 성리학자들 중, 실용주의 노선을 가졌던 정도전이 이성계와 편을 먹고 조선을 건국하려 했고 원리주의노선이었던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려했지만 정몽주는 죽고 고려는 멸망했으며 조선은 건국되지.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크게 관학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있었다.
관학파들은 실용적이었고 고려말 애국적인 성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고려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생각도 이어받았으며 세종대왕 시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신분적 융통성덕에 장영실이 등용되어 활약하기도 했지. 당시 원리주의자들이었던 사림파들은 고려에 충성을 운운하며 낙향해서 자신의 고향 등지에서 제자들을 길렀다.(이게 나중에 문제가 된다. 기억해)
관학파는 조선에 필요했고 관학파가 계속 주류였다면 우리역사가 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역사는 관학파가 몰락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관학파 중, 극단적인 왕실 충성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훈구파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조가 이 훈구파들과 손을 잡고 집권하는 와중에 다른 관학파들을 대거 숙청해버리지.
관학파의 숫자가 반토막나고 이후 관학파의 숫자는 회복하지 못한다. 그 자리를 채운게 사림파들이다.
사림파 1세대는 고려에 대한 충절 운운하며 낙향했지만 시간이 지나 세대교체가 되자 슬금슬금 조선 조정에 등판한다. 경쟁상대가 없어진 훈구대신들이 인하무인하게 정치를 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졍적인 이유로는 관학파의 인재풀이 적어졌기 때문이지.
사림은 사학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사화를 겪었음에도 수가 줄지 않으면서 꾸역꾸역 조선 조정의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시간이 갈 수럭 관학파의 수는 계속 줄었지.
결국 선조시기 관학파는 완전히 소멸했고, 사림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원리주의자들인 사림의 정신이 교조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관학파가 사라지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는데, (조식계여서)동인은 보다 실용적이었고 서인은 보다 원리주의적인 자들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 가장 실용적인 사림파인 북인들이 집권했으나, 원리주의자인 서인들이 북인들을 완전 발본색원해서 갈아버리고 집권하니, 이게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사실상 조선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건으로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즈그들의 성리학원리주의의 방침대로 사대주의노선을 타다가 호란을 맞이해서 개박살이 났는데, 임진왜란은 어쨌건 승리로 체면치례를 한 반면에 호란은 쓸데없는 짓하다가 일어난 전쟁에서 패전까지 하니 체면이고 권위고 전부 박살났다.
인조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서인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성리학을 교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한국 유교/성리학의 문제는 전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남녀차별이 심해지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강화되고 양반이 신분이 아니라 계층이되고 제사가 휘황찬란하고 복잡해지는 등. 문제점이 생겼지.
거기에 결정타를 날린게 송시열이다. 대한민국은 송시열을 북벌에 맞춰서 교육시키는지 모르겠는데, 송시열이 후손들을 망친 대표적 원리주의-교조주의자로 다른 학문을 죄다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조선의 과학기술을 퇴보시킨 장본인이다.
내가 위에 세종대왕 시기와 고종시기를 비교하며 세수를 못 걷는 등 이야기를 했지? 인구가 늘어나면 뭐해. 성리학만 아는 놈들이 인구도 제대로 파악 못해. 유효 농지파악도 제대로 못해. 수학도 못하니 세종기의 복잡한 수취방법을 할 수가 없지....
조선의 비극은 결국 원리주의-교조주의가 이긴 탓에 벌어진 비극이다. 노론소론도 서인들이 나뉜 고로 여기서부터는 설명할 필요가 없지....
조선이 개혁할 수 없었던 학문적 이유는 조선 후기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이 교조화되었고 다른 학문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을 가진 남인들이 흥선대원군 시기에 등용되어 면재배갑을 만들거나 증기선을 만들려고 시도도 하고 그랬지만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정치적으로 틀어지면서 흥선대원군이 축출당했고 남인들도 같이 쫓겨나갔기 때문에 실용학문을 배운 사람들이 조정에 다시 돌아오는 것은 개화기 이후가 되고 이 때는 좀 많이 늦었지.
사건을 연구하면 구조가 보인다.
조선사회의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려면 과거로 넘어가야해. 조선의 과학기술이 퇴보한 것은 지배이념인 성리학이 교조주의화되었기 때문이고 조선 성리학이 교조주의화되는 과정과 이 교조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조선이 퇴보하는 과정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걸 언제 다해?
그리고 [[내가 위에서 그냥 조선은 세금이 안 걷혀서 망했음]]이라고 걍 짤막하게 올리고 말았는데,
일본의 경우도 개화이전에는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고(당연하지, 학문은 본래 지배층의 전유물이고 공교육이 들어오기 전까지 국민들을 교육시킨다? 어떻게?) 상업이 조선보다 발전했던건 인정하지만 조선을 손쉽게 잡아먹을 정도로 자본주의가 발전한건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 조선과 같이 교조화된 특정한 이념에 경도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의 지배층도 피지배층도 교육상태는 좋지 않았으나, 빠르게 공교육제도를 설립해서 이것을 개선했지. 반면 조선은 공교육 제도를 들여오고 퍼지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어.
교육제도를 바꾸는 것은(교육제도를 바꾸면 관리 선발제도와 노동구조가 바뀐다.)교조화된 유림들의 이권을 뺏는 일이었기에 썩어도 지식인 계층인 유림들의 눈치를 봤기에 늦어졌고 조선 조정에 돈이 없었기에 공교육제도가 퍼지는게 늦었지.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1886년인데 교육기관이 전국에 퍼진건 1897년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조선의 상업도 이미 민족자본이 형성되었을 정도로 분명하게 발전단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형성과정이 늦어졌고 조선이 금본위제나 은본위제 도입이 늦어 소위 화폐정리산업으로 일본이 조선민족자본을 쓸어버렸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다. 없던것과 부족한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지.
군사개혁이든, 제도개혁이든, 교육개혁이든 돈이 없으면 못한다. 일본은 세금수취제도가 정상으로 돌아갔기에 군사개혁, 제도개혁, 교육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고.
조선의 경우 세금수취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말년에도 민란이 일어남은 물론 교육제도 개혁, 군사개혁, 제도개혁이 늦은 것이다. 뭐든지 돈(경제)이 없으면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지.
구조에 대하여 국가교육에서 평가하려면 확답을 내려줘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국가에서 원하는대로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주입할 수 있지. 우리나라가 사건 위주로 교육하는 것은 역사를 정부가 터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뭔 구조적인 교육이니 사건 위주의 교육이니 이야기하는데, 구조는 사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다만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역사교육이 부실한 것은 인정한다. 나는 한국, 국사교육의 문제점이 애매하게 가르치는데 있다고 보는데, 국가가 현 대한민국에 유리한 부분을 조명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
(예를 들어 평민의병장이 나오는건 구한말인데, 임진왜란의 의병이 마치 평민주도로 나타난 것처럼 착각하게 교육하는것. -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당쟁은 결국 성리학이 교조주의로 가는 과정인데, 이런 것은 안보여주고 다당제적 성격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둔 것도 문제다. 조선이 망하는 원인도 결국 인조새끼가 제공했는데, 국사 교육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저게 뭐 말 그대로 단순한 침략 야욕 막 이런거보단,
당시 대한제국은 (지금 한국도 그렇지만) 한중일 중 가장 인구가 적었고, 그래서 세입 자체가 적었음
그나마 대한제국 수립 이후 경제개혁으로 몇년동안 거의 3배 넘게 늘려버리긴 했는데 그래봐야 2000만도 안되는 인구 안에서 최대한 끌어 쓴거에 불과함. 그 전까지가 전근대적 행정력으로 미납되는 세금이 많았던거고
그런 상황에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이 수십만이었으니, 병신된 청을 상대로 (충분히 이길수 있었기에) 밀어서 거기서도 세금 걷는게 목표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