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시절까지 전라도 지역 토후들은 가야마냥 독자 세력에 가까웠는데, 대강 백제가 한성 뜯기고 충청도로 쫓겨난 이후에는 복속당한 걸로 암. 물론 완전 복속은 아니었긴 한데...
어쨌든 호남 지역 생산력을 흡수함으로서 백제가 한강 유역 털린 이후에도 고구려 상대할 역량을 보존할 수 있지 않았나 싶음
10년(40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29]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 ... (이하 내용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나랏일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복구(僕句) ... 조공하였다.
14년(40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 이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요해처를 끊고 (적을) 소탕하니, 왜구(倭寇)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17년(407년) 정미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1만여 벌이며, 군수물자와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住城), ▨城▨▨▨▨那▨城을 파하였다.
광개토태왕비 내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