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청년의 거주처: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난이 없다 치고’ 사는 일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다.
빈자들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난 절대 다수의 빈곤 청년은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등에 살고 있었다. 연립주택이 들어선 도시 곳곳에 이들이 산다. 200만~500만원의 ‘목돈’이 있으면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월세만 내는 고시원에 살아야 한다. (이와 비교해 빈곤 노인은 시골에 주로 산다. 도시에 사는 경우는 쪽방, 찜질방, 고시원 등을 부유한다)
다만 고시원과 반지하방과 옥탑방은 달동네와 다르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유대감이 없다. 얇은 벽을 두고 같은 고시원에 살아도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한국의 빈곤은 더 이상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원자화’된 빈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그 나라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실제로 브라질 총기사고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전시 수준이다. 매년 2억 인구 가운데 3만7천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전쟁 치고도 참혹한 전쟁이다.
그러나 브라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도 월드컵을 치렀는데 뭘.’ 한국에선 매년 인구 10만 명당 3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5천명이 자살한다. 어느 전쟁이 이보다 참혹한가. 실제로 브라질의 총기사고 대부분은 슬럼에서 발생한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빵을 뺏는다. 혁명은 ‘폭력의 내적 순환’이 단절되면서 시작된다. 왜 우리끼리 빵을 뺏어야 하지? 저 옆 동네 부잣집을 털러 가자. 아니지. 왜 도둑질을 하지? 정당하게 우리 몫을 찾자. 정부를 엎어버리자. 자, 그 총을 같이 들자.
동서고금의 혁명 대부분이 슬럼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한국은 확실히 빈곤층에 의한 혁명 가능성을 거세했다. 한국의 빈곤층은 슬럼에서 봉기하여 궁전을 장악하는 도적떼가 될 수 없다.
모든 자살을 빈곤과 직결시킬 수는 없지만, 자살은 결국 고립의 결과이고, 고립의 절대다수는 사회경제적 빈곤과 연결돼 있다. 칼을 들어 행인을 찌르는 것과 제 목을 찌르는 것의 차이는 백짓장 한 장보다 얇다. 심리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도 고립된 한국의 빈자는 살인 대신 자살을 택한다. 브라질의 슬럼이 참혹한가, 한국의 지하방이 참혹한가.
쓰래기지. 한국 대기업문제니 고용이니 경제니 난리라도 본인 먹고사는것엔 문제없음. 혼자벌어 혼자 못먹는다? 일 못하는 미성년자나 장애인이 아닌이상에야 개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부양가족이 문제다? 왜? 일해. 사업했다 실패했어? 빚쟁이라 벌어도 의미가 없어? 아무리 빚쟁이고 박살났어도 뭐라도 일해보면 먹고 살수는 있는법. 법적으로도 최저생활비 이상으로 때갈수는 없는게 한국법이다. 대한민국에서 스스로 빈민이라 생각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볼수밖에 없어. 혁명이 없다? 혁명은 희망이 없을때나 발생하는게 빈민촌의 혁명이야. 한국에서 밥못먹어 굶어죽는 경우가 있냐? 태반이 스스로의 문제고 세상에 나가서 치열하게 경쟁하지 못해서 스스로 말라죽을뿐이지. 브라질 범죄율로 죽는사람보다 한국 자살율이 높다? ㅎㅎ 매년 범죄와 총격전으로 죽어나가는 갱과 경찰까지 합쳐보면 예기가 달라짐. 혁명이 거세되었다? 그럼 묻지마 범죄나 자살폭탄테러라도 해야한다는 소리인가? 당연히 스스로 세상과 싸울 생각도 못하는 스스로 알에서 부화하지 못하고 알에서 죽어버리는 지하방이 백만배는 깔끔하고 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