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전만 하더라도 주변에 한 두개씩은 있었던 사진관은 점점 사라져 보기 힘들어지더니, 이제 사진관의 역할을 대부분 대체하기 시작한 스티커 사진방이 사진관의 자리를 빼앗은 듯 보였다.


안에 들어오니 어리고 활기찬 여학생들이 서로 웃고 떠들며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괜히 속으로 귀엽다 생각하며 이곳저곳 둘러보다 사진 부스를 찾아 커튼을 젖혀 안으로 들어간다.


가격표 따위는 어느 곳에도 써져 있지 않았고, 사진 기계엔 천 원짜리 입출구와 카드 인식기만이 존재할 뿐이었기에, 지갑을 꺼내 대충 가격을 어림짐작하여 돈을 넣어봤다.


이천원이면 찍을 줄 알았지만, 그럼에도 반응이 없자 핸드폰을 꺼내 페이를 대보아도 반응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게 주인에게 전화해봐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 디스플레이를 터치해도 바탕화면에서 반응이 없는 사진 기계에 멍하니 방법을 생각하고자 하니, 옆 부스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자리를 옮겨보았다.


톡. 톡. 톡.


가격표가 없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돈을 넣었던 기계가 망가졌었을 뿐. 2천원을 넣어놨지만 가게 주인에게 전화해서 다시 돌려받을 정도로 필요한 금액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젓고 다시 디스플레이를 터치해가며 단계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진 찍는 시간이 다가왔고, 리모컨을 가져와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방향을 쳐다보니 그제야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9살부터 30대의 직장인이 되기까지 쉰 적 없이 달려왔다.


회사산업요원이란 이름 아래 군대도 가지 않고, 고향인 강원도를 떠나 회사인 인천으로 와서 아는 이 없이 얼마나 정신없이 일했는가?


52시간이 정해지기 전까진 주7일중 5일을 야근했고, 토요일과 일요일도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였다.


지방에서 내려온 나에게 만날 친구따윈 없었고, 망설임없이 취직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올 정도로 고향엔 미련도, 친구도 없었으니.


거울을 볼 시간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일하고, 또 일했다.

 

같이 취직했던 입사 동기 5명은 모두 회사를 그만두고 더 쉬운 곳을 찾아 떠났지만, 난 자리를 지켰고, 그렇기에 20대 중반이란 어린 나이에 생산 팀 하나의 팀장이 되어 사람들을 이끌었다.


털갈이 시즌이 온 동물처럼 풍성하고, 햇빛을 받은 이슬이 얹혀져 있던 풀처럼 반짝이던 머리카락은 빠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친 형은 부사관이 된다며 하사가 되겠다던 친 형은 하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나에게 돈이 없다 하며 돈을 빌려달라며 부탁했다.


어릴때부터 어른들에게 웃는 상이라며 웃으며 꼬집혔던 볼은 이제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카메라를 향해 웃는 얼굴을 애써 만들어보았지만, 그 결과물은 웃는 것도, 웃지 않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무언가였기에 포기하고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우리 형제가 어릴 때, 사이비에 빠져 어머니가 돈을 들고 도망쳤을 때도, 흔들림 없이 우리들을 키웠던 아버지가 전역을 했다고 연락을 했다.


언제나 든든했던 아버지였지만, 사고를 쳐서 내가 모았던 돈 대부분을 빼내서 사건을 수습했을 땐, 아버지가 그렇게 미워보였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야근이 끝난 후에 공부 카페에 가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새벽까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너무나 생기 넘친다고 할머니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저 카메라 너머의 나는 정말 내가 맞는걸까?


[사진 촬영이 끝났습니다. 인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내 마지막 기억 속의 내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어 버린 지금의 내 사진을 보며,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인화가 끝난 사진을 챙기고 사진 부스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손이 무척이나 시린 추운 바람이 부는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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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필요해서 사진 부스 들어가서 사진찍다 갑자기 든 생각이 깊어져서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