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 15년(1175년) 9월 13일.


대금국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현 베이징).



폐주 해릉서인(해릉양왕)이 금의 초기 도읍이었던 상경 회령부(上京 會寧府, 현 하얼빈)에서 옛 거란의 남경 석진부(南京 析津府)를 중도 대흥부로 고쳐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이래, 금의 도읍은 이 연경으로 정해졌다.


본디 해릉왕을 폐위시키고 보위에 오른 완안옹(금나라 세종)은 이전 도읍인 상경 회령부로의 재천도를 고려했으나, 상경은 만주 지역에 너무 처져 있어 중원을 관리하기에는 너무 멀었고, 여진 호족의 세력이 지나치게 뻗쳐 있어 국가의 이익에도, 군권(君權)을 강화키에도 좋지 못하였다.


반면 중도는 만주와 중원의 중간에 위치해 두 곳을 모두 수월하게 관할할 수 있었고, 여진 호족들의 세력 또한 미미하여 군권(君權)을 수월히 강화케 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완안옹은 다시금 상경으로 재천도를 주청하는 신료들을 무시하고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자 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니, 상경으로의 재천도를 주창했던 신료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대부분 나가떨어졌다.


단 한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끼익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 하던가, 마침 황제가 정무를 보고 있던 정전에, 그 한명이 황제의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황상 폐하,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리 면대를 청하나이다."


"상경으로의 재천도를 말하는 것이겠구려? 이미 조정의 중지는 이 중도를 새 도읍으로 정하는 것으로 모아졌거늘, 경은 어찌 그리 고집이 강하시오?"


그러나, 황제의 앞에 엎드린 신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신이 오늘 폐하께 나아간 까닭은 그러한 것을 주청키 위함이 아닙니다, 고려에서 사신이 왔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신이?"


황제는 눈을 크게 뜨며, 의외라는 듯이 답했다. 국초에 이미 고려 국왕을 책봉하였는데,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다시 사신을 보낸단 말인가?


그런 황제의 심기를 읽었는지, 산하는 다시 말을 덧붙여 말했다.


"정확히는 현재 고려의 서경(西京, 현 평양)에서 농성하고 있는 서경유수 조위총이 보낸 사신입니다."


그러고선, 신하는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 쥐고 있던 표문(表文,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표문의 양 끝 둥근 부분을 두 손으로 집어 펼치고는 표문을 읽어나갔다. 


'신 고려국 서경유수 위총은 삼가 대금국 황제 폐하께 글을 바칩니다. 


번방(蕃邦, 번국을 이르는 말)의 보잘것 없는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 즉 고려 국왕의 신하)이 감히 황제 폐하께 글을 바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삼한의 형세는 역적들이 날뛰어 전왕(의종)을 시해하며 상국을 속여 보위를 강제로 왕제(왕의 동생, 고려 명종)에게 넘기어 반역자들이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신은 그들의 죄를 토벌하고자 의로운 군사를 일으켰으나 부끄럽게도 힘에 부쳐 서경에 고립되었으니 상국(금나라)의 성스러운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4년 전부터 저희 삼한에서 발생한 역변 때문입니다. 대정 10년(1170년) 8월 우리 전왕이 보현원에 놀러 가자, 대장군 정중부, 낭장 이의방 등이 무뢰배를 이끌고 반역을 일으켜 신하를 모두 죽이고 왕을 폐한 후, 전왕의 동생 익양공(고려 명종)을 보위에 올리고 마치 전왕이 병으로 양위한 것처럼 꾸며 상국에 표를 올렸나이다.


이후 3년 전인 대정 13년(1173년)에는 역적 정중부 등이 사람을 보내 전왕과 그 자손 및 관료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대정 14년(1174년)에는 신 위총이 국왕에게 글을 올려 정중부 등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금년 정월에 국왕이 악한 신하를 이미 사형에 처했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에 신이 더 이상 분기를 참지 못해 반역자들을 쳐 없애고자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이의방 등을 죽인 후 국왕에게 보고도 않고 군사 3만여 명을 동원해 서경을 공격해 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으나 지금까지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신 위총은 금년 6월에 서북면 마흔여 개 성을 상국에 바치고자, 의주도령 최경약을 파속로 총관부에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의주(현 평안북도 의주군)의 관문에 이르러 정백신 등에게 살해되었으며, 또한 정균 등의 군대가 금나라로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사 김존심과 조규 등 각 서른 여명을 바다길로 금나라에 보내 사정을 하였는데, 아직 신이 비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신의 서신에 답신을 보내 주시고 소방(작은 번방)을 징치하는 군사를 같이 내려보내 주신다면, 신은 서북면 40여 개 성을 상국에 바치고 천병(天兵, 천자국의 군대를 제후의 입장에서 부르는 말)과 합해 반역자들을 쳐부수리니, 청컨대 황제 폐하께서 신의 서신에 비답을 내려 주신다면 바랄 일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