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충무공의 조카 이완은 시대를 잘못태어난 충무공으로 버라어티한 일을 격었는데 가도에서 모문룡이 여자끼고 술먹고 백성들을 향해 행패를 부리자 바로 모문룡의 부하들을 잡아 곤장을 때려버린다.


모문룡은 격분했지만 모문룡 부대에게 당한게 많은 평안도 백성들의 민심이 이완에게 행하면서 이를 포착한 모문룡은 조선의 군왕에게 이자식이 군사를 키우고 있으니 압송하라는 장계를 올리게된다.


모문룡이 이러한 이유는 조선이 이괄의 난을 겪은지 얼마안되었기 때문에 군왕이나 조정모두 반란에 예민했으며 특히 민심을 얻는 변방의 장군들을 특히 경계했는데 게다가 민심을 얻은 장수는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의 조카였다.




조정대신들은 모문룡의 행패를 알았기에 군왕에게 어차히 모문룡의 간계이니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답했지만 이미 이괄의 난을 겪은 군왕은 이완에게 관직을 강등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다.


군왕이 관직강드을 명한이유는 모문룡이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된 인물이고 또한 명나라 조정 엄당세력의 보호를 받은 사람이기에 명나라와의 마찰을 우려한 조치라고 당시에는 항변했다.


실상은 의주와 평안도 민심이 이완에게 향하자 이괄의 난 재림을 우려한 군왕의 조치였으며 그후 군왕은 사태가 잠잠해지자 이완에게 다시 의주성을 방어하라는 어명을 내리게된다.





이완은 후금군의 침공을 대비해 정예포수들을 대거 모집 약 3000명의 군사들을 확보하며 의주성 방어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물자와 군사들이 부족하자 중앙조정에 지원을 요청한다.


비변사는 조정에 의주성 지원안을 올렸지만 군왕은 지금 조선의 재정이 파탄직전이고 의주성에 지원할 군사와 물자가 부족하니 풍년철에 지원하는것을 고려하겠다는 발언을했다.


최명길은 의주성은 후금군의 공격을 1차로 저지하는 방어선이니 지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군왕은 최명길의 발언의 세다며 최명길을 비난하고 어전을 급히 빠져나가게된다.






1627년 1월13일 후금군 3만명이 의주성을 공격하면서 정묘호란이 일어나는데 이완이 이끄는 조선군 3000명은 13일 후금군 3만명의 공세를 몇차례 막아내며 후금군 정예기병 100여기를 격파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그러나 의주성은 약점이 많았던 성으로 이괄의 난 잔당들이 의주성의 약점을 후금군에게 알려주었으며 후금군은 의주성을 정면공격하는 대신 우회해 의주성의 약점을 집중공략해 마침내 1월 14일 의주성을 함락시킨다.


조선군은 14일 아침까지 후금군 3만명의 크고 작은 공격을 몇차례 막아냈으나 결국 약점이 후금군에게 찔리면서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결국 의주성이 함락되었으며 조선군 3000명이 전멸하고 판관 최몽량이 후금군과 난전을 벌이다가 전사한다.




의주부윤 이완 역시 1627년 1월 14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전사했으며 칼부림에서 이완이 전사하자 후금군 지휘관은 의주성 전투의 승전을 두고 성주의 능력이 부족해서 진게 아니라 그가 모시는 조선의 군왕이 무능력해서 졌다는 발언을한다.


이완은 숙종대에 강민이라는 시호를 하사받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신은 사후 수습되어 용인시 고기동에 안장되었으며 위패는 영조대에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이완을 견제한 군왕은 조선의 16대 국왕 인조로 인조는 평안도에서 민심을 얻던 이완을 견제했으며 이는 결국 정묘호란과 의주성 함락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돌아왔으며 이완은 시대를 잘못태어난 충무공으로 불리고있다.


이완은 유능한 무장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세워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또한 유일하게 조선의 관리들중 모문룡 군대의 행패를 제어한 유일한 인물로 평안도 방면 백성들의 인망이 두터웠다.





인조,이완,의주성의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은 이결정은 결국 인조가 조부인 선조의 정치적인 머리를 이어받지 못한게 화근으로 선조의 경우 고도의 정치력으로 이순신 장군을 죽이지는 않았다.


정탁,이원익 같은 대신들이 이순신 장군을 편들어 주면서 임진년,정유년 조선은 멸망의 위기를 넘겼지만 안따깝게도 인조에게는 그러한 정치적인 머리는 있지않았으며 결국 이완,의주성 모두 파멸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즉 질투심만 가득한 군왕떄문에 이완은 의주성도 조선도 구하지못했으며 사후 군왕에게 충성에 대한 댓가 역시 받지못했으며 사후 숙종대에 겨우 시호와 벼슬 그리고 현충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칼부림에서 이괄,이완 모두 이순신 장군의 그늘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완은 의주성 전투 패전후 항복을 권유하는 강홍립에게 장수가 오직 해야할일은 적을맞아 싸우는것 뿐이라며 내가 그분께 배운건 그것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괄은 정충신과의 대화에서 조정이 지원을 하지않는것을 두고 정충신이 이순신은 전쟁에서 조정의 지원없이 수군을 재건했다는 말을하자 이괄은 나는 이순신이 아니야하는 발언을 정충신에게 한다.


이완은 숙부의 가르침을 받은덕분에 올바른 무관으로 성장했지만 인조라는 희대의 암군을 만나면서 비운의 영웅이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에게 자격지심이 강했던 이괄은 역적이 되어 목이잘리고 종국에는 가문마저 멸문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