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참고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씀)



고려 왕건의 훈요 10조에 보면


○ 其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灾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 8조는,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로 호남인들을 배척한 역사도 있고



조선 순조대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차별이 원인임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 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택리지 중에서



함경도도 까임

 "다른 지역에서는 모두 의병이 일어났는데 함경도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뿐만 아니다. 함경도 백성들은 국왕 선조의 큰아들 임해군을 잡아다가 일본군에 넘겼다.

함경도 무사들은 역대 임금들에게 계속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차별이 일부 해소됐고 정조 때 차별이 전면 철폐된다. 정조는 즉위년(1776년)에 함경도 무사들에 대한 차별을 전면 철폐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한 뒤 함경도 무사들을 적극 활용했다. 조선 정부에 잠재적인 위협 세력이었던 이들이 나라에 충성하는 장용영 군사들이 된 것이다.



지금 시대에서도 이외의 지역을 보면

뭐 경상도는 유교탈레반이라 까이고 충청도는 멍청도라 까이고 강원도는 감자라 까임



우리나라 지역감정이 갑자기 생긴 개념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