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호텔에서 

 

여운형이라는 일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장관 1명에게 일본제국 내각의 장관들과 장군들, 전문가들이 달라 붙었지만

 

"여운형 1인"을 이기지 못함 ㅇㅇ (병신같은 일본내각)

 

토론 결과는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의 조선 지배는 불합당하다는것이 명백해짐 + 일본 좌익세력 전체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짖음 ㅇㅇ

 

 

 

갓운형 센세... 센세만 믿습니다...

 

 

 

(근거자료)

 

3.1 운동 실패 후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그때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안건이 나왔는데, 여운형은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어서 많은 정력이 소모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동지들끼리 세력 다툼의 소지가 있어 독립운동에 쏟을 힘을 정부 내치에 쏟는 비효율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으며, 정부가 아닌 당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해도 충분히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대다수가 정부 수립에 손을 들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그의 생각대로 운동 및 사상 방향과 임정 재건의 방법론에 대한 의견차로 분열이 거듭되었으며 이광수윤치호와 같은 회의적 지식인이 등장하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외에도 대한이라는 국호가 망한 나라의 국호이므로 사용을 반대했고, 나라를 망쳐놓은 원인인 조선 황실에 대한 우대도 반대했지만 반대 의견 쪽의 사람들이 더 많아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임정 설립 시에 여러 가지를 반대했지만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외무부 차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촬영. 앞줄 오른쪽부터 이유필,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왼쪽 김구, 다섯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여운형이다.


특히 외교 부분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3.1 운동을 혹독하게 진압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이 극히 안 좋아지게 되자, 일본의 코가 척식국 장관은 여운형을 도쿄에 초대하여 국빈으로 예우하고 그가 조선 합방을 수긍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한다. 이는 임정 중심 세력인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 임정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때 임정 사람들이 '가면 죽을지도 몰라, 가면 변절할지도 몰라'라면서 막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창호는 대인배스럽게 "몽양은 그럴 리 없다"며 여비로 30원을 들려보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은 코가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 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코가 장관을 설득시킨다. 코가 장관은 대화를 하면서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하여 여운형이 떠날 때 "여운형 만세!"를 외쳐서 여운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운형은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 조선 주재군 사령관 우츠노미야 다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 체신대신 노다 우타로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를 설득했다.

곧이어 여운형이 도쿄 호텔의 연사로 초대되어 조선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을 때 합방에 대한 친교적 발언은커녕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앞에서 대놓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폭탄 발언을 한다. 이 때문에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로 구성된 하라 내각이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 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의해 하라 타카시 내각이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내각을 일컬어 여운형 국회 혹은 여운형 내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