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에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이 두 분이 이 나라에서 몇 년간 일하시며 익숙해진 이 나라의 말을 나에게도 가르쳐주셔서, 어느 정도 이 나라의 말이 익숙해지긴 했어도, 우리 나라 말의 억양이 섞인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처음 전학을 와서 반의 아이들에게 내 소개를 할 때, 목소리가 떨리며 어눌한 말투가 섞인 내 말투가 퍽이나 우스꽝스러웠던지, 반 아이들은 선생님이 주의를 주셨음에도 킥킥거리며 은근히 웃었던 것은 참으로 부끄러웠던 경험이었고, 또 그 당시의 나에게는 첫 인상을 망쳤다는 절망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행히도 기우였다.


반의 아이들은 내 실수를 그렇게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살던 곳에서의 삶, 전학 이유, 자기네 나라의 말을 생각보다 잘 하는 이유 등을 물어보며 관심을 표할 뿐이었다. 간혹 짖궃은 아이들이 그걸 들추며 가끔 놀리기는 했어도, 진지하게 깔보며 조롱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내가 워낙 체육을 잘 했던지라 남자 아이들과는 곧바로 친해졌고, 그렇게 처음의 부끄러웠던 경험은 잊어버리고, 반 아이들과 꽤 친해지며 나름 즐겁게 학교를 다녔었다.



그 생활이 깨진 것은, 북조선을 멸한 우리 몽골 군대가 판문점을 넘어 북조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그걸 말리던 이 나라의 군인들을 일방적으로 죽인 그 사건 때부터였다.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점차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싸늘해지기 시작했고, 점차 나와 친구들과의 관계는 하나 둘씩 멀어져갔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정부의 잘못이지, 너 같은 애가 무슨 잘못이겠냐고 나름 감싸주는 아이들도 많았었다.


완전히 고립된 것은, 대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칙사들이 내뱉은 말이 알려졌을 때였다.


운명의 그 날. 반에 설치된 tv에서 나오는 우리 몽골의 칙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몽골의 봉영원천황제는 삼한의 통령에게(이것도 순화된 것이고, 실제로는 아예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며 대놓고 하대했다.) 가르침을 내리는 글을 보낸다고.


한 나라의 수장으로써, 나라의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이 사단을 일으킨 주제에 어디서 감히 황제의 군대를 탓하냐고.


작은 나라가 먼저 잘못을 저지르고 감히 큰 나라에 잘못을 돌려 책임을 면피하고자 하냐고.


황제의 군대가 남쪽 삼한 땅을 짓밟는 꼴을 목도하고자 하냐고.


그러나 특별히 자비를 베풀겠다고.


대통령이 직접 수도인 대도(베이징)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황제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그리한다면 이 작은 나라의 죄를 용서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리고, 이 나라의 국민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칙사는, 기자들의 앞에서, 아주 당당하게 그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