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주동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생각과 달리,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한다. 이에 영국은 유사시 이탈리아 항만을 봉쇄하고자 위협적으로 기동 중이었던 지중해 함대를 물린 후

1915년 런던 밀약(Treaty of London)에 따라, 오스트리아 연해지대(Austrian Littoral)와 티롤 지방(Tyrol)을 약속하고 이탈리아의 참전을 이끌어낸다.

문제는 이탈리아 정치인들과 일반 이탈리아인의 인식은 서로 달랐다. 영국은 세르비아 왕국을 상대로 '바다로의 접근'을 약속했기에 오스트리아 연해지대에 속하는 '피우메' 양도를 약속했고, 이는 런던 밀약 당시 이탈리아 외교관들이 충분히 인지했지만,



일반 이탈리아인들은 당연히 피우메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연해지대 전체를 양도받을 것을 기대했기에 피우메를 전후 탄생한 세르보-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에 넘긴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우메를 둘러싼 불만은 전후 베르사유 조약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특히, 험준한 알프스 산맥에서 최선두에서 돌격대 역할을 맡은 아르디티(Arditi) 참전자를 위주로 '피를 흘린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지 못한 정부를 상대로 연일 불만을 토로하며 심심찮게 시위와 폭동을 유발했다.

참전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는 2선급 전선 취급받았지만, 그럼에도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며 나름대로 독일의 전력 분산을 이끌어냈는데 이따위 대가가 정당하냐며 성토했다.

이런 불만은 소위 '행동주의자'의 탄생을 낳는다.

극우 언론인이자 문학가, 미래주의자이자 아르디티 참전자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극우 활동가이자 유명 비행가, 군인인 에토레 무티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정신을 일본의 부시도와 결합하고자 시도한 일본인이자 아르디티 참전자인 시모이 하루키치 등등

민간과 전역자 사이에서 폭주하는 불만을 이용, 자신들의 활동 저변을 넓히고자 이를 이용함으로써


대망의 1919년 9월, 피우메 점령(Occupied of Fiume)사건이 발생한다.

사실 세르비아 또한 이탈리아의 불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영국의 중재가 아니었음 오헝 시절부터 잘 조성된 항구도시인 피우메를 이탈리아가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때문에 세르비아는 최소한의 공무원만 파견하고 군부대를 주둔 시키지 않음으로써 최대한 외교적으로 해결코자 했다. 물론 이것이 화근으로 작용했다.

피우메 점령을 주도한 단눈치오도 바보는 아니라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 언론사 기자를 대동하며 움직인 것이다.

점령은 군사 작전보단 일종의 퍼레이드에 가까웠다. 교전은 일절 발생하지 않았으며 에토레 무티가 주관하는 비행기 공중 곡예와 함께 2600여명 규모의 아르디티 전역자들의 행진이 전부였다.

점령에 성공한 단눈치오는 곧바로 이탈리아 정부에게 합병을 요구했다. 어짜피 정치적 퍼포먼스는 성공했으니 시마이 하고 끝내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분명 양측 합의에 의한 조약을 그깟 항구 도시 하나 먹자고 폐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합병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점차 부담되는 아르디티(이들은 이 시점부터 '단눈치오의 군단' 라고 불렸다) 주둔 비용과 난생 처음 경험하는 행정, 사무 등에 초조해진 단눈치오는

친분이 있던 이탈리아군 장군 '피에르토 바톨리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연히 바톨리오도 씹었다.

이에 1919년 12월, 단눈치오도 서서히 맛탱이가 가버린다. 편집증 증세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끝내 단눈치오는 이탈리아 정부를 완전히 불신하고, 임시로 붙인 '이탈리아 섭정국 피우메'를 폐기하고 '카르나로'란 새 국명을 만든 뒤

일종의 한국의 '기본 예절'과 개념이 비슷한, 이탈리아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폐기 선언(예절 포기 선언)을 비롯, 본인의 이상향을 구현코자 미래주의적 정책을 집행한다.

우선 최고의회를 해산하고 각 직종별로 8~9개로 분류한 뒤, 코포타리즘 통치 체제를 새롭게 도입했다. 이로서 기존 공무원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고 도시 행정은 마비된다.

다음으로 예술주의적 미래주의(Artistic Futurism)으로 분류되던 단눈치오인 만큼, 주요 직책에 예술가들을 초빙하고, 본인은 매일 시를 지어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점차 피우메, 아니 카르나로는 광기에 치닫기 시작했다.

국명도 뭐 자주 바꼈다. 카르나로도 처음에 잘 쓰다가 뜬금 피우메 노력국(Fiume Endeavor State)으로 바꾸더니 피우메 산업(Fiume Enterprise)로 또 바꿨다고 원상복귀 시키는 등, 뭐 개판이었다.

당연히 시민들은 탈출하고자 노력했다. 지상은 단눈치오 군단이 틀어막아서 가망이 없었고

해상으로 탈출하고자 밀수업자들이 대거 피우메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마피아들까지 피우메로 기어 들어온다.

결국 종국엔 피우메는 소돔과 고모라 수준의 향략 지옥으로 변한다. 곳곳에 마약과 난교 파티가 발생했으며, 단눈치오 군단은 시비가 붙은 상대를 총으로 쏴죽였다. 동시에 도시의 모든 방송국과 스피커엔 음악이 흘러나왔으며 마피아들은 대놓고 길거리에서 마약(아편)을 판매했다.





이 모든 난장판의 끝은 1920년 11월, 라팔로 조약에 따라 피우메를 중립지대인 피우메 자유국으로 독립 시키기로 이탈리아 - 세르비아 양측 합의가 이뤄지면서 끝났다.

세르비아의 암묵적 동의 하에 이탈리아군은 도시로 진입해 이 광기를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단눈치오 군단은 아편에 취한채 맹렬히 저항했지만, 물자 부족으로 총알이 다 떨어져 항복한다.

이때 전투가 엄청 치열했다. 단눈치오 군단은 수류탄을 비처럼 쏟아부으며 저항했고, 이탈리아군은 함대를 끌고 해상 포격까지 감행했을 정도

물론 중과부적이라 12월 28일 단눈치오는 피우메의 지도자 직책을 사임하고 항복, 12월 30일 이탈리아군이 완전히 피우메를 점령하면서 1년 동안의 광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원본:https://gall.dcinside.com/m/rome/915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