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그 혁명이 인민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기록물은 중앙 기록보관소와 성(省) 기록보관소, 시(市)·현(縣) 기록보관서로 나뉘어 보관된다. 중앙 기록보관소는 접근이 어렵다. 공산당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했다. 디쾨터 교수는 성 기록보관소가 중앙에서 보내온 문건뿐 아니라 하부에서 보내온 보고서까지 사본을 다 갖추고 있어 자료가 풍성할 뿐 아니라 비밀 해제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허베이(河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산둥(山東), 쓰촨(四川), 윈난(雲南) 등 10개 성 기록보관소 문서를 토대로 대약진운동이 펼쳐진 4년간 중국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한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를 집필했다. 대약진운동은 농업과 산업 집산화를 추진한 인민공을 통한 사회주의식 생산량 증대운동으로 마오에 의해 대대적으로 주도됐지만 허위 보고와 이를 토대로 한 계획경제로 인해 수천만 명을 굶어 죽게 만든 대참사를 낳았다.

디쾨터 교수는 이 비극이 마오의 과대망상과 편집증과 그에 부화뇌동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초래한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임을 회의석상의 발언과 구체적 통계로 뒷받침했다. 그는 10개 성의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그 4년간 4000만~4500만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3000만 명 안팎으로 알려진 과거의 추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들의 희생이 잘못된 계획경제 때문만이 아니라 중앙에서 제시한 목표치 달성을 위해 당 관료들이 가장 야만적 방식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약탈했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점에 있다. 당 관료들은 자신들이 배급하는 식량을 그들의 노동력과 연계함으로써 힘없고 약한 자들을 더욱 사지로 몰아넣었다. 작업에 뒤처진 사람은 한겨울에 벌거벗게 하는가 하면 일이 힘들다고 한 임산부를 인두로 지지는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마구잡이 폭력에 내몰려 자살을 택한 사람만 100만~300만에 이른다고 디쾨터 교수는 추산했다. 그러면서 마오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추진한 것은 ‘중국 인민의 현대적 농노화’였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마오는 이런 실태를 보고받고도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또 “성취가 아홉 손가락이라면 실패는 한 손가락”이라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다가 사태가 악화되자 중소분쟁으로 소련이 식량공급을 중단해서라더니 마지막엔 반혁명분자들의 계급 복수 행위 때문이라는 허구의 변명을 늘어놨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같은 고위지도자 역시 그런 실상을 알면서도 마오와 중국의 위신을 세우려고 같은 공산국가인 알바니아와 제3세계국가에 무상으로 식량을 공급하거나 6억 위안이 넘는 돈을 원조하는 어이없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영웅호걸 중에서 이런 대참사를 막기 위해 마오에게 도전한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6·25전쟁 영웅으로 당시 국방장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와 권력서열 2위였던 류사오치(劉少奇)였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다가 그 참혹한 실상에 분개했다. 펑은 1959년 7월 “단점이 성과를 9대 1로 능가한다”고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가 공개비판의 대상이 돼 유폐됐고 그를 흠모하던 이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몰아닥쳤다. 이때는 침묵했던 류사오치는 1961년 5월부터 서서히 방향타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1962년 1월 “후난성 농민 곤경의 30%가 천재 탓이고 70%가 인재 탓”이라고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론 업적 대 실패의 비율이 7대 3”이라고 마오의 체면을 세우는 발언으로 대약진운동을 중단시켰다.

마오는 이런 온당한 비판과 충고조차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있다가 3년 뒤 중국과 공산당을 산산조각 낼 문혁을 배후 조종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펑더화이와 류사오치에 대한 끔찍한 테러를 사주하게 된다.

디쾨터 교수의 이 책은 출간 다음 해인 2011년 영국에서 최고의 논픽션 작품에 수여하는 새뮤얼 존슨 상을 수상했다. 디쾨터 교수는 이에 힘입어 2권의 책을 더 발표한다. ‘해방의 비극-중국혁명의 역사 1945~1957’과 ‘문화대혁명-중국인민의 역사 1963~1976’이다. 전자는 1945년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이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대결에서 승리하고 1949년 성립하게 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의 역사를 다뤘다. 후자는 중국공산당이 스스로 인정한 마오의 과오로서 문혁이 중국 인민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고발했다. 6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출간으로 한국에서 인민 3부작을 완간하게 된 디쾨터 교수를 여러 차례에 걸쳐 e메일로 인터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