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의 침략을 병행하여 이루어진 일본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공. ~~???: 한국은 일본에게 침략당한 적 없어~~


푸가놈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원조. 모든 것을 얻은 새끼가 남의 땅에 쳐들어갔다가 자기 정권도 말아먹었다.


사실상 조선 역사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총력전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좆이 돔황을 너무 못 친 나머지 하도 빨리 끝나 총력을 쓰기도 못했고, 개화기에는 고좆새끼와 민가놈들이 총력을 다해 나라를 팔아먹었다.


== 발단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열도 통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했다. 이 새끼는 일본 열도를 통일하기 전부터 치매가 왔는지 1585년 관백 취임 시점부터 "우리는 앞으로 매년 여름을 조선에서, 매년 겨울을 명나라에서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좆됐다 싶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는 사실 쌀이 1만 석은커녕 5천 석도 안 나서 다이묘가 못 되는 상황이었는데 징징거려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쌀이 적게 나니 대마도는 인근에서 많이 나는 해물과 소금을 가져다가 조선에 팔고 쌀을 사 먹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전쟁이 나면 대마도는 다 굶어 뒤질 게 뻔했다.] 자신이 조선에 통보하여 직접 통신사를 파견토록 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했고, 조선이 그뭔씹을 시전하자 조선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을 모두 잡아 보내는 노력을 보여 마침내 조선으로부터 통신사를 받아냈다.


근데 히데요시 이 새끼는 통신사들이 항복 사절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심지어 항복 사절이래도 사신인데 얘들 있는 앞에서 애기 기저귀 갈고 옷 갈아입고 관종짓을 했다.


아무튼 통신사는 일본을 잠시 둘러보고 히데요시를 만난 후 돌아왔는데, 황윤길 등 대다수의 인원들이 "히데요시는 무서운 인물이다"라고 했으나 부사 김성일이 "히데요시는 이명박(쥐)과 같아서 큰 그릇이 못 된다"고 했고, 이에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대깨문이었는지 그 말을 믿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고 설득하여 임진왜란의 예비대로 대비시켰으나[* 위의 표를 보면 16군 사령관이 도쿠가와이다] 결과적으로는 뻘짓이 되었다.


=== 일본군의 준비 ===

일본군은 본토에서 도합 16개 군, 총병력 47만 2천 명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 중 규슈, 시코쿠, 주코쿠의 8개 군이 먼저 상륙할 예정이었고, 간토와 추부 등의 8개 군은 예비대로서 본토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당시 명나라가 '''명목상''' 군적에 올려놓은 병졸이 60만 명이었고[* 다만 여기에는 예비군은 빠져있다], 동시기 지중해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오스만 튀르크가 온 나라를 쥐어짜도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한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일본은 정말 당대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 대군을 모은 것이다. 


수군으로는 1척의 니혼마루[* 초대형 안택선. 원래 이름은 "키슈우"였으나 도요토미가 자신의 기함으로 삼으며 이름을 고쳤다.]와 최소 30척 이상의 아타케부네(안택선), 그리고 2,300척 이상의 대소 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를 동원하였다. 이는 단순히 배의 숫자로만 본다면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해군'''이었으며[* 레판토 해전 당시 온 지중해의 군함이 모인 게 450척 남짓이었다] 배의 배수량으로 보면 '''에스파냐 아르마다의 6~10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이 47만 명의 대군 가운데에는 '''최대 5만 명의 조총병'''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중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가 조선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1만 5천 기 이상의 각종 기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들 대부분은 예비대에 머물렀고 실제 조선에 투입된 것은 4천 기도 되지 않았다.]. 공성병기를 다루는 특수부대 5만여 명도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군수물자를 나르고 길을 내고 선박을 건조하는 데 투입된 인력은 수백만 명[* 히데요시 행장기의 기록상으로는 "모든 사내를 동원했다"고 적었고 숫자는 600만 명인데, 이건 당시 일본 인구 1,500만에서 노인, 어린이, 여자 빼고 다 적은 수치로, 정황상 구라같다. 일본의 당시 조세로 감당 가능했던 군수 인력은 당시 일본 생산 인력의 3분의 1 정도인 100만 명~200만 명 정도가 한계였다.]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군이 집결시킨 군대는 과장 없이 고구려-수 전쟁 이래 '''동아시아 사상 최강, 최대의 군대'''였으며, '''만약 예정대로 이 병력이 정상적으로 투입되었더라면 조선은 전토가 초토화되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제해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후방부대는 반도 못 건너갔다.


=== 조선군의 준비 ===

조선도 나름대로 준비는 했다. 성축을 보수했고, 병선을 개수했으며, 유능한 장수들을 낙하산 급으로 빠르게 특진시켜 요직에 배치시켰다. 이때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도 그중 하나다. 또한 군사훈련을 재개했고 병력 명부를 재검토했으며, 그동안 관례상 눈감아주던 허위로 기록된 것들을 철저하게 찾아내어 고쳤다.


이순신, 이억기, 박홍 등은 고작 10여 척에서 많아야 40여 척이던 각 수영의 판옥선들을 개수하고 화포 발사를 훈련시켰으며, 임전태세에 준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근데 수군 전력의 중핵인 경상우수영은 그만 '''원균[* 천연두균, 페스트균과 함께 인류 역사 3대 균이다]에 감염되는 대재앙'''을 맞아 100여 척의 판옥선을 훈련도 안 시키고 놀았다.


또한 기병 전력을 확충하여 2만여필 정도의 군마를 확보했으며, 무기고를 수리하고, 전라도에서는 군량미를 수습했다.


아무튼 전운을 감지한 조선도 나름대로 착실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조선에게는 세 가지 엄청나게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는 일본의 침략이란 을묘왜변이나 삼포왜란에서 겪었던 "조직화된 왜구의 침략"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전력이라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정도는 차단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이 생각하는 조선에 대한 침략은 이제까지 도요토미가 다른 곳의 봉주들을 쓰러뜨린 것처럼 "정복전쟁"이었다.


둘째는, 조선의 대전략은 대부분 북방의 여진족을 대적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져 온 주력부대인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적들의 주력은 산성에서 회피하고 기동대를 움직여 적들을 거점 단위로 타격해 무력화하는 기동전을 선호했는데, 문제는 이게 "완전한 침략군"인 일본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중장기병이 조총 앞에 맥을 못 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당시 전국시대로 담금질된 일본의 국력이 이미 조선을 너무나 까마득하게 초월하고 있어서 절대적인 체급의 차이가 '''노력이나 현명한 대처 따위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멕시코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을 전면전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물론 일본군에게도 상당히 큰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첫째는, 분명 일본의 국력이 조선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과 반도가 바다로 갈려 있다는 한계상 그 국력을 100% 온전하게 투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간 기착지라도 좋으면 모를까, 그 중간 기착지라는 놈이 험준한 산맥에 항구 만들기도 엿같고 쌀은 5천 석도 안 나오는 대마도였으니...


둘째는, 봉건체제라는 한계상 일본이 자신의 국력을 온전하게 뽑아내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부대 단위의 결속력은 뛰어나지만 장수 간의 결속력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우키다 히데이에의 중재와 조선군의 반격으로 인한 위기가 없었다면 아마 가토와 고니시는 조선에서 피를 봤을 것이다.


셋째는, '''하늘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주유]]를 낳을 때는 항상 [[이순신|공명]]을 함께 낳는다는 사실이었다.'''





추가앙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