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개 ==

=== 경상도 방어선 전역 ===

==== 부산진성 전투 ====

1592년 4월 13일 오후 8시경,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제1군은 18,700명의 병력과 전투선 700척을 이끌고 절영도에 상륙했다. 이에 부산진성의 정발은 야전기동훈련을 겸한 사냥을 행하던 중, 급히 성으로 돌아가 군민을 수습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동시에 경상좌수사 박홍은 보유하고 있던 판옥선들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혔다. 당시 경상 좌수영이 기동 가능했던 전선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5척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이미 바닷길이 막혀버린 이상 자침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감천을 점령하고 정발에게 항복하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성 안의 백성들이 매우 노하여 전령을 정발에게 데려다 주지도 않고(...) 죽여서 코와 귀를 베어 돌려보냈다. 이에 4월 14일 오전 5시~6시경 동이 트기 시작하자 고니시는 병력을 움직여 부산진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서문 앞 고지대로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사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정발은 그 지역을 향해 활과 각종 총포를 쏘게[* 프로이스의 기록에서는 "조선군이 구리로 된 포를 쏘며 맞섰다"고 적었다.]하는 한편, 동시에 서문 앞으로 날카로운 마름쇠와 사금파리를 뿌려 일본군의 공성병기 진입을 어렵게 했다.


이에 일본군은 10시경까지 물러났다가 다시 돌격해왔는데, 전술했듯 조선군이 서문 앞에 마름쇠를 뿌렸기 때문에 일본군은 서문을 우회하여 북문으로 돌진했다. 이때 조선군이 북문에서 어떻게 맞섰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정황을 보면 정오경까지는 일본군이 북문을 깨뜨리고 부산진성 내부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산진성에 있던 조선군의 정규병력은 527명이었고, 징발된 병사나 군민까지 합치면 2,500여 명 정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성문이 깨지고 일본군 1만 8천 명이 내부에 돌입하자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밀렸으며 단병접전에 능한 일본군에 의해 조선군과 군민은 모두 도륙되었다. 정발은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조총을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사상자 약 140여 명이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고니시는 이 지역에 일본군 항구를 건설하는 한편, 곧바로 근방의 다대포진성으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