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대략 3년 간의 군정 시기가 끝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5.10선거에서 다수당을 획득한 한민당의 협조 하에 손쉽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은 내각 편성을 위해 곧바로 한민당을 배제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이는 1948년 6월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 초안을 작성할 때 이승만과 한민당과의 의견 차이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민당은 헌법 조항에 내각책임제를 넣을 것을 원했고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원했다


이 가운데 한민당은 5.10총선에서 승리한 이래 의원직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내 의원들의 권력을 강화시킬 내각책임제는 한민당에게 있어선 반드시 필요하였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올리되 직권은 국가원수에 한하고 의회 내 다수당으로써 정부 내각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를 리 없었던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로 바꾸기 위하여 1948년 6월 15일 기초위에 참석하여 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바꿀 것을 요구했고 이어 21일에는 내각책임제 헌법이 채택된다면 자신은 정부 구성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강력한 대응으로 당황한 한민당은 21일 당일 헌법을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하였다. 다만 그렇다 해서 한민당의 목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하면서 대통령 선출을 간선제로, 국무원을 '합의체 의결기관'으로 규정했고 또 국무와 관련된 모든 문서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를 명시하였다.


이는 정부 행정에 대한 국회의 개입을 합법화시키고 아울러 정부 행정의 책임을 내각에게 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민당은 비록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함과 동시에 대통령의 권력행사에 상당한 제약을 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한민당을 내각에서 배제하였다. 비록 한민당은 이승만의 뜻을 수용했지만 여전히 내각책임제를 원하고 있었고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원했던 그에게는 사실상 적이었다. 이후 한민당은 김성수를 포함한 총 7명의 입각자 명단을 이승만에게 제출했으나 이승만과 무소속구락부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이북출신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내정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마치 폭넓은 기반 위에 수립되었음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또한 국무총리직 자체를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미에서의 권한 없는 총리”로 보았기 때문에 정치적 뒷배경이 없는 청렴한 정치인으로 구성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윤영의 내정은 한민당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고 이승만은 다음 후계자로써 이범석을 내정한 뒤 한민당의 용인 하에 이범석을 국무총리/국방부장관직에 등용시켰다. 이어 이승만은 내무부장관에 윤치영, 외무부장관에 장택상, 상공부장관에 임영신 등 친이승만 계열 정치인들을 내각에 입각시키도록 시도했고 그 결과 전부 성공하여 한민당을 내각에서 배제하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내각에서 완전히 소외 당한 한민당은 곧바로 반이승만으로 전향해 이승만 정부를 대대적으로 압박하고 나섰고 이와 함께 국회 소장파의 협공까지 당하다 보니 이승만은 의회 내에 있어서 수세적인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공세는 이승만 개인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당장 한민당이 내각책임제 개헌론을 지지하고 나섰고 나아가 내무부장관 윤치영을 실각시키기 위한 한민당의 각종 정치공세가 개시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이승만은 더욱 더 불리해졌다. 여순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론이 커지면서 한민당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승만은 내무부장관 윤치영을 한민당계인 신성모로 교체하면서 마침내 한민당의 대정부공세는 성공을 거뒀다.


이후 한민당과 이승만은 한민당이 정부 내각을 대다수 차지하는 조건으로 또다시 제휴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한민당의 대정부공세는 마침내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한에 대한 공세인데 본래 이승만은 강경한 북진통일론자로 정부 수립 직후 곧바로 북한을 적대시하는 입장을 보이며 군사적인 충돌을 자주 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1948년 10월 초순에 계획된 육군 특별경비대 조직안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대북공세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특별경비대와 해주사건

야범석


1948년 10월 4일 로버츠 준장의 서한에서 확인이 가능한 육군 특별경비대란 38선 담당 경비부대로 특이하게도 국방부 산하 조직이 아닌 내무부 산하 특별부대이다. 특별경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하에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주요 구성원은 우익청년단원, 퇴역군인이었으며 경비대장은 김석원이었다.


당시 특별경비대는 단순한 국경경비를 담당하는 것이 아닌 국경을 넘어 이북을 침범할 수 있는 공세지향적인 부대였으므로 그 위험성은 대단히 컸다. 특히 특별경비대는 미 군사고문단과의 협의도 없이 만들어진 부대였기 때문에 정식부대도 아니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하나만으로 편성된 급조부대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로버츠 준장과 무초 대사는 이범석과 이승만에게 따로 서한을 보내 특별경비대 조직을 폐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사고문단의 강력한 요구에 이승만은 끝내 특별경비대의 조직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대북공세 시도는 여순사건 발발 이후 걷잡을 수 없을만큼 심화되었는데 왜냐하면 여순사건에서 한국군은 숙군이라는 작업을 거쳐 내부의 적을 정리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와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숙군 과정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한 정보국은 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활용 가치가 매우 높은 조직이었다.


정보국은 숙군 과정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불러일으켜 숙군을 효과적으로 처리했고 경찰과 협력해 남로당 거물 이재복을 체포하는 등 실로 막대한 성과를 냈다. 다만 성과가 막대한만큼 정보국의 활동은 매우 무차별적이었다. 정보국은 체포된 군인들을 고문하여 증거를 창출해 재판에 넘겼고 때로는 재판도 없이 현지에서 즉결처분하기도 하였다.


특히 1948년 11월 중순 미 군사 고문단에게 보고된 제2여단 상황 보고서는 당시 숙군의 이면을 파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료 중 하나이다. 이 보고에 따르면 경비대원 수십명이 민간인들과 같이 전주에서 즉결처분 되었고 경비대는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이 광경을 알게 된 모이츠 소령은 이같은 사실을 전부 로버츠 준장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보국의 무차별적인 활동으로 군 내부에 좌파가 사라졌다는 점은 당시 군의 사기를 드높힐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정보국의 활동은 군 내부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군은 정보기구를 대대적으로 증강하며 군을 확충해 나아갔다. 이때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국방 제4국을 통해 특수부대를 만들어 군 첩보기관을 양성했으며 이와 함께 군 부대의 주둔지를 다양한 곳에 이전시키고 북한에 대한 공세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러한 군부대 위치이동은 향토연대 중심이었던 군의 성격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본래 군은 주둔지 인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실시하여 지원자를 가려내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각 연대는 대체적으로 향토연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부대원 간의 유대감이 깊었다. 그러나 주둔지가 자주 이동함에 따라 군의 모병방식은 인근 마을에 한정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세력, 즉 우익청년단원을 비롯한 사상검증이 완료된 청년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그 결과 군 병력의 수는 1948년 10월 16일 기준 49,476명에서 1948년 12월 31일 57,213명으로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던 한편 이범석은 국방 제2국(정훈국)을 조직해 장병들의 반공의지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는 조선경비대 시절 군의 정치적 중립을 버리고 적국인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장병들에게 기르고자 하는 이범석의 의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대북공세 준비에 착수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훈국은 처음에 정치국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하려 했는데 이때 이범석이 원한 정치국의 형태는 육해군 총참모장 휘하에 있던 헌병 관할권과 교육기능을 모두 합친 국방부장관 직계의 감시기구였다. 이는 정보참모부(G-2)와 작전참모부(G-3)를 아득히 초월하는 선전기구였다. 결국 이범석의 이같은 시도는 미 군사고문단의 반발에 부딪쳤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군내에 정치장교를 배치하는 제도는 ‘히틀러’나 공산당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군은 정치에도 초연한 입장에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일당 독재국가의 군처럼 ‘Political Commissar(정치장교)’ 제도를 도저히 채택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정치국이 비민주적인 기구라고 주장했고 이에 따라 이범석에게 정치국 설치를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범석은 “공산주의 군대와 싸우는 군대가 반공사상의 정신무장 없이 어떻게 싸우란 말이오? 당신들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있소. 나는 국방부 장관으로서 내 부하들을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무장시킬 것이오.”라고 답하며 로버츠 준장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후 정치국은 정훈국으로 개명된 채 설치되었다. 다만 이때 설치된 정훈국은 헌병관힐권이 없었으며 오직 교육기능만을 갖춘 기구였다. 초대 정훈국장은 이범석의 측근이던 송면수로 임명되었고 휘하 행정과장은 김병률, 지도과장은 족청계인 박영준, 보도과장은 이창정, 조사과장은 김종문 소령이 임명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설치된 정훈국은 창설 초기부터 여러 정훈교재를 제작하여 군 내부의 사상통일에 주력해 나아갔다. 당시 정훈교재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공비토벌 작전, 38도선 충돌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양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 고위장교들은 군신(軍神)이라고 불렀다. 정훈국은 여순사건에서 전사한 제12연대장 백인기와 제20연대장 위대선을 군신으로 추양하였다.


백인기의 경우 1948년 11월 14일 제5여단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구례에서 남원으로 이동하던 중 반군의 습격으로 낙오되자 끝내 자살한 인물이었고 제20연대장 위대선은 1949년 3월 19일 부대를 이끌며 전투에 나섰다가 그만 전사한 인물이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모두 연대장이라는 높은 계급을 가진 군인이었다. 정훈국은 그들을 군신으로 부르며 추모했고 이들을 기억해 반공의식 강화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도록 노력하였다. 이처럼 군의 반공화가 정착되자 군은 본격적으로 북한군을 향한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군부는 북진통일이라는 사명과 북한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그 자신감을 대북공세를 통해 분출해 내었다.


이후 1949년 1월 6일 국방부 소속 특무국(국방 제4국)은 국방부장관 이범석에게 1월 8일 20시부터 특무국의 공작원들이 사리원-재령-해주의 공공시설을 공격하여 그 일대를 무력화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범석은 작전 자체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은 하지 않겠다고 표명했지만 대신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내렸다.

 

가. 정보원의 선박이 해안경비대로부터 방해 받지 않도록 하라.


나. 남한으로 월남하는 정보원들이 무사히 피난민 수용소로 갈 수 있게끔 보장하라.

 

이범석은 이북에 공작활동을 전개하려는 정보원들을 지원하고자 전남포에 주둔한 해안경비대 함정 1척을 추가로 파견했고 이들이 무사히 피난민 수용소로 갈 수 있게끔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실제 공작활동은 1949년 1월 19일부터 이루어졌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철수시일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을 상당히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일례로 1949년 7월 계엄령 계획 문서를 보면 당시 이승만은 국회 중도파를 무력화시킬 계획으로 6월에 계엄령을 선포할 생각이었으나 미군의 철수시일이 겹친다는 이유를 계엄령 선포 시일을 7월로 연장시켰다.


특히 이 시기의 미군은 38도선에 주둔한 주한미군을 빼기 위하여 1949년 1월 12일부터 15일까지 38도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대북공세를 실행한다는건 이승만 정부에게 있어서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군이 철수하자 한국군은 곧바로 해주에 대한 공작활동을 전개했고 전방부대 또한 대북공세를 감행하였다. 즉 특무국의 공작활동이 늦춰진 것은 외부적인 요인인 미국의 존재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월 18일 특무국 공작원들은 해주에 대한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작원들은 해주의 공공시설을 장악하고자 곳곳에 폭동을 일으켰고 형무소를 공격하는 등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때 한국 언론에서는 이 해주사건을 북한 내 반공주의자들의 의거로 표현하였다. 마치 특무국의 활동을 북한 체제에 대한 항쟁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따질 때 본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애초에 해주사건은 불과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된 공작활동이었고 이 때문에 발발한지 불과 하루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특무국 소속 공작원들은 대부분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이후 특무국은 수풍댐 파괴공작을 개시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포로가 된 공작원들은 이범석의 지시로 작전이 이루어졌다고 실토했고 이에 북한측이 반발하자 이범석은 1월 26일 성명을 발표하여 "해주에 사람을 보낸 일은 없다"며 개입사실을 전면 부정하였다. 이때 이범석은 해주사건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자신의 부하들(his boys)이 해주를 점령했다"고 자신만만하게 보고한 상태였다. 그 역시 특무국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38도선 상황은 양측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9년 1월 27일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보고에 따르면 1949년 1월 20일 철원 방면 전곡 지구에서 한국군 1개 소대는 북한 경비대를 기습공격해 교전을 벌였고 같은 날 양구에서는 한국군 60명이 월경해 마을을 습격했으며 1월 23일에는 한국군 80~90명이 철원 방면에서 월경을 시도하다가 저지되었다. 이때 한국군의 공격행위를 보고 받은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이범석에게 다음과 서한을 보내며 한국군의 잔혹행위를 지적하였다. 군사고문단이 보기에 38도선에서의 충돌은 굉장히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이같은 충돌양상은 해주사건 발발 이후에 집중되었다.


1949년 1월 20일


수신:


신 준위가 지휘하고 한국군 군복을 입은 9명의 병사들이 북한 지역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납치했다. 나는 한국군이 이러한 행위를 허용하거나 묵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고 또 충격적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부대가 국방부 소속이고 신 중위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입증되어 있는 사실이다.


만약 이 장교가 자의적인 판단으로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면 이에 따른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가 상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했다는 것이라면 해당 상관 역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당신(이범석)과 한국정부, 그리고 적절한 합의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을 책임지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관에게까지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이러한 행동은 히틀러과 무솔리니, 그리고 스탈린이 즐겨 했던 짓과 동일한 행위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북한 주민들에게 보복 명분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아마 며칠 이내에 보복행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이같은 행동은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보기에 한국 스스로가 자국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행위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앞으로 이같은 행위가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로버츠 준장

존경하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에게

서울, 대한민국


이 해주사건에서 알 수 있는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해주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조직적인 대북공세였다. 이전의 대북공세는 그저 산발적인 충돌이었을 뿐, 군 조직이 대거 동원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일례로 1948년 10월부터 11월까지 발생한 38도선 충돌 횟수는 불과 1회 뿐이었다.


둘째, 당시 대북공세의 핵심인물에는 이범석이 있었다. 앞서 이범석은 해주사건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경과 사항을 보고했고 특무국의 공작활동을 지원하였다. 사실 이범석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정치국을 조직할 때도 드러나는 부분인데 당시 그는 정치국 설치 문제로 미 군사고문단과 마찰을 빚자 북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정치국을 설치해줄 것을 군사고문단측에 요구하였다.


당시 그는 해주사건을 통하여 북한 정권에 타격을 줄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범석은 1948년 11월 북한의 군사적 잠재력을 상쇄한다는 명목으로 1949년 하반기까지 한국군의 병력을 최소 10만명 이상, 예비군은 5만명까지 확대해줄 것을 미국에 요구한 바 있었다. 이때 이범석이 요구한 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1948년 11월 한국군 현황

구분부대수장교준위사병합계
총사령부1281317461,058
사관학교182 624706
여단본부5305602,7403,105
보병연대152,3107541,49543,880
특수부대133955,4365,780
공군1174 8261,000
243,49117151,82655,529

 

국방부장관의 요구사항(1949년 하반기 기준)

구분부대수장교준위사병합계
총사령부1281317461,058
사관학교184 624706
사단본부6558846,2646,906
포병연대6858301,070411,592
수색대대6144 3,0763,220
공병대대6162183,5403,720
특수부대1586398,8329,457
보병연대182,7729054,28857,150
공군11,044 4,9566,000
466,48429293,03099,806

출처: RG 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 Record Group, USAFIK Adjutant General, General Correspondence (Decimal Files) 1945-1949 ; Series, Recommendation for Proposed Organization of Regular and Reserve Army for South Korea, 1948.11.27

 

요구사항을 살펴보면 특수부대가 따로 조직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특수부대는 육군본부 특무국 산하 독립 제1대대와 보국대대(독립 제803대대), 그리고 호림부대를 뜻하는 것으로 주로 빨치산 진압, 대북공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대였다.(보국대대와 독립 제1대대는 빨치산 진압을, 호림부대는 대북첩보 수집을 담당했다.) 이범석은 이 특수부대의 인원을 최대 1만명 가량 양성하여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첩보활동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특히 당시 특수부대의 주구성원이 우익 청년단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범석은 사상적으로 검증된 청년단체들로써 북한에 대한 대북공세를 전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범석은 병력규모를 10만명 가량 육성하여 북한에 대한 공세적인 태도를 갖추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이범석은 1949년 상반기 대북공세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 해주사건에서 드러났다. 그는 해주사건 이전부터 특수부대를 1만명 이상 육성한 뒤 대북공세를 진행할 계획이었으며 이후 해주사건이 발발함에 따라 그의 계획은 일정부분 실현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해주사건은 대북공세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건이었다. 해주사건 이후에 군은 북한군으로부터 유리한 선상을 확보하고자 이북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 때문에 양측간의 교전 수준은 순식간에 연대급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물러나간 시점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군의 대북공세는 1949년 5월을 기점으로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한편 소련은 한국군의 이러한 행위가 곧 대규모 북침으로 이어질까에 대해 굉장히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한국군의 행위가 전쟁으로 이어져 북한 정부에 큰 해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특히 1949년 4월 17일 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낸 전보는 당시 소련의 우려사항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물이었다. 이때 스탈린은 한국군이 4~5월에 걸쳐 38도선으로 집결하고 있고 6월에는 38선을 넘어 북측을 기습공격해 8월까지 북한군을 전멸시킬 계획이라며 시급히 대책을 세워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같은 시기 미 국무부도 비슷한 내용의 전보를 미 대사관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 성은 정확한 보고로 우수한 평판을 받고 있는 극동의 한 정보원에게 60일 이내에 한반도에서 중대한 트러블이 예상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2.  그는 주도권은 남측이 쥘 것이라고 말했다.


3. 이 정보는 같은 출처를 통해 1949년 2월 중순에 확보한 보고와 일치한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2월 중순 보고 내용은 당시 한국군의 전반적인 상황을 관철한 내용이다. 해당 보고에 따르면 한국군의 사기는 여순 반란 진압을 기점으로 크게 고양되었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조직을 결집해 “남측이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을 뿐더러 공격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분석하였다. 즉 북침이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한국군의 호전적인 행보가 예측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스탈린은 한국군의 북침정보를 더 얻기 위해 참모본부에 38선 충돌 상황에 대해 자세히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9년 4월 20일 스탈린에게 보고된 38선 충돌상황 보고는 1949년 1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 남측의 침범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의 월경사건은 총 37건 발생했고, 이 가운데 24건은 3월 15일 이후 한 달 사이에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군은 38선 부근에 육군 부대를 추가로 배치했으며 특히 서울의 제1여단이 개성 지구에 투입되었고 향후 더 큰 규모의 도발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북한군 사령부에게 이에 대응할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밝혔다.


소련이 이토록 한국군을 경계했던 이유는 당시 한국군 지휘관 구성에도 영향이 있었다. 바로 개성을 담당한 제1사단장이 김석원 준장이기 때문이다. 앞서 다뤘듯이 김석원은 북한에 대해서 매우 강경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윤치영의 배려로 이북공세의 최선봉인 특별경비대장을 역임하였고 최전방을 담당한 제1사단의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언제든지 북한군과 전투를 치룰 수 있었다. 즉, 그의 경력만으로도 북한과 소련을 충분히 자극할만한 요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의 이러한 우려는 국경충돌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보복공세 저지와 고문단의 계획

노획무기 점검하는 김석원 장군과 최경록 장군


1949년 3월 21일 이범석 국방부장관은 족청해산과 국방 제4국(특무국) 설치 문제로 인하여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나갔다. 그의 후임은 신성모였는데 그는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친이승만계 관료였다. 그의 임명 소식을 들은 미 군사고문단은 즉각 환영을 표했다. 왜냐하면 신성모는 미국측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인물이었고 이범석과 다른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 군사고문단은 정치국 설치 문제에서 보여지듯 미국의 요구를 잘 이행하지 않는 이범석을 싫어했으며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인 신성모를 고평가하였다.


부임 초기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군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의 의견을 즉각 수용하였다. 그는 이범석이 잔재를 없애기 시작했는데 1949년 5월 2일 로버츠 준장과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과 의논하여 국방 제4국과 국방총참모장직을 폐지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성명을 발표해 제4국과 국방총참모장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신성모는 전방부대의 이탈행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7월 특별훈령을 내려 대북공세 금지령과 동시에 이북지역을 공격한 장교는 군법회위 회부 및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하였다


이는 당시 진행된 송악산 전투와 크게 연관되어 있는데 송악산 전투는 1949년 5월 4일 개성에 주둔한 경찰 부대와 제1사단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인 전투로 국군이 북한군 진전에 292고지를 선제 공격하자 이를 보복할 목적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전투 초기 개성에 주둔한 한국군 11연대 부대는 북한군 2개 중대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고 이에 제2대대는 연대에 연락해 공격사실을 전하였다. 이어 연대에서 2개 중대가 급파되었으나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으로 인해 제11연대 담당구역인 비둘기 고지, 유엔고지 그리고 292고지까지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전선이 돌파당한 제11연대는 서둘러 제1대대의 3,4중대를 2대대에 급파하고 행군훈련에 나간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복귀시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다음날 새벽 연대장 최경록은 3개 중대를 제2대대에 추가로 배속시켜 정면을 공격하도록 조치했고 하사관교육대를 후방에서 공격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연대장은 포병중대의 105mm 포와 포병대대의 57mm 포를 동원하여 대대의 화력지원을 담당하도록 조정하였다.


이후 돌격이 감행되자 제2대대는 목표고지인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고지로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목표고지의 급경사면으로 인해 공격이 계속 지체되었고 끝내 7부 능선에서 돈좌되고 말았다. 이때 대대는 북한군의 토치카 진지로 인해 많은 인명손실을 냈다. 결국 공격이 실패할 기미가 보이자 연대장은 하사관교육대를 특공대로 편성하여 비둘기고지로 돌격해 북한군의 특화점 진지를 파괴할 것을 지시하였다.


특공대는 돌격 끝에 비둘기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뒤이어 2대대와 합세하여 292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연대는 잃었던 고지를 모두 탈환했으나 또다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바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에 대한 보복공격였다. 왜냐하면 이 송악산 전투로 인해 제1사단은 17명이 전사하고 33명 부상이라는 비교적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사단장 김석원은 강경한 북진통일론자였기에 자칫했다간 돌발행위를 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 때문에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방 지휘관의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7일 이북에 대한 공격 행위 자체를 금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성모의 명령은 실제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군부는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북한을 향한 대북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이범석 국무총리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5월 7일 주한미대사인 무초를 만나 38선을 넘어 무장충돌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거듭 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5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신성모 국방부방관에게 "38선 이북 단거리 요충(要衝)을 자진 점령 확보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미국에게 38선 충돌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상은 대북공세를 지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대북공세를 계속 지지하였다. 그는 신성모의 태도를 안좋게 평가하며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이러한 정부의 의견에 따라 군부 역시 강경한 대북공세를 지지했던 것이다. 앞서 군은 국내 불순분자의 반란을 진압했고 이제는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군부는 미 군사고문단이 공격 대신 방어훈련을 시키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대북공세 의지는 신성모의 특명에도 저지되지 못했고 1949년 6월 25일 제1사단의 송악산 공격을 시작으로 대북공세가 본격적으로 개시됨에 따라 38도선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때 제1사단장 김석원은 북한에 대한 보복공세로써 송악산을 습격해 점령하고자 했으나 송악산은 북한군의 강화된 진지로 인해 포격지원의 효력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선두부대인 제11연대 1대대가 정면에 대한 총검돌격을 지속하면서 양측간 일진일퇴를 거듭함에 따라 결국 제1사단은 목표인 송악산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특수부대인 호림부대가 1949년 6월 28일 강원도 인제로 잠입하여 첩보활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호림부대는 2개 대대로써 설악산으로 침투한 다음 북한 마을, 내무서, 교량 및 도로 파괴 등 북한의 후방을 교란할 계획이었다. 사실상 게릴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호림부대는 이동도중 발각되어 와해되었고 일부 대원은 북한 주민들의 공격으로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작전에 투입된 호람부대원 대부분은 전사했고 포로가 된 부대원 5명은 1949년 9월 학살 혐의로 인해 평양에서 총살되었다.


재판장에서의 호림부대원 모습


호림부대의 북파와 함께 강릉 주둔 제10연대도 대북공세에 가담하였다. 연대장 송요찬은 1949년 7월 3일 제1대대장 고백규 소령을 불러 북한 양양을 습격해 북한의 군사시설을 파괴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다음날인 7월 4일 고백규 소령은 1대대를 이끈 채 양양 남대천 부근의 80고지로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한 북한군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해상을 통해 협공을 가해오자 대대는 즉각 후퇴를 감행하였고 이때 후퇴를 하지 못한 제1중대는 북한군에 의해 분산되어 다수의 인원,병기손실을 입었다. 이 공격사실이 전해지자 미 군사고문단은 즉시 송요찬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재판결과 사형 없이 단순히 해임 처리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이루어진 38선 충돌은 대부분 미군이 철수하는 기간에 집중되었다. 이는 남한을 보호할 존재인 미군이 한반도에서 사라지자 자국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38선에서 북한군과 더욱 치열하게 부딪친 결과였다. 일례로 제1사단 관할구역인 송악산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은 1949년 5월 최초로 연대급 규모의 전투를 벌였고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다. 한국은 미군이 철수하여 생긴 체제의 빈틈을 메꾸기 위해 북한군과의 잦은 전투를 치뤘다. 이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국민들에게 전쟁이 발발할 시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이는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종의 기만술을 쓴 것이었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3일이면 북한공산군을 소탕할 수 있다고 기자회견에서 발언


국방장관 신성모씨는 31일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태평양동맹 체결문제 및 미군 철퇴문제 등 당면한 군사문제를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문) 外電이 미군철병시기까지 시사하고 있는데?

(답) 아직까지도 철병문제는 토의중이다. 혹시 지금 철병중에 있는 것으로 보나, 가고 오는 사람이 있으니 철병으로 볼 수 없다.

(문) 미국무성 대변인은 한국에 小火器 정도의 원조를 한다고 하였는데?

(답) 세계전쟁이라면 모르지만 38이북의 공비에 대하는 정도라면 현재로도 우리 장비는 충분하다. 즉 러시아군이나 중공군이 내려와 밀린다면 별문제지만 북한공비만은 3일도 걸리지 않아서 정복할 수 있다.


연합신문 1949년 06월 01일


지적했듯이 그는 한국군의 대북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인물이었다. 사실 신성모는 당시 한국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한국 군부의 의견보단 미 군사고문단의 의견을 더욱 신뢰했으며 겉으로는 북한에 대한 공세를 표방했지만 뒤에서는 공격보다는 방어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신성모는 이북공세를 감행한 장교들에 대한 사형건의를 대통령에게 제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초기에 제대로 억제되지 못했다. 송악산 전투, 제10연대의 공격, 호림부대의 북파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군부는 상관인 국방부장관의 특명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했고 기존의 지휘계통을 벗어나 독자적인 행위를 반복하였다. 특히 김석원은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를 올리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하듯 1949년 5월 대북공세는 신성모와 미 군사고문단에게 있어서 대단힌 큰 시련이었다. 군은 지휘계통을 따르지 않은 채 월권행위를 반복했으며 그 결과 38선에서의 충돌은 연대급 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 하나의 전장이 되었다.


1949년 8월 해주 일대를 시찰하는 미군사고문단과 국군의 모습


그러던 한편 8월에 접어들자 군은 옹진반도에서 대대적인 공세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는 5월 무렵 북한군이 제12연대가 담당한 옹진반도를 공격했기 때문인데 당시 북한군은 1개 대대를 동원하여 국사봉과 두락산을 점령했고 이어 병력을 증강해 옹진군의 서경리-남교정-염불리-원초리-오남리 등 총 5개 리를 장악하였다. 육군본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옹진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사령관직에 김백일을 임명한 뒤 제13연대 1개 대대, 독립 제1대대 및 18연대 1개 대대를 증원하여 탈환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어 육군본부는 보복공격으로서 6월 7일 옹진 이북 10㎞ 태탄지역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독립 제1대대는 단독작전을 개시하여 목표지역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독립 대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끝내 7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옹진지구 전투사령부는 두락산을 제외한 옹진지역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두락산-국사봉 공격작전은 계속 실패하였다.


이후 전투사령부는 두락산 탈환을 포기하고 요충지인 은파산을 확보하기 위해 제18연대 2대대로 하여금 은파산을 공격 및 점령할 것을 지시하였다. 2대대는 예상 외로 순조롭게 은파산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8월 4일 북한군 2개 대대가 18연대 2개 중대를 급습하여 은파산을 점령하면서 옹진반도 전투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다음날인 8월 5일 김백일 대령을 옹진지구 전투 사령관직에 임명하고 제2연대를 옹진으로 급파하였다.


제2연대가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하자 옹진반도에서의 전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옹진에서의 북한군은 이전과 달리 매우 강력해진 상태였으며 이에 따라 한국군은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 옹진전투는 10월을 기점으로 완전히 종료되었으나 옹진 전투에서 보인 한국군의 실태는 미 군사고문단의 지적대로였다. 한국군은 호전적이었고 탄약을 미친듯이 낭비하였다.


당시 옹진반도에 주둔한 제18연대는 거의 전부대가 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비대는 고작 1개 중대 뿐이었다. 연대 고문관은 공세적인 부대위치를 바꾸기 위해 2개 대대를 예비대로 두고 1개 대대를 38선에 배치시켜 전투 훈련을 진행할 것을 연대장에게 건의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무시하였다. 결국 예비대 확보마저 실패하면서 한국군의 사격, 전투 훈련은 진행조차 되지 않았다.


6일 간의 전투에서 제2연대가 소모한 탄약의 수는 다음과 같았다.


30구경 소총탄 288,071발

30구경 카빈탄 242,989발

30구경 자동소총탄 158,897발

30구경 기관총탄 223,502발

50구경 기관총탄 51,506발

45구경 권총탄 32,140발

2.36인치 로켓탄 634발

60mm 박격포탄 10,269발

81mm 박격포탄 8,696발

105mm 포탄 5,572발


사격훈련이 진행되지 못한 결과 무려 1,022.276발의 탄약이 단 하나의 전투에서 소모되었다. 이에 반해 전과는 고작 69명 사살이었다. 북한군 한 명을 사살하는데 14,604발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결국 군부는 옹진반도 전투를 '완패'라고 부를만큼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한편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는 진해에서 중화민국 장제스를 만나 양측간 해군 사업에 대한 협의를 나눴다. 여기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진해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에게 특명을 어긴 지휘관들의 사형건의와 대북공세에 대한 이야기를 건냈다. 신성모는 명령을 어긴 고위급 장교 3명을 사형시킬 것을 이승만에게 부탁하였다. 신성모가 제시한 사형명부에는 송요찬 제10연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응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고 이범석은 오히려 북진을 해야 한다며 신성모를 질타했다. 결국 신성모의 사형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군부 내에서는 옹진에서의 참패를 완화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철원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옹진을 잃을 경우 철원을 공격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신성모와 로버츠 준장은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범석과 이승만의 태도는 군부의 편이었다. 진해에서 돌아온 이범석은 신성모를 불러 그에게 좀 더 용기를 내서 북한을 공격해야 한다며 말했고 이승만 대통령 또한 신성모에게 철원 공격을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야단쳤다.


이렇듯 대북공세 조짐이 강해지자 국방부장관의 직계인 해군에서도 월권행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해군이 소해정 6척을 동원하여 몽금포에 주둔한 북한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는 국방부장관에게 그 어떠한 보고도 없이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이러한 행위를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로버츠는 이북에서 이루어지는 군의 대북첩보 활동에 대해서도 따로 건의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38선 일대에서 이루어지는 정찰 작전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찰은 보통 적군을 포로로 잡는 것이 아닌 현장에서 바로 죽이는 방식입니다. 이 정찰의 목적은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붙잡힌 포로들은 아군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찰을 통해 더 많은 포로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로버츠 준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군의 대북첩보 활동은 훌륭했지만 동시에 무분별한 즉결처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호림부대 사건만 보더라도 당시 대북첩보 부대의 학살 행위는 분명히 존재하였다. 따라서 그는 신성모에게 몽금포 상륙작전 같이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어기는 군의 행위를 수습하고 동시에 북파공작 부대도 재편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던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차기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김석원을 내정하였다. 앞서 김석원은 특별경비대장을 맡은 친이승만계 군인이었고 대북강경파로서 강력한 대북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1949년 6월에 개최된 한국군 지휘관 회의에서 그는 '북한의 침범을 상회하는 무력과 빈도’로서 적극적인 보복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38도선 상의 군사충돌의 원칙은 1939년 4월 제정된 관동군의 '蘇滿國境紛爭處理要綱'에 근거하여 교전에 필요한 월경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물론 김석원은 김구와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한독당이 만주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김석원을 포섭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인데 먼저 만주계획이란 중국 관내에서 실패했던 임정의 기반을 강화하고 광복군을 확장시키기 위한 한독당의 시도로 구체적으로 만주에서의 군사활동을 뜻했다.


해방 이전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군사계획을 수립해 중국 관내에서 간부를 육성하고 만주로 들어가 광복군을 확대,개편하여 일본군과 싸워 국내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항복하자 임정은 계획을 바꿔 일본군 내 한인장병 10만명을 광복군 내에 흡수하여 각각 1만명의 병력을 보유한 10개의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조직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연합국의 개입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광복군은 소련군이 철수한 1946년 하반기부터 만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임정은 광복군의 확군을 이곳 만주에서 시도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주계획이었다. 김구는 만주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우선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당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북한을 무력공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군대와 협력해 한중 동맹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반공, 반소를 내걸은 이청천과 이범석 그리고 전성호, 오광선 등 조선혁명군, 광복군 출신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김석원과 함께 건군계획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본연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나아가선 반공 군사동맹 체제의 확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김구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한국인들이 중국 장제스의 중앙군으로 입대해 만주의 공산군을 격멸하고 북만주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구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장제스에게 며느리인 안미생을 보냈고 아울러 이청천과 김석원을 만나 장제스와의 협상이 성공할 경우 김석원은 중국 중앙군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따라서 김구는 만주작전을 위해 김석원과 친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김석원은 김구쪽보다는 이승만쪽에 더 가까웠다. 왜냐하면 김구의 만주계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불투명화되었고 김석원은 굳이 김구가 아니더라도 정계에서도 크게 인정 받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실세였던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에 대한 인식에서 김석원은 이승만과 일맥상통하였다. 때문에 정부수립이 되자 김석원은 특별경비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윤치영과 임영신은 김석원을 적극 지지하였고 김석원 역시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때 김석원의 최종목표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제1사단장 시절 윤치영과 임영신에게 대한국민당 창당을 목적으로 제1사단의 자금을 아낌없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부정행위였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그가 정치적으로 부패한 군인이고 북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며 그를 해임시켜줄 것을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석원은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인데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해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김석원은 자신의 전공인 송악산 전투를 대외적으로 알렸는데 대표적으로 육탄십용사의 경우 최경록 제11연대장이 허위로 올린 보고였으나 보고를 들은 김석원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육탄십용사 홍보에 나섰다. 정훈국은 '육탄십용사전'을 출판해 육탄십용사의 죽음을 추모했고 김석원은 언론에 나와 송악산 전투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즉 김석원은 자신의 전공을 부풀려 인지도를 쌓고 이를 통해 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옹진반도 전투 이후 거의 현실화되었다. 상술했듯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철원 공격을 감행하기 위하여 1949년 8월 16일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을 김석원으로 교체하려고 하였다. 이때 로버츠 준장과 휘하 군사고문단은 이승만의 결정에 대해 전부 반대를 표했고 로버츠 준장은 만약 교체가 이루어질 경우 자신은 사표를 내서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이승만에게 경고하였다. 그리고 무초 대사는 북진 공격할 징후가 보일 경우 한국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엄포하였다. 결국 육군총참모장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승만은 채병덕 참모총장을 김석원으로 교체하려는 생각을 내비쳤다. 김석원은 이 대통령이 오래 총애해온 인물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지난 가을, 이 대통령은 콜터 장군과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김석원은 애국심에 불타는 남한군에게 소총 2만 정을 공급해주면 “북한을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국방장관과 참모총장, 미국의 군사고문은 모두 김석원 장군에게 반대했다. 그들은 김석원을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허풍쟁이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예전 일본군이 사용하던 반자이(萬歲) 자살 돌격 작전으로 전선의 관할 지구에서 북한군을 공격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서 휘하의 모든 부대를 가장 위험한 방법으로 전선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고 내게 주의를 촉구했다. 그들은 그가 사령부를 무시하고 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에 특히 강력히 반대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친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교체 계획은 물론 철원 공격 계획까지 보류시켰다. 이때 무초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 군부의 상당수가 북진을 열망하고 있었는데 당시 군부는 통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 북진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이를 막기 위하여 군부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군부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기세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날카로워지고 초조했던 신경은 이런 새로운 기세에 물러났다. 군부의 상당수가 북진을 열망하고 있다.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북진하는 것밖에 없다고, 점차 더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다. 딕 존스턴[『뉴욕타임스』 기자]은, 장제스가 이승만에게 중화민국 공군이 북진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들은 중화민국군이 한국을 거쳐 만주를 침공할 가능성을 논의했다고 내게 알려줬다. 중국 공산 세력이 걸리기는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북진할 때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판단력이 있는 상태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북진을 명령할지는 의심스럽다. 내가 알기에 신 장관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범석은 북진에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성이나 옹진에서 다시 돌발적인 사건이 터진다면 반격 이후 일어날 사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육군참모총장 승진에 실패하자 김석원의 부하였던 이영무 대령은 군 내 자신의 계파를 통해 신성모를 공격하여 채병덕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바로 임영신-윤치영-김석원과 긴밀히 협력하여 정치적인 모략으로써 채병덕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김석원 계파의 이러한 시도는 얼마 안가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중장이 김석원의 비리 행각을 발견했다며 김석원을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태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제1사단장 김석원이 38도선에서 이루어지는 남북간의 교역을 중단시키고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한 사건이다. 김석원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남북교역장에서는 물물교환 방식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남한측에서는 군수물자들이 매물로 나오는 반면, 북한측의 매물은 명태나 염장 고등어 등이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그는 남북 교역장에서의 물자와 상인들을 체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남북교역이다. 해방전후인 1946년부터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남북교역은 분단 직후 위축된 남한의 무역상황을 타개하고자 실시한 대책이었다.


초기 남북교역은 미군정의 허가없이 이루어진 암거래였기 때문에 안전성 면에서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12월 <조선연안교역의 감독>이라는 법령을 공표하여 남북교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본 법령에 의거하면 미군정은 남북교역 활성화를 위해 주문진-용호도-여수 3곳에 화물검사소를 설치하여 남북을 왕래하는 선박을 검사하되 허가물품은 반출입이 가능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때 담당 부처는 상무부와 외무처로 상무부는 물품 하역에 대한 결정을, 외무처는 월남민에게 경공업, 기타 가구 등에 필요한 물품을 반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결정을 담당하였다.


처음에 미군정은 해상을 통한 교역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미군정은 악화된 경제상황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육로를 통한 교역마저 합법으로 승인하였고 그 결과 남북교역은 육로,해상 등의 구분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미군정은 육로를 통한 교역의 활성화를 위해 청단-개성-동두천 등에 검사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정부 수립이 되자 남북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1948년 1월부터 8월 15일까지의 교역 실시상황은 한국의 반출 총액이 사정가격으론 155,891,524원 80전, 시장가격으로는 약 4억 원이며, 북한에서 반입한 물량 총액은 675,463,250원(당시 시장가격 약 10억 원)으로 1948년 1월부터 8월까지의 남북교역 총액은 831,354,774원 80전(시장가격 약 14억 원)이었다. 따라서 집계된 한국의 반출입 차액은 409,571,725원 20전(시장가 약 7억 원)으로 북한으로의 반출보다 반입량이 훨신 더 많았다.


그런데 1948년 9월 28일 임영신 상공부장관은 국무회의 의결이 있을 때까지 남북교역을 일시 중단할 것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1. 남북교역에 관한 사무를 전면적으로 중지하고 반출반입계획을 속히 수립할 것


2. 반입대가 물자로서 양곡·고무·면포·繰綿·석유의 대북한 반출은 일체 중지하고 반출계획에서 제외할 것


3. 반입반출계획이 국무회의의 승인을 얻을 때까지 교역을 중지하고 승인 있은 이후 재개할 것


이후 임영신 장관은 기자회견에 참석해 남북교역의 중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북조선에서 계획적 반출을 하는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너무 무질서하게 물품을 보내었고 따라서 중요물자가 이북에 넘어갔으나 반면 북조선에서는 불필요한 물자가 넘어와 남한에 손해가 적지 않다. 그리하여 계획성을 띠고 또한 원료반출보다 제품을 보내고자 하는 데서 쇄신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일시 보류한 것이다."

 

임영신은 한국의 반출량이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요한 물자들이 북한에 넘어갔으니 중지시켰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비료폭등을 비롯한 부분적인 인플레이션, 대외 무역 위축 등의 경제적 타격을 가지고 왔다. 또한 당시 대북 반출품은 주로 생고무, 광목, 양철, 면사, 작업화, 전구, 등이었으며 대북 반입품목은 주로 비료, 전력, 카바이트, 시멘트, 마른 명태, 가성소다 등으로 국가적인 위협이 되는 물품은 확인되지 않았다. 임영신의 주장은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이후 10월 초순이 되자 상공부는 다시 남북교역을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는 남북교역이 중단되면서 대외무역 상황이 예상 외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상공부는 남북교역을 대외교역과 같은 일반 무역상으로 이전하였는데 당시 상공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같은 조치는 남북교역에 대한 상공부의 강력한 통제권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또한 상공부는 대북 수출품인 식량, 석유, 광목, 생고무 등 6품목의 물자도 수출품목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상당한 불리한 제약을 진 채 1948년 10월 20일부터 남북교역을 재개했던 것이다. 상공부는 선반입 후반출이라는 원칙 하에 남북교역을 개시하였고 이후 교역방식을 동시 반입반출로 채택하여 교역량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49년 2월부터 남북교역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국방부는 남북교역장에서 북한과 협력하는 상인들이 있다며 남북교역 자체를 중단할 것을 상공부측에 요청한 상태였다. 상공부는 국방부의 주장을 곧바로 수용하였다. 결국 1949년 4월 1일 상공부는 남북교역이 북한 정부에 유리할 수 있다는 근거로 교역 자체를 완전히 중단시켰다. 교역이 재개된지 불과 반 년만이었다.


이후 1949년 4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교역 중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그동안 이루어진 남북교역이 마치 북한에게만 유리한 사업인 것처럼 해석했으며 남북교역을 통해 이룬 성과 역시 전면 부정하였다. 이어 그는 남북교역 중단이 유엔에서도 이해할 것이라며 교역 중단이 마치 불가피했던 것처럼 주장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상공부의 남북교역 중단 조치는 이승만의 의중이 함께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문) 유엔한위에서는 유엔의 임무로서 38선을 통하여 남북교역함으로써 경제적 통일을 할 것이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남북교역을 중지하였으니 유엔의 사업에 방해되는 일은 없는가?

 

(답) 이남에서는 남북교역을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즉 이남에서는 수차 물자를 이북에 보냈으나 이북에서는 물자를 받았을 뿐 이남에 대하여 물자를 보내지 않으므로 이상 더 교역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엔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경험한다면 반드시 대한민국정부의 남북교역 중지를 이해할 것이다.

평화일보 1949년 04월 09일


이렇게 교역이 중단되자 국방부는 개성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남북교역 상인들을 대거 체포하여 교역물품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국방부는 남은 물자를 처리하기 위해 1949년 5월 26일 다음과 같이 밝히며 압수 물품을 조사하되 생필품은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군용품은 군에서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헌병의 월권과 압수된 남북교역품 문제 등에 대해 기자문답


申국방장관은 25일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기자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문) 유엔한위 필리핀대표 루나박사의 건의에 대하여 장관의 견해와 申·林 양 장관의 공동성명과의 관련 여하?

(답) 우리의 성명과는 전연 관련이 없다. 내가 보는 바 그의 성명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며 또 한층 더 그는 우리 나라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문) 국군에서 압수한 남북교역물자 처리 방침은?

(답) 내가 국방장관에 취임하기 전에 이 문제가 났다. 그동안에 여러번 정부에서 공문으로 발표된 줄 생각한다. 즉 남북교역에서 군수품 등을 못나가게 하겠으나 효력이 없어서 정부에서 압수시켰는데 이에 대한 법의 규정은 없다. 그런데 발각자에는 상을 주고 압수품은 군에서 사용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쓰지 않고 조사중에 있다. 군용에 쓸 것이면 군에서 쓰고 생필품은 주인에게 돌려주겠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김석원이 남북교역 상인들을 체포하였다. 상인들의 체포 자체는 합법이었지만 압수한 물품 처리에 있어서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압수한 물품은 생필품을 제외한 채 군용으로 쓸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따라서 김석원은 압수한 물품을 규정에 따라 군용으로 취급하도록 해야 했는데 김석원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조사에 착수하여 김석원의 행각을 살폈는데 여기서 김석원이 남북교역을 중단시키면서 총 3억 원 가량의 자금을 횡령했고 횡령한 자금을 사적인 일에 사용했음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채병덕 육군총창모장은 이러한 사실을 신성모와 미 군사고문단에게 전하며 김석원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부탁하였다.


육군본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횡령된 자금은 다음과 같은 곳에 주로 사용되었다.

 

1.김석원의 가족, 지인

2.성남중학교

3.육해공군출신동지회※

※ 육해공군출신동지회는 1946년 10월 김석원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월남한 일본군 출신들을 규합해서 만든 군사단체이다.


육군본부는 횡령된 자금이 성남중학교를 비롯한 민간 건설업체에도 유출됐고 이 과정에서 군 인력과 군 장비까지 동원됐다고 파악하였다. 이외에도 횡령 자금이 기타 사적인 일에도 사용되는 등 다방면에시 자금이 유출되었다고 보았다.


이때 군사고문단의 반응은 김석원이 이전부터 명령 체계를 어기는 월권행위를 수없이 해왔다는 사실과 윤치영과 임영신에게 정치자금을 조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육군본부의 조사결과를 신뢰하였다. 채병덕은 이 명태사건을 명분으로 김석원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제거할 계획이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이러한 채병덕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9년 10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 모두 해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측의 요구인 김석원 해임을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채병덕을 같이 해임함으로써 미국측의 요구를 순수히 들어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후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김석원 계파인 이용문 대령이 자신에 대한 모략행위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곧장 그를 옹진지구전투사령관으로 좌천시키고 동시에 명령불복종 혐의로 1949년 11월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재판결과 이용문 대령은 일주일 동안 구금조치되어 참모학교 부교장으로 발령되었다. 이리하여 김석원은 본래 목표였던 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신성모와 미 군사고문단의 승리였다.

 

한편 38도선 상황은 9월 1일 옹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주 용담포를 공격해 북한 군수공장 두 곳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9월 5일 한국 경비대가 장전에 위치한 북한 보안대 제157중대 본부를 습격하는 등 교전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옹진반도 전투 이후 북한측이 별다른 공격이나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38선에서의 충돌은 1950년 상반기가 되서야 비로소 진정될 수 있었다.


1949년 12월 31일 내무부는 38도선의 충돌횟수와 경찰 피해를 다음과 같이 집계했다.




1949년 한해 동안 군경은 북한군과 무려 1,963번의 충돌을 빚었다. 특히 1949년 8월 한달 간 충돌횟수는 526번으로 사상최대치였다. 북한군과 한국군 모두 38선을 향해 총공세를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1949년 9월부터 38선에서의 충돌횟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12월에는 25번 충돌로 가장 적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양측 모두 38선에서의 공세계획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은 고문단과 국방부장관의 저지로 인해 보복공세를 진행하지 못했고 북한은 옹진반도 전투 이후 소련의 압력과 내부적인 공세 약화로 더이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주지하듯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미 군사고문단의 역할은 지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성모와 군사고문단은 한국군의 대북공세적인 행동을 최대한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성모의 경우 1949년 5월 7일 전방부대 지휘관들에게 부대를 이끈 채 38도선 이북에 공격을 감행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했고 이후 군부 내에서 북진론이 불거지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미 군사고문단 역시 38선에서 벌어지는 교전이 전쟁으로 번지지 않게끔 최대한 노력하였다. 군사고문단은 대북강경파인 김석원을 해임시키도록 이승만을 설득했고 이어 군부의 북진 계획도 무산시켰다. 물론 국방부장괸과 군사고문단의 명령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한 장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석원과 송요찬 등으로 이들은 모두 해임 처리되었다. 이같은 조치 끝에 1950년 상반기에 접어들게 되자 군은 대북공세 대신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 때문이었다. 앞서 군은 38도선 충돌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교전을 치루고 있었다. 빨치산을 진압하기 위해 군 부대는 각지에서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정해진 기일에 맞춰 훈련을 수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장기화된 토벌작전을 끝내고 훈련을 하는 것이 당시 군사고문단의 목표였다. 38도선에서의 충돌이 안정화된 1949년 12월부터 이러한 움직임은 본격화되었다. 1949년 12월 29일 로버츠 준장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서한을 전달하였다.


1949.12.29

수신


참모총장의 갑작스런 명령 변경으로 인하여 현재 서울의 방어 상황은 기병대를 제외하곤 사실상 부대가 없습니다.


따라서 3연대를 가능한 한 빨리 서울로 이전시키고 18연대도 빨리 옹진에서 서울로 이동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대들을 훈련시켜야 하며 하며 또 병사들을 겨울과 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옹진에서는 지금까지 그 어떤 작전에서도 전투력이 높은 대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요 시민들이 이에 대해 반발 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건 모든 국가에서 행해지는 모습입니다. 만약 18연대를 24시간 내에 옹진에서 이동 시킬 수 있다면 서울은 이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고, 18연대는 그들에게 필요한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저는 태백산과 지리산 일대의 토벌작전이 겨울철에 완전히 끝내지 못한다면 크게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각 장소에는 1개 대대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부대는 훈련과 휴식을 위해 모두 적절한 위치로 이전할 것을 제안합니다.


존경하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서울, 대한민국


로버츠 준장은 우선 참모총장의 실책을 지적하였다. 당시 참모총장 대리였던 신태영은 서울에 주둔한 예비대를 모조리 철수시키고 동시에 제2사단에게 공비토벌을 지시한 바 있었다. 이는 한국군 사단의 훈련기한을 늦추는 행위였고 또한 서울에서의 방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버츠 준장은 그 사이에 제3연대와 제18연대를 투입시켜 방어력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성모는 1950년 1월 15일 제3연대와 제18연대의 주둔지를 서울로 이전시켰고 서울에 대한 방비태세를 갖췄다.


한편 빨치산 토벌을 계속 지속되었는데 당시 군은 1949년 9월 28일 지리산 ,태백산,호남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공비를 대대적으로 소탕하고 있었다. 당시 빨치산의 규모는 다음과 같이 집계됐다.


태백산 북부지역-200

태백산 동부지역-820

지리산, 호남지역-500

외지-200

출처: General survey of Guerrilla activity in South Korea, J.H. POLK, 1950.01.19


그러나 앞서 말했듯 토벌작전은 군 부대의 훈련 기한을 늦췄고 또한 겨울에 접어들면서 동상자가 대거 발생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룰 수 없었다. 특히 제3연대는 이 기간 동안 사병 8명이 동사하고 191명의 장병들이 동상으로 입원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3연대는 장병들 가운데 80%가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다 동계작전에 대한 대비책도 없어서 동상피해가 극심하였다. 동상자들은 이후 남원도립병원에 임원했는데 이때 병원의 상황은 동상부위를 절단할 때 수술도구가 없어 전기톱을 가지고 와 절단할만큼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가혹한 환경도 문제였지만 군 부대의 기강해이도 큰 문제로 뽑혔다. 당시 지리산 전투 사령부로 파견된 한센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1월 지리산 전투 사령부 예하 제17연대로 오게 된 강문봉 대령은 늦은 밤, 어느 한 호텔에서 17연대 제2대대장인 김희태 대위를 발견했는데 강문봉 대령은 당황하여 그에게 왜 부대가 아닌 호텔에서 자고있냐고 물었고 이에 김희태 대위는 그저 몸이 아파서 호텔에서 잤다고 답변하였다.


답변을 들은 강문봉 대령은 그 즉시 김희태 대위를 체포하고 김백일 전투 사령관에게 찾아갔다. 강문봉 대령은 김백일에게 김희태 대위를 탈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뒤 곧장 구례로 떠났다. 구례로 간 강문봉은 그곳에서 17연대 제2대대 소속 부사관들이 인근 마을에서 모피와 식량을 구입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제서야 강문봉 대령은 대대원 전체가 근무지를 이탈한 상태라는걸 깨닫게 되었고 이후 제17연대 지휘관을 만나 대대의 기강을 바로 잡을 것과 죄를 지은 장교를 제대로 처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17연대가 지리산 전투사령부의 주요부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강해이는 비단 하나의 부대 문제만이 아닌 지리산 전투 사령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미 군사고문단은 지리산,호남 전투 사령부와 태백산 전투 사령부 등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해체해줄 것을 원했다.


① 수도경비사령부 관할 지역, ② 지리산 전투 사령부 관할 지역, ③ 태백산 전투 사령부 관할지역, 1949년 10월 15일 기준으로 각각 관할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당시 군의 빨치산 토벌이 공식적으로 끝난 시점은 1950년 3월 15일부터였다. 이는 명백히 미 군사고문단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었는데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49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5만명 이상 증강된 경찰력을 동원하여 빨치산을 토벌해야 한다고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하였다.


보고를 들은 신성모는 즉각 동의했고 로버츠의 주장은 전투경찰 계획으로 구체화 되었다. 로버츠 준장은 5만명 경찰대원 중 약 1만명의 경찰대원을 차출해 16~22개 대대로 편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빨치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군사 고문단은 전투경찰을 편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안을 수립하였다.


1. 경찰 부대는 중대 하나 당 100~125명으로 구성된다. 단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2. 1개 대대는 4개 중대와 소수의 참모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전투경찰은 일제 99식 소총, 44식 소총으로 무장한다. 일제 기관총 및 박격포로 무장한 부대는 대대 내에서 조직할 수 있다.


3. 훈련은 보병학교에서 8주 간 진행되며 각각 120명으로 구성된 2개의 반으로 구성된다. 1차 훈련과정은 1월 23일부터, 2차 훈련과정은 2월 13일부터 진행된다.


4. 초기 편성된 전투경찰은 군으로부터 보급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내무부 재정을 통해서 보급문제를 해결한다. 전투경찰 대대는 산악 작전에서 필요한 장갑,텐트,신발 같은 기본적인 보급품이 지급되면 1~2개 대대 분량씩 지급된다.


5. 편성된 대대는 각 지방에 하나 씩 배치된다. 지방에 주둔하는 동안 대대는 도지사의 지휘를 받으며 도지사의 요청에 따라 지원에 나갈 수도 있다. 또한 일부 임무에서는 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찰 대대는 군의 요청을 받기 전에 해당 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해야 하므로 경찰 대대는 군과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


이어 경찰에서도 전투경찰대원을 확장하기 위하여 수원에 위치한 3개의 학교를 통합시켜 교육시설을 늘리고 경찰학교 졸업생 4,000명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 고문단은 로버츠 준장의 계획 중 전투경찰대의 식량보급 문제는 경찰이 아닌 군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고문단의 요지는 이러했다.


보병학교에서 훈련 중인 240명의 경찰에게 제공되는 식사비만 200만원이다.

경찰은 군대처럼 보급체계를 갖추지 않아 각 경찰관이 알아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고문단은 보병학교에서 교육 중인 경찰대원에게 드는 식사비와 경찰의 미비한 보급체계를 근거로 들었다. 실제로 이는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당시 경찰은 준군사적 조직이었지만 독자적인 식량 보급체계는 갖추지 않았고 때문에 전투경찰을 편성할 시 이에 따른 혼란이 빚을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내무부는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해 1950년 2월 7일 관련 회의를 열어 전투경찰대의 조직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때 전투경찰대의 규모는 20~22개 대대로 책정되었고 인천, 대구, 부산에 경찰 훈련소를 설치하고 이들의 훈련을 담당한 교관과 경찰대대의 장교는 한국군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으로 결정났다. 보급체계는 주로 현지 경찰이 담당하고 탄약의 경우는 군 무기고로부터 공급 받기로 하였다.


이어 경찰은 군으로부터 빨치산 진압 권한을 이양 받아야 했는데 주어진 기한은 1950년 5월 1일까지였다. 이 상황에서 군은 재빨리 이양하기 위하여 1950년 3월 15일 지리산,태백산,호남 지구 전투사령부를 모두 해체하였다. 1950년 1월 이후 군의 빨치산 진압 작전은 사실상 없었다. 이리하여 1950년 4월 14개의 경찰대대가 편성되어 군 작전지역을 인수받고 토벌작전에 나섰다.


이후 미 군사고문단은 지리산 일대에 토벌을 담당했던 3연대, 그리고 옹진반도에 주둔한 18연대와 제주도에서 복귀한 제2연대를 중심으로 방어훈련을 전개하였다. 사실 이전에 고문단은 1949년 6월 동원훈련으로 연대급 수준의 훈련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훈련교관의 부재와 38도선 충돌, 빨치산 토벌, 군의 과도한 인원 등의 문제에 부딪쳐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은 1950년 1월, 1950년 한해 간 4단계 훈련계획을 실시했다. 교육훈련 제1호로 구체화된 이 계획은 제1단계부터 제4단계까지 나눈 훈련으로 제1단계는 1950년 1월부터 3월까지, 제2단계는 1950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3단계는 1950년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였으며 마지막 제4단계는 1950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기획되었다. 이 가운데 제3단계와 제4단계 훈련은 사단급 제병연합 훈련, 각종 규모의 기동훈련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10만명에 넘는 군의 과도한 규모로 인해 재조성하여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대대급,연대급 훈련을 진행하도록 조정되었다. 이 계획은 1950년 3월 14일 교육각서 제2호로 육군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이 훈련의 성과도는 당시 부대의 전투효율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12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연대별 전투효율성은 아래와 같았다.



서울을 담당한 7사단을 제외한 거의 전부대가 낮은 수준의 전투효율성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제5연대와 제15연대는 각각 18%로 전부대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전투효율을 보여주었다. 비록 훈련 끝에 6월 15일쯤 되면 연대 대부분이 전투효율성을 50% 이상 기록했으나 후방부대를 제외한 전방부대는 대체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이때 대대훈련을 완료한 부대는 총 16개 대대에 불과하였고 잔여 부대 중 30개 대대가 중대 훈련을 종료했으며 17개 대대는 아예 소대훈련조차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효율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미 군사고문단은 미약하지만 한국군의 방어훈련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한국군의 작전계획에 개입하였다. 당시 군사고문단은 1949년 하반기 미군철수 이후 격화된 38선 분쟁과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 등으로 양측간의 교전이 가시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반년간보고서>에서 한국군의 방어계획을 다음과 같이 기획하였다.


38선 방어를 위해 대한민국은 21개 연대, 2개 독립대대, 1개 기갑연대로 구성된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군은 현재 전술부대의 약 30%가 대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방어계획은 서울로 향하는 접근로상의 ‘거점(Strong Point)’ 방어를 요구한다. 한국 외부의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을 시에 옹진반도의 부대들과 임진강 서쪽의 부대들은 병렬적으로 철수할 것이다. 


매우 우려되는 접근로를 포함하고 있는 제1사단과 제7사단 지역이 가장 중요하다. 동쪽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은 기동을 제한하는 지형 때문에 쉽게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제6사단과 제8사단은 한국군의 예비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침량행위를 저지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군의 예비 병력은 수도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5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사단들은 현재 예하 연대들 대부분이 대게릴라전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군은 긴급 상황을 대비한 이들 예비대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국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줄이고 경찰이 담당하게 하는 것을 기대한다. 우선 순위에 따라 예비대에 부과된 임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계획에 따라 반격한다. 

둘째, 제1사단과 제7사단을 증원한다. 

셋째,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증원한다. 

넷째, 국내 게릴라들을 토벌한다. 

한국군이 현재의 계획을 준수한다면 중공군이 지원하지 않을 경우 북한군을 견제하고 일소할 수 있다.


반년간보고서에 드러난 고문단의 계획은 다소 추상적이었지만 추후 논의를 거쳐 육군본부 작명 제38호로 구체화 되었다. 육군본부 작명 제38호는 A,B,C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했다.


- 방침 : 군은 투명도 제1과 같이 중점을 의정부 정면에 보지(保持)하고 진전(陣前) 에 적을 섬멸하려함. - 전투 각 기(期)의 지도(指導) : 

 

A. 초기(경계선 전투) : 투명도 제1 (A)선에서 진출을 지연 싴힘. 지연 전투는 주진지 전면의 교량 및 도로 파괴를 실시하여 (B)선까지 전진함(교량 및 도로 파괴계획에 의거), 일방(一方) 제2, 제3, 제5사단을 집결하는 동시에 옹진방면과 제8사단은 주작전이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도록 극력견제공격을 취하고 적의(適宜) 유격전을 감행하여 적의 동서측방을 위협함 

 

B. 제2기(주저항선 전투) : 투명도 제1 (B)선에서 전군의 전 화력 및 역습으로 가장 강력한 전투를 실시하여 적을 섬멸 싴히고 만약 부득이한 경우에도 동 선상에 교착 싴힘. 전투지도상 불리한 경우에는 (C)선까지 지연 전투를 유지하여 전진함. 

 

C. 제3기(최후 저항선 전투) : 전 화력 및 역습으로 적 전력을 철저히 분쇄섬멸하여 차(此) 진지에서 최후까지 확보함


여기서 말하는 (A), (B), (C)선은 모두 문산-의정부-춘천-주문진선의 이북 지역에 위치하는데 이 경우 본 작전계획은 남한 전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38선 부근의 충돌이 확대될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애초부터 고문단은 전면전을 대비할 목적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한게 아닌 아닌 38도선에서 충돌이 가시화될 것을 염두해서 만든 방어계획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이러한 작전계획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선은 돌파 당해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던 군의 태도가 방어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존재한다. 이전의 신성모가 그러했듯 군사 고문단은 군부의 북진 시도를 저지하여 군부를 좀 더 방어적인 형태로 바꾸고자 하였다. 이어 고문단의 대북공세 저지가 성공하자 고문단은 장기간 지체된 한국군의 훈련을 다시 재개할 수 있었다. 이 훈련의 주요특징은 방어계획을 위한 것이었다. 육군본부 작명 제38호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쟁보다는 38도선에서의 충돌을 대비한다는 목적성이 더 컸고 때문에 실전에서는 적용될 여지가 불투명하였다. 또한 군사고문단의 훈련계획이 다시 시작된 시점도 1950년 1월부터였기 때문에 한국군의 상황은 늦어도 너무 늦은 후였다. 결과적으로 군사 고문단은 북진을 시도하려는 한국정부와 군을 억제하는데 성공했지만 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수는 없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은 사흘만에 무너졌다. 군과 정부는 이렇다할 방어계획을 수립하지 못하였고 또한 미흡한 철수로 인해 1950년 7월 기준 한국군의 가용 병력은 고작 2만명대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일부 문헌에선 가용병력이 1만 8천명으로 집계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49년 상반기에 걸친 대북공세는 한국군에게 있어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38선 충돌은 당시 한국군의 군사적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훈련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장기간 교전으로 말미암아 훈련이 계속 연기되는 등의 악재가 끊임없이 발생했고 이는 곧 한국전쟁에서 초기 패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38선 충돌은 한국군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준 하나의 시험장이었지만 동시에 한국군의 발전을 가로막은 걸림돌이었다.

 

3줄 요약

1. 전쟁 전, 이승만 정부에서 북한이 시비 거니까 한 번 뒤져보라고 보복공세 검

2. 이후 진짜로 북진 시도하려다 미국한테 걸려서 중단

3. 간신히 끝냈더니 전쟁 터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