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지키려는 장수와 그를 의심하는 군왕이 있으니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의주부윤 이완과 조선의 16대 국왕 인조로 두명은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는 방식으로 충돌을 매주했다.


인조는 이완이 본인의 권위에 도전하는것 같다는 결론을 이완은 숙부가 목숨 바쳐가며 지켰던 나라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기위해 노력한 장수로 모함을 받아가면서까지 조선의 백성들을 지키고자했다.


1597년 이순신 장군과 선조의 갈등과 유사한 상황으로 인조와 의주부윤 이완의 갈등은 북방요충지 의주성 방위에서 비롯되는데 이완은 의주성에 대한 중앙조정의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의주부윤 이완은 의주성의 군사력과 방어력이 약하니 부디 군사들과 물자들을 보내달라는 요청과 성곽수리 예산지원을 인조에게 요청하는데 이건 이완의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이완은 의주부윤으로 재직하면서 후금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후금군의 1차상륙을 저지하는 요충지인 의주성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이를 말하면서 인조와 중앙조정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했다.


의주성의 상황은 최악으로 이괄의 난 이전 4~5천명의 토병들과 정예포수들이 지키던 성이었으나 반란으로 북방전력이 박살나면서 전력이 엄청나게 떨어져 성의 운명이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완이 정예포수들을 대거 모병해 3000명의 군사들을 확보했지만 의주성을 방어하는대 필요한 병력은 최소 5000명으로 그나마 이완이 모병한 3000명 군사들의 봉급 또한 오랫동안 지급되지 않고있었다.




비변사에서 의주부윤 이완의 지원요청안을 중앙조정에 올리면서 인조와 대신들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데 인조는 지금 조선의 재정이 엉망이니 풍년철에 의주성을 지원하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을했다.


김류는 더나아가 의주성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재정이 어려운 조선입장에서 의주성을 지원하는건 불가능하다는 애기로 차라리 안주성을 더 지원하자는 말을한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의주성은 후금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1차 방어선인데 그러한 요충지를 지원하지 않는다는건 위험하다며 척화를 하시려거든 의주성을 지원하시고 그런말을 하시라는 직언을 날린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이 건방진 발언을 한다며 조회에서 물러났고 의주부윤 이완에게는 의주성 따위는 내알빠 아니라는 알빠노를 시전하며 의주부윤 이완의 빡침을 샀는데 왜 숙부님이 받은 고통을 본인이 받게된다.





의주부윤 이완과 인조는 사실 몇년전 부터 갈등을 벌이고 있었는데 명나라군 장수 모문룡을 대하는 자세에서 두사람간의 갈등이 터져나온편으로 인조는 모문룡을 옹호하고 의주부윤 이완은 모문룡을 혐오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골칫거리로 모문룡의 군대는 가도에 주둔하며 조선백성들을 수탈하고 게다가 조선이 거두는 세입의 반이 모문룡 군대의 보급품으로 쓰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조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문룡을 극혐했다.


의주부윤 이완은 모문룡 군대의 패악을 유일하게 제지한 인물로 모문룡을 찾아가 고성을 지르며 싸우기도 했으며 심지어 행패를 부리는 모문룡의 수하들을 모조리 끌어내 모문룡 앞에서 곤장형을 집행하기도했다.


인조는 모문룡이 명나라 엄당세력의 지원을 받고 또한 자신이 명나라 조정에 책봉을 받게 도와준 인물이기에 모문룡을 옹호했으며 모문룡이 의주부윤 이완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모문룡의 편을들어 이완의 관직을 강등시켰다.


모문룡의 이간계성 장계는 허술하고 모문룡의 이미지가 쓰레기라 조정대신들은 장계를 무시했으나 인조만이 반응해 이완의 관직을 강등시켜 공신들과 대신들 모두 놀라고말았다.





1627년 1월 13일 후금군이 의주부윤 이완과 판관 최몽량 군사 3000명이 지키는 의주성을 공격하면서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후금군은 의주부윤 이완에게 항복을 권하는데 본인들 역시 충무공 가문의 일원을 죽이기 싫었기떄문이다.


이완이 이를 거부해 의주성 전투가 발발 후금군은 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의주성을 공격했지만 조선군은 1월 13일 후금군의 공세를 몇차례 막아내고 심지어 후금군 정예기병 100여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후금군의 경우 의주성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하자 당황했지만 곧바로 이괄의 난 잔당들의 도움을 받아 1월 14일 아침 의주성의 약점인 수구문을 집중공략하면서 마침내 의주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수구문은 사람들이 워낙에 많이 다니던 곳이러 이미 전쟁전 약점으로 지목되어 의주부윤 이완이 수구문을 수리할 비용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여러번했을 정도로 의주성의 약점으로 지목된 문이었다.






1627년 1월 14일 나라를 구하고자 고군분투한 의주부윤 이완은 향년 48세의 나이로 전사했으며 의주성이 함락되자 숙부님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창고에 불을질러 자결했다.


종전후에도 인조와 이완간의 갈등이 끝나지 않아 인조는 이완의 일가에게 아무런 포상과 시호를 하사하지 않았으며 인조가 죽은후 증손자인 숙종이 강민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추증하면서 이완 일가에게 포상을한다.


영조대에는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봉상의 요청에 아산 현충사에 위패가 봉안되었지만 유해는 형제들 부친 그리고 그토록 존경했던 숙부님이 잠들어계신 아산이 아닌 용인에 안장되었다.




인조가 3만의 군사들을 박아둔 안주성 역시 이틀만에 함락되면서 인조는 충격을 받아 졸도하는데 이유는 의주성을 버리고 안주성에 방어전력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안주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S급 공성전 실력을 선보이면서 조선군을 관광태웠고 3만의 조선군이 안주성 전투에서 소멸하고 평안병사 남이흥,안주목사 김준,구성부사 전상의가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하고만다.


이들은 평안도 방면 최고 군사지휘관들로 이들 모두가 전사하자 인조는 재빨리 강화도로 도망가기 시작했으며 평안병사 남이흥은 전사하기전 성상께서 내 간언을 받아들였다면 안주성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는 유언을 남기기도했다. 


최명길의 우려대로 결국 1차방어선인 의주성을 버리고 2,3차 방어선인 안주성에 군사력을 몰빵해 생긴 대참사로 인조는 더욱 스턴에 걸려 종전후 10년동안 전쟁준비는 안하고 그저 지아버지 추숭작업에만 매달리는 병크를 치게도는데 임용한 교수님,이세환 기자님은 이를보고 내 자기입장에서 생각하는지 의문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