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거프리


한번 토론해 봅시다.


창 2:16-17.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자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무의 열매"를 식량으로 주십니다. 열매란, 먹히기 위해, 그리고 먹고 나서 배출되는 씨앗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생명의 작용입니다. 식량을 취하고, 먹고 싸고 소비하는 과정에서도 서로 해치지 않는 상생의 모습입니다.


그럼 타락 이후의 모습을 봅시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뭘까요? 식물이 이제부터는 "자기방어"를 위한 형태를 띕니다. 이전에 열매는 먹히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동물이 먹기 좋기 위한 형태를 띄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엔, 하나님이 열매가 아니라 식물 자체를 먹으라고 하시고, 식물은 이제 동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약육강식, 먹고 먹히는 생물과의 관계가 시작입니다.


즉,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자기 방어도 타락으로 인한 원죄 이전에는 불필요한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다른 생명체와 유기체를 숙주로 생명을 취해야만 생존이 가능해졌고, 그 세균들로 인해 다른 동물도 질병으로 고생하고 "죽습니다." 다른 생명체를 죽여야만 생존이 가능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순환은, 원죄 위에 지어진 프레임워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명이 생명을 취하고, 생존을 위해 자기방어를 통해 남을 죽여야 하는 군인, 경찰,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도 죄이니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까? 


그건 아니죠. 


원죄에서 비롯된 죄가 죄를 낳는 삶의 굴레는, 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환 속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탄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굴레를 깰 수 없는 것을 아는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 아닙니까. 마치 "통장 잔고가 충분하니 커피 한 잔은 사먹을 수 있겠지" 생각하고 직불카드 긁었더니 잔고 부족이 뜨는 상황의 마음처럼.


그리고 그렇게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누구를 보며 도움을 구하느냐가 기독교인에게 가장 큰 과제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정말 "답이 없다." 이 약육강식의 생존 논리를 벗어날 길이 없고, 누군가 이것을 뒤집어야 한다. 새로운 나라가 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볼 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