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에서 긁어옴 평가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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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재평가 논란에 대해 서술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대한민국의 국가형성기를 이끌었으며, 한국전쟁이라는 국난을 겪고,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까지, 수 많은 업적과 실책을 남긴 인물로써, 그는 대한민국 역사의 거인으로 꼽히며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였다.


이승만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그의 재임 시절부터 간단 명료하였다, <외교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인데, 이승만 시대부터 군부독재시절까지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으며, 귀신같은 외교로 나라를 세우고 전쟁통의 나라를 구했으나, 등신같은 인사와 통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뜻으로 이승만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평가는 비록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반공이데올로기가 국민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평가가 뒤집어진 사건은 1979년 발행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 운동권과 진보진영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발생하였는데, 베트남 전쟁등의 영향으로 반미사상이 유행하게 되었고,이승만의 국가건설의 공 마저 완전히 부정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된다. 이들은 이승만과 미국 때문에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친일파들이 국내에 득새하여, 국가 건설의 첫 단추마저 잘못되었다라는 인식을 공유하였으며, 이승만의 독립 활동마저 격하하였고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는 주장까지 발생한다.


추후 이를 반박하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발간되고, 이들 저자 중 일부가, 현재 이승만 미화 [2]에 앞장서는 뉴라이트로 분열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뉴라이트가 보수세력 내에서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3] 이런 대립은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학술적이 아닌, 사상대결 및 정치대결까지 확대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승만에 대한 온갖 왜곡과 미화, 격하가 수 없이 교차되게 되어, 평가가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중립적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시도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보수 진영의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김영상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태동하였다. 군부독재정권이 몰락한 이후, 운동권이 주축이된 역사인식이 유행하면서, 일부 보수 언론들은 이승만 재평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일보의 방우영 회장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라는 특별전을 기획하였는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여기에 방문하면서 당시 역사학계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4] [5]

●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를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한 후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

초대 대통령이 나라를 세운 발자취를 14대 대통령으로 둘러본 것은 여러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를 너무 부정적 측면에서 보는 시각들이 많으나, 이 박사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북한의 침략을

받고도 나라를 지키고 한미안보조약으로 오늘날 안보의 초석을 마련하는 등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김대통령(김영삼)도

인지하고 있다.

당시 관계자의 이러한 발언은, 운동권 이전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 <외교는 귀신, 정치는 등신> 이라는 평가를 계승하는 성격으로 국가 형성의 공적은 인지한다는 의미였으나, 학자들은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다음을 이유로써 이승만 재평가가 발생했다고 격하하였다.


● <'이승만 재평가' 에 대한 기동성 있는 응전> 발췌. 1995년 3월

분단 덕에 부와 권세를 누린 자들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여 분단 50주년의 해에 민족 배신자 이승만을 해방, 독립 투사로

둔갑시켜보겠다고 설치고 있으니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 [6]

토론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이유는 다음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게 된다.

1. 남북대결을 지양하여 화해, 협력으로 나아가는 탈냉전을 거부하고 다시금 냉전구도로 나가겠다는 회귀음모를 꾸미는 세력이

있다.

2. 역대 독재자들로부터 막강한 혜택 누려온 보수 언론사들의 자기방어에 기인한다.

3. 통일 과정에서 남쪽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겠다는 표현이다.

4. 현 정부 (*당시 김영삼)의 개혁노선에 반발하는 보수세력의 반동적 형태 때문이다.

5. 이승만과 인연인는 몇몇 언론인들과 인맥들의 부추김, 대재벌 언론들의 오만과 불손 탓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 자체를 보수세력의 준동 뿐 아니라, 친일적, 반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반대급부에 있던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 또한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 아니였는데, 이들 중에는 운동권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과 뉴라이트로 발전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역사의 기승전결론>을 주장했다. 이승만이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박정희가 이를 계승 발전시켰고 5, 6공을 통해 전개되다가 김영삼에 이르러 문민정부로 꽃피어 완성된다는 단계발전론이 핵심 사상이다. 자세한 내용과 비판점은 뉴라이트 참조.


김영삼 정부 이후에 출범된 김대중 정부는 역사 화해의 명분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나섰으며, 1992년 12월 국회에서도 이승만 동상 건립 안건이 통과되는 등 관대한 움직임을 이어나가지만 [7], 당시 이 안건에 반대한 의원 중 한명은 노무현 대통령으로, 재임 당시 보도연맹학살사건에 관련한 국가의 사과 및 조사가 벌어지는 등, 이승만 재평가 움직임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움츠려들게 되었고 이후 재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이어서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 이승만 기념관 논란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치적 움직임과 별개로 1990년대 이후, 이승만에 대한 학문적인 긍정적/부정적 재평가의 움직임도 자연스레 발생하였다.[8] 대표적인 사례가 남침유도론의 폐지인데, 정병준 교수는 2006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을 집필하면서, 북한노획문서, 소련문서, 남한(한국)문서을 참조하여 전쟁형성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으며, 해방정국과 이승만에 대한 여러 평가가 뒤바뀌게 된 사례 중 하나이다.

● 정진아 [9] - <이승만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과 정책론을 연구합니다"

"그 당시에도 경제 정책이라는 게 있었습니까?"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을 연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어떤 정권이라도 집권하면 당연히

정책의 논리를 세우고 그에 바탕한 경제 정책을 수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당연한 전제가 이승만 정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 2008년 현재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 진행 중이다. '건국의 아버지' 평가부터 '분단의 주역' 이라는

평가까지, '친미 사대주의자' 평가 부터 '자주적 내셔널리스트' 라는 평가까지, 박정희와 더불어 그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넘나드는 정치인도 드물다.

2000년대 이후에도 학계에서는 이승만 시대에 대한 연구 및 재평가[10]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나, 사상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에, 역자학자들이 선뜻 긍정적/부정적 재평가 논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을 억누르고, 이미 발견된 사실, 사료를 왜곡/조작/미화하는 등 소모성 논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평가는 방대한 행적과 인물의 복잡성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화되고 일반화된 접근이 대두되고 있어, 과는 과대로, 공은 공대로 제대로 평가되기 힘든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