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s://pgr21.com/freedom/101217


한국인에게 경제에 대한 이미지는 '제조업'과 '수출'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앞으로 경제 성장을 이어나갈 방법을 묻는다면? 대다수는 최첨단 산업(반도체, 배터리 등)의 공장이 지어지고, 수많은 물건이 배로 수출되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우리 머릿속엔 제조와 수출이 뿌리 박혀 있다.


서비스업 위주의 성장? 아마 많이들 갸우뚱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서비스업은 어디까지나 제조업을 통해 만든 물건을 유통하거나, 제조업을 통해 벌어 들인 돈으로 유지되는 제조업에 종속된 산업이다. 서비스업 그 자체가 성장 동력, 주역이 된다는 상황 자체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내수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버는 산업이라 해도 내수용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왠지 (우리 경제에 별 도움 안되는) 한 단계 낮은 취급을 받고, 규모가 작더라도 수출 위주로 산업이라면 왠지 건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내수산업이라 불리는 산업들도 기를 쓰고 수출, 해외 판로를 찾아 나선다. 사실 본질적으로 외국에 파나 국내에 파나 똑같은 건데도.


사실 이런 인식은 당연할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풍족한 나라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세탁기, 냉장고, TV, 자동차 등을 집집마다 갖추게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으며, 갖췄다고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성능을 누리게 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여태까지 돈을 벌면 필수적인 물건들을 사고, 더 벌면 물건을 업그레이드 하는 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렇기에 '소비'는 '물건', 특히 '내구재'에 쓰는 것이라는 관념이 뿌리박힐 수밖에 없다.


내수 또한 마찬가지로, 가난한 나라 안에서 어떻게든 팔아먹으려 애쓰기보단, 그냥 이미 부유한 선진국에 돈 받고 물건 파는 게 더 간단하면서 수지도 더 잘 맞는 장사였다. 이런 수출 위주 사고방식은 위의 제조업 위주 사고방식과도 잘 맞다. 보통 수출은 서비스보다는 물건 위주로 이루어지니까. 그래서 그동안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경제란 물건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 제조업이라는 인식이 뿌리 박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물건' 위주의 소비를 하기엔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춰버렸다. 온갖 가전제품, 자동차 등은 이미 당연한듯이 갖췄고, 그 성능 또한 올라온지 오래다. 브라운관 TV에서 LED TV로 넘어가는 건 충격적인 변화일수밖에 없지만 65인치에서 75인치로 넘어가는 건 감흥이 덜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가전제품도, 자동차도 이젠 몇 년 지난 값싼 중고를 사더라도 성능이 부족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어디에 돈을 써야 하는가?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미친듯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명품을 사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국내에선 딱히 돈을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웬만한 물건은 다 갖췄고, 그렇다고 딱히 국내에서 돈 쓸 곳은 마땅찮고... 그렇게 갈 곳 없이 쌓인 돈이 해외여행으로, 명품으로 흐르는 것이다.


경제란 돈을 쓰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못한다. 어떻게든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 소비의 본질인 것이다. 꼭 거창한 제조업, 수출 뿐만 아니라. 내수 얘기 하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인 '1억 내수론'(최근에는 좀 덜 쓰이는 분위기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구가 적어 시장이 협소해서 수출로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같은 저평가도 그렇다.


세상에 1인당 GDP가 3만 달러가 넘고 인구 5천만인 나라의 내수가 작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한국인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소비할 여력이 있다. 단지 아직 예전 사고방식이 남아 깨닫고 있지 못할 뿐. 아무튼 나는 단순히 물건 찍어 소비하여 성장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사람의 지갑을 열게 만들 것이냐?


내 대답은 바로 가챠다. 농담이 아니다. 나는 가챠겜만큼 사람이 너그럽게 지갑을 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점심값 7, 8천원에 벌벌 떨고, 다이소를 애용하면서도 10연챠 3.3만원은 쉽게 딸깍 딸깍 하며 천장 치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한 10년 전만 해도 많이들 부정적으로 봤다. '데이터 쪼가리에 왜 돈을 씀?'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물질계에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가이다.


좀 생소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책이나 영화 보고 감동 받는 것과 차이도 없지 않는가. 책은 뭐 폐지로 팔면 몇십원밖에 더 주나? 영화 파일은? 중요한 건 그 내용물이 주는 만족이다. 씹덕겜의 굿즈 또한 마찬가지다. 그냥 보면 무슨 허술한 아크릴 쪼가리나, 종이에 그림 좀 인쇄한 것, 평범한 컵에 캐릭터 프린팅 좀 한 걸 몇 만원씩 받아 먹는다. 이건 사기인가? 아니다.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고부가가치 상품'인 것이다.


이는 한계에 다다른 제조업에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다. 이게 그 학자들이 말하던 '고부가가치 다품종 소량생산' 아닌가? 우리는 항상 이쪽에 약하다. 한국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흔히 스스로 내리는 평가 중 하나인 '하드웨어엔 강하나 소프트웨어에 약하다'가 여기도 적용 되는 것이다. 한국산 오타쿠 게임 치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드물다. 아직까지 외적인 것에 집착해서 그런지, 소비자의 욕구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만족시켜야한다는 문제의식과 마음가짐이 부족한 탓이다. 그래도 요새는 블루 아카이브랄지, 니케 등이 나오는 걸 보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리니지도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냥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단지 확장성과 지속성이 떨어질 뿐...)


씹덕겜과 굿즈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것도 비슷하다. 가장 비슷한 건 아마 아이돌판일 거고, 공연, 스포츠 등도 비슷하다. 공연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한 경제활동이다. 최근 미국 경제를 논할때 테일러 스위프트 공연의 파급효과는 전세계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지 않는가? 일본에서도 공연 문화가 발전되어있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멀리 나갈것도 없이 미국 자본주의의 축제 중 하나라는 슈퍼볼도 사실 미식축구 경기 아닌가? 단순히 경기 표값을 넘어서 스포츠를 보며 음식을 시키고, 지역 식당에 가고, 굿즈를 소비하고 있다. 그 자체로 지역 경제의 활력을 돋구는 요소다. 거기에 들러붙은 수많은 광고와 유관 산업은 덤이다. 꼭 관람이 아니더라도, 지역 스포츠가 활성화 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밖에 나가서 즐기면 돈을 쓸 거 아닌가?


길게 말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우리 경제는 앞으로 단순히 '제조'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에도 초점을 맞춰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여태까지 제조와 수출에 가려져 홀대받던 '내수시장', 아니, 우리가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더욱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서비스업이라는 게 뭐 별 거 아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즐기면 그게 서비스업이지.


나는 한국인들이 더더욱 인생을 즐겼으면 좋겠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놀고 돈 쓰고 돈 벌고 하면 즐겁지 않은가. 경제도 잘 돌아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