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들 강경 보수우익 기준으로,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어서

"훈장 받고 간첩 보낸 좌빨이다! 내각에서 자리 차지한 월북자다! 꺼져라" 인식하겠지만, 전쟁 범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타당하냐, 뜬금없는 현충일 김원봉 드립의 적절함은 별건으로 두자. 서훈 타당성은 앞으로도 계속 갑론을박 가능성이 높으니까)


0. 월북

해방 정국에는 우익의 한국민주당의 송진우나 장덕수도 암살 당하고, 

여운형이나 나중에 유명한 김구가 암살당하는 등 테러가 빈번했지.




1. 김원봉은 조선노동당원이 아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75505


먼저 사실부터 확인해보면, 일부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원봉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당원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노동당 핵심간부'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 됩니다. 약산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군소 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2.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느냐?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MONO1200518791_2



6월부터 신문이고, 라디오고, 사방팔방에 조작질인데(1950년 6월부터 지금 2019년까지, 전쟁 책임을 모조리 남측과 미국에 돌림) 

진짜 전쟁을 주도했던 정치가들이나 지휘관같은 핵심 인사들 말고는 그냥 끌려가는 거임.

죄가 있다면 월북한 죄이거나, 북측 인민들처럼 선동당한 죄임.

구소련이나 중국 측 문서 파봐도, 김원봉이가 전쟁에서 뭐 대단한 역할을 했다? 이런 건 없을 거임.


오히려 전쟁에 반대했다는 증언은 존재함.



3. 훈장은 무엇인가?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75505


이후 김원봉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에 취임했습니다. 국가검열상은 감찰, 감사 기능을 맡는 기관의 장(長)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감사원 기능을 하는 건데, 국가검열상은 장관급 직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없는 자리입니다. 


그 후 김원봉은 6·25 전쟁기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았습니다. 1952년 3월 19일에는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지도일꾼'으로 훈장도 받았는데, 김원봉이 받은 훈장은 최고 등급인 국기훈장보다 낮은 '로력(노력)훈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노동상에 임명됐습니다. 이후 1957년 9월 20일에는 내각 명단에서 제외됐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습니다. 1958년에는 환갑을 맞아 또 한 번의 '노력훈장'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 참가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문서 등에 김원봉이 직책에서 해임됐고, 체포 직전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하다 체포됐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북한 권력 구조의 특성상, 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서는 핵심 권력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북한이 추구하는 건 당국가 시스템"이라며, "(노동당원이 아닌) 김원봉이 맡은 직책은 사실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광운 연구관은 "김원봉이 1948년 무렵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대표 인물로 대우받았으나 북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원봉이 조선인민공화당이라는 군소정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면,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책을 맡아도 큰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성장 박사 역시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면서 점점 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됐다고 봤습니다. 특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많지 않은 상징적 직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김원봉이 6·25 전쟁 개전 결정에 참여한 주요 권력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원봉이 맡은 직책이 권력의 중심과는 떨어져 있고, 특히 노동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김원봉이 전쟁기 받은 훈장 역시 군사적 공로라기보다는 후방에서 군량미를 생산하는 등의 기여 때문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다만, 이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김광운 연구관 역시 김원봉이 북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기여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김원봉이 인공 초대 내각에서 장관급 자리를 맡았고, 헌법 제정 시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정권에 기여해서 불쾌는 하겠지만, 

전범의 정의에 해당되지도 않고, 후방에서 도장이나 찍고 농민들 만나러 다닌 거 말고는 한 게 없음 왜? 실권자가 아니니까

김원봉이 유명하니까 이름값을 이용하려고, 적당히 대우해준 거라고 생각 

군사재판에 섰어도, 무죄 나올 확률이 큼.


간첩 파견설? 사실로 단정짓기엔 굉장히 불확실하다. 김원봉이 군권을 가지고 있거나 김일성의 신임을 받은 측근이 아니기 떄문


4. 광기와 조작의 시대

제1공화국 시절이 극렬한 대치 상황이기에 가장 간첩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억울한 사람이나 간첩 조작도 굉장히 많았다는 점을 인식하길 바람.

반민특위해산-국회프락치 사건에, 부산정치파동-국제공산당 사건에, 조봉암 처형 사건까지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4869


1950년 10월 초 부터 1951년 5월까지 김창룡은 숙군 때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북한과 협조한 사람들은 이미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게 됐다.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어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떻게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난 것일까?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 당했다. 

하지만 김창룡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의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5. *** 명의 도용의 시대

'민족주의 우익' 납북인사들이 간첩을 내려보낸다고 알려진 게 제1공화국 시절의 일임. 북측이나 남측이나 선동에 여념이 없었음

남측: 믿을 사람은 이승만 박사랑 자유당밖에 없다는 북풍 몰이용으로

북측: 좌우익의 애국지사들이 모두 북측을 인정한다고 이용해먹기 위해서

(군사 분야에선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게 유용하기도 하고)


미군정 민정장관 출신 온건파 민족주의자 안재홍 선생



조소앙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납치당한 조소앙이 뉴델리를 활보하며 신익희를 만났다고 조작

납치당해서 실권도 없는 조소앙이 간첩 지령과 관련있다는 것이 당시 신문임

195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독립당 당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연루된 이 사건에서 이승만 정권은 북한에 있던 조소앙을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이 배후 조종을 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대상을 알고,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북한 간첩들을 지휘했다는 게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음

어느 측인지는 남측인지 북측인지 불확실하나, 명의도용의 확률을 배제해서는 안 됨.


6. 김원봉의 최후

8월 종파 사건 당시엔, 실권이나 세력이 없는 망명자 출신이기에 살아남았으나

명성은 드높고, 납북인사들의 일에(중립화통일론)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은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함


1. 단순 숙청설(은퇴설) 2. 수용소 자살설 <- 3. 남한 망명시도설


01)


02)

03)

04)


05)

편하게 살고 싶었으면, 홍명희나 백남운처럼 가늘고 길게 살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