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의 모습]


나리타 공항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을 세우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제 허브 공항으로서의 야심을 품고 만든 공항이었다.



그런데 나리타 공항을 이용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리타 공항의 경비와 경찰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경비가 삼엄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나리타 투쟁 사진]


그것은 1960년대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나리타 투쟁 때문이다. 

(산리즈카 투쟁이라고도 함)







[사토 총리] 


1966년 일본은 우리나라가 인천공항을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 거대 국제공항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계획을 세운다.

꿈은 원대했고 마음은 급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정부가 건설 계획을 나리타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

나리타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안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공항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한 점에 있었다 (??)


적절한 보상을 위한 정책과 자금을 준비하지 않은 정부는 충분치 못한 보상액을 제시했고 도쿄 바로 옆 나리타인데 효고현의 땅값을 근거로 보상을 제시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에서 살고있었는데 저 멀리 강원도 같은곳의 땅값을 제시하며 보상해준다는 것. 애초에 돈을 받아도 떠나지 않으려는 주민들에게도 공권력을 행사하여 '나라가 큰일을 하려는 데 왜 국민이 협조하지 않느냐' 는 식의 고압적 태도로 주민들을 밀어붙였다. 


나리타 공항에 살던 지역민들의 상당수가 히키아게샤, 쉽게 말하면 2차대전기 일본제국의 식민지화 정책에 의해 일본 본토 밖에서 살다가 일본제국이 패망하면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귀국한 뒤부터 '내지인'들의 냉대와 일본 정부의 방치에 고통받다 겨우 정착하는데 성공하고 모범 농장으로 성장할 정도로 기반을 키운 도미사토의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주거지, 대체 토지, 적절한 보상금, 소음 문제 해결) 없이 떠나란 것은 죽으란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나리타 공항이 건설되니 나가라고 해도 당장 어디 가서 뭘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적절한 보상안을 제안하거나 합의점을 도출하려고 하기 보다는 나라에서 큰일을 하려고 하니

퇴거 해달라는 식으로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와 행태는 당연히 주민들의 큰 반발을 샀고 

이에 주민들은 어린이와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나서서 투쟁에 나선다.


https://youtu.be/fvi-K6Y5BVA



근데 일본 정부는 이들을 '공산주의자' '비국민'이라고 말하면서 물리적으로 저항운동을 찍어눌렀고

정부는 대집행 같은 반민주적인 강경 진압을 강행해 노약자들까지 폭력 혐의로 체포하고 사람이 들어가 있는 탑을 무너뜨려 버리는 등 끝까지 주민들을 무시하고 대화를 거부했으며, 이에 주민과 학생들은 토지 보상 자체를 거부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주민들의 엄청난 저항과 반발 속에서도 경찰력을 투입해 진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뉴스와 여론매체에는 머리가 깨지고 선혈이 낭자한채로 실려나가는 기동대원과 주민의 영상이 수차례 중계 되었다.


사망자가 양 측에서 끊임없이 나왔고 부상자는 그 수배였다.




여기에 꼴받은 일본 공산주의자들과 전공투는 일편단심으로 나리타 공항건설을 마찬가지로 무력으로 지원,반대하자고 결의.


https://youtu.be/C6mS7JkPHFM





[시위 중 돌격하는 주민들]


주민들은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고향을 지키기 위한 성격의 알박기를 하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합세해 1평 땅 사기 운동을 전개하며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했다. 

이 당시 투쟁은 경찰의 무력 진압 시도와 농민과 시위대의 목숨을 건 방어로 그야말로 전투에 가까웠다.





진압 불도저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 붙자 몸에 불이 붙은채 뛰쳐나오는 모습


[시위대가 설치한 탑을 사람이 있는채로 파괴하는 모습]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파괴하는 모습]



이러한 격렬한 시위와 투쟁 속에서도 일본 정부는 오직 나리타 공항의 빠른 개항을 목표로 경찰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 진압해 나간다.


결국 대부분의 주민들이 밀려나오고 어쩔 수 없이 정부와 합의하거나 저항을 포기하며 고향을 떠나가게 된다.


그리고 나리타 공항은 조금씩 건설되었고 결국 그 개항을 앞두고 있었다.



https://youtu.be/wY0cjgtGBXQ


그리고 이에 열받은 전공투,일본 공산주의자는 시위대를 결사의 각오로 지원하기로 결의. 전공투와 일본 공산주의자 주민 연합은 

이에 반격할것을 결의했다.그리고 결사를 각오한 투쟁단을 모아 결사대 수천이 모였다.

[헬멧을 쓴 결사대, 헬멧에 새겨진 글귀와 마크에서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985년 10월 20일 국제공항의 2기 건설을 반대하는 대규모 총궐기 집회가 일어났다.

3900명이 참여한 집회에서 오후 네시 경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을 비롯한 여러 당파가 '이전처럼 또 질 수는 없다' 며 철저한 항전을 약속하고 집회 예정 몇 주전 땅속과 관목속에 숨겨둔 쇠파이프, 죽창, 깃발, 화염병 등을 꺼내어 참가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4시 22분 1000명단위의 무장한 중핵파와 농민들은 교차로에 있는 경찰 저지선을 통나무로 뚫고 기동대를 공격했다.


저지선이 뚫리자 경찰 기동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경찰이 다시 저지선을 세우려 하자

시위대는 화염병과 자갈을 던지고 낙오된 경찰 병력을 구타하는 등 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일본 시위대가 통나무를 이용, 경찰 저지선을 붕괴시키는 장면]



[불타는 경찰 차량]




동 시각, 나리타 공항에서는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구성원들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과 가짜 신분증으로 경찰의 검문을 통과하고 공항 내로 진입하여

5시 35분경 공항 여객 터미널 빌딩 주차장에서 자신이 타고 온 차량 외 1대, 총 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또한 화염방사기와 산탄총으로 무장한 결사대가 위장 소방차 2대를 방화 사건의 소화 활동 명목으로 경찰을 속여 진입했다.


관제탑 앞에 위장 소방차 1대를 정지시키고 시한장치를 작동시킨 이후 다른 위장 소방차로 도주했다.


약 8분후 소방 호스 노즐로 위장한 산탄총의 화약으로 한번에 200개 가량의 구슬탄이 발사되어 관제탑과 유리창이 파괴된다.


화염방사기는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아 관제탑이 불타지는 않았으나 타고온 위장 소방차에 불이 붙었다. 




[점거된 관제탑에서 삐라가 날리는 모습]


그 후, 결국 세계적 비판을 받은 일본 정부는 국가의 위신이 손상돼어 땅에 떨어지고.

일본 정부는 결국 대화에 나설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1966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치열한 시위 끝에 

일본 정부는 농민들과 대화를 시작했고, 사망한 시위자들과 고통을 입은 농민들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지면서 충돌은 잦아 들었다.


1995년 이후에는 공항2기 공사에 쓸 토지 매수에 응하는 농민들도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에 좆같음을 느낀 유가족과 시위대,결사대등 토지 이전에 응하지 않는 주민과 시위 단체들이 여전히 있어 공항은 결국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했고(이미 죽은 가족은 안 돌아오니까)


시위 단체와 주민들 일부는 여전히 공항 내 자신의 땅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도 정부와 시위대,주민들은 지금까지 싸우고있다.


결론적으로 나리타 공항은 처음 계획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고 

반쪽 짜리 공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나리타 공항 2 활주로는 기존 계획의 2/3도 안되는 길이로 지어지고


3 활주로는 아예 활주로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에도 공항 내에 주택이 있다.


투쟁과 그 결과로 인해 나리타 공항은 기존의 반도 안되는 활주로와 용량을 갖게 되었고 


측풍이 강해 심심하면 고 어라운드(항공기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착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착륙을 포기하고 재상승하는 동작)가 나오게 된다.


일본 정부도 나리타 공항과 하네다 공항의 기능을 강화하고 여전히 눈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공항 부지 내 주택과 주민들을 몰아내고 공항을 고치려 했지만


현재 부지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과거 나리타 공성전의 기억으로 인해 정부에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고


나리타 시위 자체도 아직 현재 진행중 인지라 제대로 된 협상도 못해보고 물러나게 된다.


만약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보상과 협의를 거쳐 나리타 공항을 계획대로 완성했다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가진 나리타 공항 덕에 인천공항은 반사 이익을 상당히 많이 봤고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소화할 수 없는 물량이 모두 인천으로 몰릴수밖에 없었고

허브 공항으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게 된다. 

https://youtu.be/2RqfqSI_Yc0



https://youtu.be/lJc4IzGUroE




나리타 투쟁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한국 인천국제공항의 대성공에 꼴받은 일본 정부는 아직도 시위대를 다 밀어버리려고 하는중이고 주민들과 일본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결사의 각오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