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당연히 당신네 국왕이 직접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온 칙사인데, 어찌 소방(작은 변방)의 왕이 우리를 오라 가라 한단 말이오?"


일부러 천황이란 칭호 대신 국왕이라 칭하고, 소방이라 하며 일본을 깔보는 몽골 사신의 말에 몇 번이고 폭발할 뻔했으나, 그때마다 일본 외무(외교부) 대신은 화를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우리 천황께서는 몸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부득이하게 결정된 것이라 결코 일부러 귀측을 욕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허, 참. 이따위 작은 나라에서 천황이니 뭐니 하는 꼬라지가 참으로 우습구만. 뭐, 알겠소. 국왕이 아프다 하니 뭐 어쩌겠소? 자, 들어가세!"


몽골 사신은 다른 사신들에게 손짓을 하며 문을 향해 들어갔다.


사신들이 다 들어가자, 외무 대신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이를 갈기 시작했다.


빠드드득-


처음에 몽골 사신단은 아예 덴노(천황)가 몽골 사신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황제의 조서를 들으라 강요했었다.


어쨌든 그건 넘어가져 잘 해결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짜증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대놓고 덴노를 일본 국왕이라 부르며 폄하하는 건 물론이고, 지금이 전근대라도 되는 마냥 일본을 소방(작은 나라)라 칭하며 비하했다.


'참자, 참자, 저들은 중국도 10년만에 무너뜨린 놈들이다. 조금만 참자.'


하지만, 그렇다고 큰 소리를 외칠 수도 없다.


당장 미국은 그 미친 대통령 때문에 발생한 내전으로 나라가 조져졌고, 내전으로 주일미군도 철수한 판국에 딱히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러시아는 몽골을 경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적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까진 동유럽이 더 중요했으니, 설령 일본이 러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오히려 그걸 몽골에게 알릴 것은 뻔할 뻔자다.


이윽고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친 외무대신은, 사신단을 따라 문을 향해 들어갔다.


그가 어떤 황당한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 채.


***


건물 내부로 들어선 몽골 사신단은, 곧 앉아 있는 일본 덴노를 볼 수가 있었다. 덴노는 곧바로 일어서서 사신단을 향해 악수를 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몽골 사신은 덴노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몽골 황제의 조서를 꺼내기만 했다.


당황한 덴노와 기자, 일본 측 관료들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몽골 사신은 옆의 역관에게 몽골어로 무어라 말했다.


역관은 잠시 사색이 되었지만, 사신이 독촉하는 탓에 결국 할수 없이 일본어로 통역을 시작했다.


"일본 국왕은 세 번 절하며 무릎을 꿇고 대몽골 황제 폐하의 조서를 받들라!"


너무 당황에 빠진 나머지 역관이 적당히 필터링을 거치지도 않고 바로 내뱉은 덕에, 몽골 사신이 내뱉은 말의 뉘앙스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말이 마쳐지자마자 건물 내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


특히 외무대신은, '지금 저놈들이 왜 이미 합의한걸 또 지랄하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빛으로 욕을 했다.


플래시를 터트리던 건물 내부의 기자들도, 일본 측 관료들도, 일본 덴노도 사신단을 향해 경악, 의문, 분노 등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덴노가 무릎을 꿇지 않자, 몽골 사신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덴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몽골어로 말했다. 


역관은 눈을 감고 일본어로 그것을 통역했다.


"나는 분명히 일본국왕 전하께서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며 조서를 받들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왕 전하께서는 어찌 소국의 군주로써 그리 당당한 자세로 서 계시면서 대국의 조서를 듣고자 하십니까?"


통역관이 말을 끝마치자,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이제 덴노를 포함한 일본인들은 아예 분노어린 시선을 몽골 사신단에게 보내고 있었고, 몽골 사신단도 덴노를 노려보며 어서 꿇으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때, 몽골 측 관료 한 명과 눈을 맞춘 일본 측 관료 한명이 나서며 서투른 몽골어로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왕 전하'께서 다리가 편찮으시어 무릎을 꿇을 수가 없으십니다, 다음에는 필시 본래의 예법대로 행할 것이니, 부디 이번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면 대국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겠습니다."


일본어로 이 말을 했다가는 당장 돌을 맞아 죽을지도 몰랐으니, 배운 지 얼마 안된 서투른 몽골어로 해야지 그나마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서투른 몽골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뉘앙스는 그대로 전달된 모양인지, 몽골 사신단은 그새 노기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아, 아프시다는 게 그것 때문이셨군요? 이거, 몰랐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방금 전 몽골어로 말한 일본 관료와 눈을 맞추었던 사신 중 한명이 급히 나서며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역관은 그것을 통역했고, 덴노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으나 방금 전의 그 금강불괴같은 표정은 지워진지 오래였다.


결국, 일본 덴노는 앉아서 국서를 듣는 것으로 간신히 해결된 듯 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하나 더 있었다.


몽골 사신이 일본 덴노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서서 국서를 펼쳐들었고, 그것을 양손으로 잡으며 몽골어로 읽었다.


역관은 그것을 통역하려다가, 첫 문장에서부터 다시 멈칫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


몽골 사신은 아예 총을 꺼내서 쏠 기색으로 역관을 노려보았고, 역관은 정말 이것만은 안 된다는 필사적인 몸짓을 했지만, 사신이 정말로 허리춤의 총에 손을 가져다대자 울며 겨자 먹기로 통역을 시작했다.


"대몽골 황제가 일본 국왕에게 조유하노라."


간신히 수습된 분위기가 또 다시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짐이 생각하기로, 작은 나라의 군주는 큰 나라와 서로 접경하였으면, 서로 소식을 주고빋으며 친목을 다지도록 힘쓰는 것이 상례였다.


하물며 짐은 분명한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전부 영유하였고,


먼 곳의 다른 나라들도 우리의 위엄에 송구스러워하며, 짐의 덕을 품은 사람은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중간 부분에서는 몽골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부분의 국서가 있었고, 그 이래로는 그 동안 중국과 통교했는데 왜 중국을 모두 차지한 몽골과는 통교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국서(国書)를 지참시킨 특사(特使)를 보내어 짐의 뜻을 널리 알린다.


바라건대, 앞으로, 서로 통교(通交)를 하면서 친분을 맺고, 좀 더 서로 친목을 두텁게 하고 싶다.


자고로 성인(聖人)은 사해(四海) 를 하나의 가족으로 해야 하는 법이다.


서로 친분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한 가족의 도리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다음 부분에서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일본인들이 대놓고 얼굴을 일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명을 따르지 않아 군대를 사용하는 것을 누가 좋아할 것인가.


국왕은 그 점을 잘 생각해 결정하도록 하라. 더 할 말이 없으니, 이만 줄이겠다."


즉 국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일본 국왕이 직접 몽골의 수도로 와서 칭신을 하라, 안 그러면 군대를 동원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니 잘 생각해라.'


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