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대의 창설


1946년 2월 26일 전북 이리(裡里)에서 창설된 국군 제3연대는 창설과 함께 제2여단 예하로 편성됐다. 초대 연대장은 김백일이 맡았고 김백일은 1946년 2월 26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대장 직을 수행하였다. 당시 3연대는 타 조선경비대 부대와 마찬가지로 향토연대였다. 창설 구역에 거주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대 연대장 김백일은 3연대 창설 직후부터 3연대 소속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과 남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김백일이 결혼식을 열었을 때에는 결혼식에만 무려 150만원을 쓰는 사치까지 보여서 이에 참다못한 3연대 장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3연대 장병들은 급식상태도 매우 낮았기에 강냉이 밥만 먹고 간신히 연명하는 신세였다.


이때 시위 주동자는 3연대 2대대장 백인기였다. 그는 1946년 10월 3일 3연대 소속 장병 43명을 이끈 채 시위를 주도했고 고위장교들에게 진급제도의 불공정, 이름표에 한글만 사용 및 미 군사 고문단의 영향력 배제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진압되면서 그 중 34명이 구금됐다. 하지만 다음날 A,B 중대장들이 나서서 백인기의 지휘 하에 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은 엄격한 미군 감독으로부터 해방될 것과 명령서에는 반드시 한글만 사용하고 영창에 갇힌 2명의 경비대원을 조치, 마지막으로 연대장 김백일에게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대장 김백일은 이들과 면담을 가졌고 결국 김백일은 연대장직에서 사퇴하겠다고 선언함으로서 시위는 막을 내렸다. 이로서 연대장 김백일은 연대장 자리에서 물러나갔다. 이후 미 군정은 즉각 3연대장 자리에 송호성을 임명시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고 송호성은 시위를 일으킨 경비대원을 달래며 1946년 12월 13일 연대장 자리에서 떠났다. 


송호성이 연대장 자리에서 떠난 직후에 미군정은 다시 김백일을 연대장으로 복귀시킴과 동시에 1947년 9월 12일 연대장 김백일을 임선하로 교체하였다. 임선하는 1948년 7월 25일까지 연대장 직을 맡았는데 하필 이 시기 때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고 따라서 경비대 내에서는 대대적인 숙군이 진행되었다. 특히 제3연대는 과거 김백일 퇴진 시위 때 참여했던 경비대원들이 대거 숙군 당하였고 기타 몇백명의 사병들도 역시 덩달아 숙군을 당했다.


이 숙군으로 인해 300여명의 사병들이 사라졌다. 당시 숙군을 지도한 사람은 2대대 예하 5중대장 김용 중위였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대대장 조재미마저 빨갱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격이 포악했으며 특히 좌익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해당 숙군에서 경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사병들을 전부 인민혁명군과 연루시켜 취조하였다. 이리하여 숙군을 통해 강력한 입지를 얻은 5중대장 김용은 대대장 자리를 사실상 독차지하게 되었다. 대대장 조재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어 자신이 직접 대대를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다.


한편 제3연대 주둔지는 1948년 2월 15일을 기하여 전주로 이전됐고 7월 25일에는 연대장이 함준호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2달 후 여순사건이 발생해 반군토벌사령부가 편성되고 여기서 3연대 상급부대인 제2여단이 반군토벌사령부 소속으로 배속되면서 3연대는 12연대와 같이 현지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여순사건 진압



그러나 출동명령을 받은 3연대는 막상 지휘부로부터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평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당시 2여단장 원용덕이 3연대장 함준호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원용덕은 연대장 함준호 대신 부연대장 송석하에게 출동부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때 3연대에게 떨어진 작전계획은 먼저 대전의 12연대와 협력해 북쪽으로부터 여수를 포위하고 그 후 종고산 방향을 따라 반군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3연대 이동경로


이에 의거한 제3연대는 먼저 부하들에게 여수사람들은 모두 좌익이니 의심되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10월 22일 순천으로 가 순천에서 반란군을 진압함과 동시 매곡동 및 순천농림중학교에서 부역혐의자를 찾아내어 일본도와 BAR 자동소총으로 약 수백명을 학살한 뒤(2대대 5중대장 김용 중위) 수색대대와 기갑연대와의 합동공격을 개시하여 10월 25일 덕충동 종고산에 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3연대가 체포한 민간인들은 불편하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전원 총살됐다.


덕충동 종고산에 들어간 3연대 2대대는 그곳에서 마을 주민 7명과 여학생 7명을 집단 학살하였다.


"그중 연대장인지 중대장인지 높은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다른 군인에게 우리들이 “뭐냐” (중략) “뭐 하려고 데리고 다니냐. 빨리 없애버려”라고 말하곤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중략) 우리를 지키던 군인들과 여수시내 진남관에서 올라온 군인들 몇 명이 함께 남학생 7명과 우리들을, 우리가 끌려와 있던 종고산 중단 소나무밭, 현 여수중앙여고 뒤편에서 일렬로 세워 놓고 뒤를 돌아서게 한 후 총살을 했습니다. 당시 손이 묶여 있지는 않았고, 군인들은 한 사람당 3발 씩 쏘아 총살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총살이 진행될 때, 무조건 앞으로 넘어져서 첫 발은 맞지 않았으나, 넘어진 상태에서 한 발은 오른쪽 다리 무릎에, 한 발은 오른손 중지 끝부분에, 이렇게 총 2발을 맞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학살 직후 3연대는 다음날 26일에 종고산을 완전점령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이튿날까지 지속됐고 27일 새벽, 퇴각한 반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3연대 2대대는 반군을 쫓아 덕충동으로 갔다. 3연대는 새벽 5시에 덕충동으로 들어갔으며 마을쪽에 총을 쏘며 들이닥쳤다.


3연대 2대대 군인들은 마을에 있는 여성들을 강간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윽고 2대대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며 주민들에게 논으로 모이도록 지시하여 거기서 학생과 주민 2명을 사살한 뒤 젊은이들을 따로 골라내 종산국민학교로 연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살해하였다. 


이후 27일 낯 여수가 진압군에 의해 완전 탈환되자 3연대는 동일 오전 6시 구례로 입성하고 다음날 28일 구례를 출발하여 문수리로 진격하였다. 제3연대 제2대대는 반군 14연대와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문수리를 점령했으며 3연대는 문수국민학교와 그 일대를 수색하던 중 반군의 반격으로 밀려나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원촌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3연대는 낙안면 상송리 마을로 와 주민들을 낙안국민학교로 소집하여 호명한 이들을 전원 총살사켰다. 또한 3연대는 여수에서 민간 차량 징발을 하여 후방지원 업무를 충족시키고자 했는데 3연대는 차량 징발을 하면서 징발에 응하지 않은 이들을 총살하였다.





한편 3연대 직속 상급부대인 2여단은 10월 30일을 기해 호남방면사령부의 북지구 전투사령부로 편성되었는데 여기서 2여단 예하 12연대와 3연대는 2여단이 북지구 전투사령부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북지구 전투사령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1월 1일 원용덕 북지구 전투 사령관은 이같은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포고문>

1. 전라남북도는 계엄지구이므로 사법 급 행정 일반은 본 호남방면 군사령관이 독할함 

1. 관경민은 좌기 사항을 철저히 준수 이행할 것을 명령함 

1) 관공리는 직무에 충실할 것 

2) 야간 통행시 제한은 20:00시부터 5:00시로 함 

3) 각 시·군·동·리에서는 국군 주둔시 혹은 반도 번거 접근지역에서는 항상 대한민국기를 게양할 것 

4) 대한민국기를 제식대로 작성하여 게양하며 불규남루(不規襤褸)한 국기를 게양하는 경우에는 국가 민족에 대한 충실이 부족하다고 인정함 

5) 반란분자 혹은 선동자는 즉시 근방관서에 고발할 것 

6) 폭도 혹은 폭도가 지출한 무기, 물기, 금전 등을 은닉 우(又)는 허위보고치 말것 

7) 군사행동을 추호라도 방해하지 말 것 

이상 제항에 위반하는 자는 군율에 의하여 총살에 즉결함 

단기 4281년 11월 1일 호남방면 사령관 원용덕


이 계엄령에 의거해 각 계엄 지구에 주둔한 부대들은 즉결처분권이 부여됐다. 그리고 때마침 3연대는 원촌국민학교에서부터 토벌작전을 개시해 학살도 시작하였다.


지리산 대학살


신동면 원촌국민학교에 주둔한 국군 제3연대는 그곳에서 민간인들을 연행하고 사살하였다. 3연대는 계엄령이 발동된 11월부터 산동면 주민들을 마을 소재 공터-중동국민학교 등에 1차 집결시킨 후 젊은 사람들을 골라 주둔지인 원촌국민학교와 누에고치 판매점에 구금시켰다. 여기에는 일반주민 뿐만 아니라 마을의 이장, 구장, 교사까지 포함됐다. 3연대는 이들을 학살하기 위해 구례경찰서와 청년단원 등을 이용하였다.


연대는 토벌작전을 개시하면서 좌익의 근거지로 의심되는 마을에 군정보원을 두어 좌익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잡아 넣었다. 당시 대대 정보과는 젊은 사람들 혹은 입산자 가족이라고 지목된 자가 있으면 전부 끌고갔고 원촌국민학교와 누에고치 판매점에 구금시켰다.



또 3연대는 소대단위로 부락 수색작전에 나가 한번에 50~100여명의 민간인들을 잡았으며 이들을 전부 원촌국민학교, 누에고치 판매점에 감금시킴과 동시 이들에 대한 취조를 하였다. 당시 취조는 주로 공비에게 식량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고 이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됐다.


"군인이 불러 (중략) 당시 산동면 한청본부에 갔더니, 주둔본부로 가게 되어 누에고치 판매소에 가서 취조과정을 목격하였다. 1948년 11월 12일, 군인들은 누에고치 판매소에 의심가는 사람들을 연행해놓고 수백 명을 조사했다. 리스트를 갖다놓고 조사했다. (중략) 옷을 활짝 벗겨놓고 남녀 구분도 없었다. 조사가 끝난 사람들 중에 자기들이 의심하는 사람들은 재판회부도 없이 바로 총살했다. 누울 정도가 아니고 밤낮으로 앞사람 등에 머리를 대고 잠을 잤다. 밥은 매일 오전 10시 한 차례였다. 소금물을 한 주먹밥 한 덩이었다. 손에다 주먹밥을 받아서 먹었다. 지금은 헌병이라 하지만 당시는 군기병이었다. 처음 취조는 군기병이 하고 마지막에는 취조관(정식군인은 아니고 군속)이 했다. 옷을 활짝 벗겼다. 얼음이 얼어 고드름이 있는 집시랑 끝에다가 뒤로 묶어놓고 팼다. 지붕에 줄을 달아 의자 서너 개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 앉게 했다. 의자에 올려져 묶인 상태에서 의자를 빼버리면 대롱대롱 매달리는데 그 상태에서 앞에서 배를 차고 뒤에서도 때렸다."


취조 후 반군협조자로 판명된 사람들은 전부 사살됐다. 당시 현장 증언에 의하면 한번에 30명 정도를 사살장소로 이동시켰고 그 장소에는 한청단원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그곳에 혐의자들을 세워놓고 m1 소총으로 학살했다고 한다.


"총살집행은 소대장이 인솔을 했습니다. 총살장소 주변에 경계병이 배치되고 마을인부들이 와서 총살대상자수에 맞게 구덩이를 팠습니다. 총살대상자들은 구덩이 앞에 무릎을 끓고 앞을 보게 해 앉히고 25~50미터 뒤에서 사수들이 사격명령에 따라 M1소총으로 사람들을 겨냥해 사격을 했습니다. 총을 맞고 사람들은 구덩이로 쓰러졌습니다.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행이 끝나면 밑에서 대기하던 인부들이 매장을 했습니다."


이같은 형의 학살은 1949년 1월달까지 진행됐다. 이 기간에 3연대는 내산리, 위안리, 좌사리, 관산리 주민들을 중동국민학교로 소집시켜 1949년 1월까지 지속적으로 학살했다. 관산리 주민의 경우 3연대가 관산리 마을에 입성하면서 대책없이 마을을 소각시킨 덕분에 살 곳을 잃어 3연대 군인들에게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곧 화가되어 1948년 12월 전부 학살 당했다.


 좌사리, 내산리 마을 주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에 단순히 공비가 있다 간 흔적이 있다고 해서 억울하게 끌려갔고 1948년 12월, 전원 총살 당했다. 이로부터 한달이 지난 1949년 1월에는 3연대가 누에고치 판매점에 구금된 100여명의 부역혐의자를  산동면 이평리 윤씨 선산 횟골로 끌고 가 전원 총살하였다.


결국 1949년 1월까지 진행된 이 학살로 인해 국민학교에서 벗어난 생존자는 불과 50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학살 당했기 때문이다. 

 3연대는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자살했던 장소에 찾아와 보복학살도 자행함과 동시에 입산자 가족, 친척들을 죽이는 대살(代殺)도 자행하였다. 


지리산 전투 사령부


1948년 11월 30일 지리산 일대에서 반군 소탕작전을 전개하던 호남방면 전투사령부는 해체되었다. 해체와 함께 토벌부대들도 각 본래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토벌부대가 철수하자 반란군들은 그들의 활동지역이었던 구례, 하동에서 벗어나 전남 동북지역인 광양-곡성-남원-장수-무수군, 그리고 경남 서부지역인 산청-함양-거창군-진주 부근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에 육군본부는 해빙기를 맞아 3월 1일 지리산 전투 사령부와 호남지구 전투 사령부가 각각 편성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3연대는 제3대대를 지리산 전투사령부 소속으로 배속시켰고 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주둔지인 남원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토벌사령관 정일권은 총 세 단계에 걸쳐 토벌작전을 수행하려 했다. 먼저 첫 단계는 3월 초순 무렵에 토벌대를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산청 지역에 분산배치한 뒤 일주일을 거쳐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공비를 지리산 쪽으로 밀어넣는 작전이었다.


그 다음 2단계는 3월 11일부터 지리산으로 밀려난 공비를 격멸하는 것으로 전과확대를 위한 작전이었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격멸한 공비를 소탕하는 것으로 3월 16일부터 시행되었다. 이같은 작전에서 주로 투입되는 부대는 제3연대 3대대였다. 이는 3연대가 지난 지리산 지구 작전에서 매우 많은 전과를 거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토벌부대의 최선봉으로 참전한 제3연대 3대대는 거창에 본부를 둔 채 산청 부근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3대대는 토벌을 개시한지 한 달만에 반란군의 수장 홍순석과 김지회를 사살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대대장 한웅진 대위 이하 전 장병들에게 1계급 특진을 시켜주는 영광을 주었다. 또한 정보과 김갑순 상사에게 100만원의 상금과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지리산 전투 사령관 정일권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복귀했고 다음 사령관은 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임명되어 남은 공비토벌 작전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정일권이 떠나자 3연대는 즉각 부역자 색출과 학살을 시작하였다. 


당시 3연대 3대대는 함양 일대에서 주둔하면서 정일권이 떠나자마자 정보과와 함양경찰서를 통해 부역자 색출을 실시하였다. 부역자 색출에 걸린 민간인들은 전부 가혹한 취조를 받다가 이은리 당그래산에서 군인들에 의해 전부 총살됐다.


일례로 1949년 5월 12일 함양군 서하면에서 2명의 민간인이 서하지서로 연행됐는데 이들은 곧 함양경찰서로 인계되었으며 얼마안가 총살됐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28일에는 휴천면에서 작전을 펼치던 3대대가 3명의 민간인을 발견, 그중 한명을 즉결처분하고 나머지 2명은 연행하여 이은리 당그래산으로 끌고가 총살했다.


"순경들이 마을에 와서 청년들을 잡아가서 저녁 때 수동지서에서 몇 명을 취조하고 그날 밤에 군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 군부대 안에 동네사람들을 한군데에 모아놓고 취조를 했습니다. 이쪽에서는 몽둥이질을 하고, 저쪽에서는 전기로 지지고, 고춧가루 물을 붓고 했습니다. 잡혀간 동네사람들이 다 같이 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기 전에 취조를 당한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저는 취조당하고 나서 정신을 잃고 있어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같이 있던 동네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취조당하고 나서 한구덩이에 파서 다 쫘 죽였다고 했습니다. 죽인 장소는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동면 죽산리와 도북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산리 주민들은 도북리 주민들이 경찰에게 연행된 직후에 함양경찰서로 끌려갔으며 끌려간 17명의 주민들은 3대대 군인들에게 넘겨져 사살 당했다. 또 도북리 주민들은 죽산리 주민들이 끌려가기 이전에 함양경찰서로 끌려가 총살됐다.


정보과에서 오라고 그래, 그러면 총을 들고 가. 나는 소대에 있을 때 1개 분대든지 데리고 가면 정보과에서 추리거든. 사형할 사람을. …쏘라고 지시하는 것은 정보과이고 우리는 쏘고 그랬다. …여러 번 갔다. 많이 갔다. 말도 마라. 몇 백 명이 죽었다.



이같은 학살은 김백일의 지리산 전투사령부가 창설되기 직전에도 지속됐다. 3연대는 단순히 공비에게 쌀을 주거나 물을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비분자로 낙인 찍어 총살했고 유족들의 시신수습조차 못하게 막았다.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할 때 경찰들이 경비를 서서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은 국군이 시켜서 한 것일 것이다.


함양경찰서에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민간인들이 잡혀온 것을 본 적이 있다. 함양경찰서 유치장이 약 50여 평 되었는데 그곳에 구금을 시켜놓고 사찰계에서 취조를 했다.…민간인들이 잡혀와 취조당하고 이은리 당그래산에서 즉결처형된 것에 대해 외면적인 것은 알지만 내면적인 것은 사찰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등은 사찰계 형사여서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찰계 형사들이 지독하게 한 것은 임무여서 그랬을 것이다


이때 3연대 2대대는 평소 토벌대에게 음식제공을 하지 않거나 혹은 빨치산에게 쌀을 주는 행위를 하는 마을주민들을 굉장히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따라서 3연대 2대대는 11월 9일 아침에 오부면 일물리 마을에 입성하면서 마을주민 한 명을 즉각 살해하고 시신의 목을 잘라 마을주민들을 시켜 그 머리를 막대기에 끼우도록 한 뒤 오부면 지서로 갖고 가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2대대는 주민들을 연행하고 해당 마을을 소개하였다. 


마을의 공터에서 벼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하고 경찰들 하고 마을에 왔습니다. 마 을에 들어와서 성인 남자들은 포승줄로 꽁꽁 묶어서 한쪽으로 모아 놓았습니다. 그중 한 사 람만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김영구의 아버지였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 습니다. 그 사람만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만 잡혀가지 않고 마을 성인 남자 5~6명 은 다 잡혀 갔습니다. …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묶어 놓고는 마을에 있는 여자들하고 아이들을 전부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여자와 아이들을 바깥일물 쪽으로 넘어 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깥 일물 쪽으로 넘어갈 때 군인과 경찰들은 추수하던 짚을 묶어서 마을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에는 추수할 시기여서 건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옥들 은 금방 불에 탔습니다. 마을의 모든 가옥이 불에 탔습니다.


이후 2대대는 일물 마을에도 들이닥쳐 20여명의 성인남성들을 포박하여 끌고가 산청경찰서에 넘겼다. 며칠 후 이들은 다시 3연대 2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금서면 수철리 산골짜기로 끌려갔고 전원 총살됐다.


한 부락에 민병대 간부가 있는 기라. 내가 간부였던 거라. 군인들이 지시를 하는 기라. 마 을마다 몇 명씩 동원하라고. 군인이 총 인솔자고, 우리는 인부들 인솔자고. 우리는 지게를 짊어지고. 탄환, 식량 등을. …수철에서부터 군인들 부식을 30~40명의 주민이 지게로 져 날랐다. 이때쯤이던가? 성재라고 있어. 한라산 같을까. 가운데가 벙벙해. 왜 성재인가 하면 …왕릉이 있는데. 물이 나는 기라. 성을 쌓은 터가 있는 기라. 지금은 못 찾을 기라. 길이 있는데 그 길에 사람들 시체가 여기 저기 있는 기라. 다음해 봄까지 있었어. 같이 있던 인부들이 “오부면 사람들”이라고 했다. 핫바지를 입은 20여 명의 시체가 그 이듬 해 봄까지 있더라.

(당시 시신들의 상태는?) 


핫바지를 입고 있었다. 일 하다가 와 죽은 거 같애. 오부사람 들이라고 했는데, 산이 너무 깊어서 사람들이 찾으러 못 온 기라


이렇게 3연대가 마구잡이로 민간인을 학살할 동안 육군본부에서는 김백일을 사령관으로 한 지리산 전투 사령부를 창설했다. 이때 등용된 지리산 전투 사령관 김백일은 토벌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과 작전계획을 발표했다.


△남원군 △구례군 △함양군내 席卜·함양·유림·마천·휴천·수동 각 면 △산청군내 生單·梧釜·산청·신안·二壯·丹城·今西·矢川 각 면 △하동군내 淸岩·岳陽·花岡 각 면


해당자는 군경(군경이라 할지라도 소정 완장을 패용치 않은 자는 반도로 간주, 사살 또는 체포함)을 제외한 일반 관민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각 거주지구에서 100m를 이탈치 못하며 군경 승용차를 제외한 정기적 교통차 및 기타 일반차륜의 통과를 엄금하는 동시, 이 도로를 통행하는 차량 및 부락을 이탈 방황하는 자는 적 또는 이적행위자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기로 되었다는데 일반의 주의를 요망한다.


「통비부락 소개의 실태」


“수색(搜索) 작전에 많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고 … 지리산지구 전투의 특수성은 적대목표가 막연한 점이라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비민(匪民)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20호 내지는 30호까지 되는 산간지대 소위 민주부락들을 소개하는 것을 앞으로 전개될 본격적 소탕작전에 있어서 양도차단(糧途遮斷) 전술상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백일


내용인 즉, 일반 민간인들에게 각 거주구역에서 100m 이상 이탈 시,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하겠다는 내용과 비민분리를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각 토벌부대는 다시 한번 통제 없이 학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군인이라면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

 



이리하여 통제가 사라진 각 토벌부대는 온갖 엽기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간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대에서 명령한 것이라며 어린이를 돌로 내리찍어 죽이거나 전과를 보고해야 한다고 민간인을 몰살 후 코와 귀를 베어 주머니에 담는 형식의 학살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제3연대도 그중 하나였다. 3연대의 학살방식은 기존에 총살하는 방식에서 총검으로 찔러 척살하는 방식으로 바꿔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전부 토벌에 나간 3연대 군인들에 의하여 연행된 사람들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억울하게 잡혀온 양민들이었다.


이때 3연대는 민간인을 총검으로 살해할 시, 신병들에게 전쟁 경험을 준다고 경험이 없는 신병들을 선발해 민간인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게 하였다. 그 일례로 3연대 1대대 3중대의 신병소대는 1949년 12월, 산청국민학교에 구금돼 있는 100여명의 민간인들을 군용 트럭에 태운 채 산청읍 북쪽 야산으로 끌고 가 민간인들을 전부 총검으로 척살했으며 척살하는 방식은 경험이 없는 신병들에게 척살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새로 전입온 분대원들에게 …(중략)…M1에 대검을 착검해서 죽이라고 했으며, 대검으로 처형한 것은 담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다.”


3연대 2대대 소속 병사



그곳에 민간인들이 수십 명 잡혀와 있었는데 (중략) 구덩이 앞으로 한 사람을 나오라고 하더니 경찰(군인 이종술로 보임)보고 찌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이 찌르려고 하다가 못 찔렀습니다. 그러니까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저리 비키라고 하더니 보고 찌르라고 했습니다. (중략) 구덩이 앞으로 한 사람씩 나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면 그 사람에게 구덩이를 등지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중략) 그러면 군인이 그 앞에서 총에 대검을 착검해서 가슴을 찔렀습니다. 가슴을 찌르고 나면 칼이 잘 빠지지 않으니까 (중략) 가슴을 팍 걷어찼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는 뒤쪽으로 넘어졌습니다. (중략) 한 사람을 찌르고 나면 다음 사람보고 구덩이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다른 군인이 나와서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중략) 칼로 찔러서 구덩이에 넣은 후에도 사람들이 다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구덩이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중략) 흙을 덮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흙구덩이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니까 군인이 가서 그 사람 머리를 밟아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흙을 덮었습니다


여기서 민간인을 척살하지 못한다면 현장 지휘관이 즉결처분 협박을 하거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병소대장(육사 7기 김인식)이 피구금 민간인들을 구덩이 앞에 세우고 신병소대원들에게 전쟁 경험이 없으니 사람을 죽여 봐야 한다고 총검으로 척살 지시, 신병소대원들이 척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신병소대장은 신병 중 최연소자 이종술에게 먼저 척살을 시작하라고 지시, 이종술이 머뭇거리자 신병소대장은 권총을 빼들고 ‘네 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다. 죽이겠다.’고 위협, 이에 이종술이 피구금자 중 부녀자를 총검으로 척살하고 나머지 신병소대원들도 총검으로 피구금 민간인들을 1인당 1명씩 척살함. 진술인도 당시 본 사건 현장에서 피구금 민간인 척살을 목격했으며 또 직접 척살함.

국군 3연대 1대대 3중대 3소대(신병소대) 병사



“1949년 10월경 산청지역의 지리산 쑥밭재에 주둔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보급을 못 받아서 배가 고프고 담배가 필요했는데 아랫쪽을 보니까 보급차 2~3대가 사람을 가마니로 덮어서 실어왔습니다. 잠시 후 상부에서 단독 무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가서 보니 전부 다 민간인이었습니다. …(중략)… 이른바 즉결처형인데, 누가 사람 죽이는 거 좋아하겠어요? 명령이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요. 희생자들은 산청 사람들인데 진주 방면에서 왔고, 삼장면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중략)… 당시 즉결처분한 인원이 30~40명 됩니다. 총을 쏘지 않고 총검으로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총검으로 찌르지 못하면 뒤에서 지휘관이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국군 3연대 2대대 8중대 소속 병사



또한 현장 지휘관은 학살을 부추기기 위해 '진짜 군인이라면 사람을 직접 죽여 봐야 한다'고 말하며 척살을 지시했다.


“당시 제2대대 6중대 2소대 소속 소총수로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희생될 때 조재미 대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했습니다. (덕산국민학교 뒷산) 구덩이 앞에서 마을 사람들을 세워놓고 M1에 대검을 착검하여 처형했습니다. 조재미 대대장이 한 사람이 하나씩은 죽여야 한다고 해서 저도 착검된 총으로 두 번을 찔러 처형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진짜 군인이라면 사람을 직접 죽여 봐야 한다.’라고 조재미 대대장이 그랬습니다.”

?:의심여부 있음.



3연대는 이러한 척살형식의 학살을 타 부대도 하게끔 하였다. 당시 제17연대 3대대 소속이었던 유치운씨는 견학을 위해 대대장 같이 함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100여명의 민간인들이 붙잡힌 채 있었으며 3연대 정보주임인 정진 대위가 나타나 반겼다고 한다. 


이후 정진 대위는 어느 여성을 옆으로 데리고 오더니 이 여성이 김지회 부인이며 인민재판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3연대 병사들이 나와서 붙잡힌 민간인들을 총검으로 찌르는데 유치운씨도 여기에 참여할 수 밖에 없어서 참여했고 여성을 척살 했다고 한다.


“견학을 시킨다며 함양 마천 산내리로 데리고 갔는데, 장교를 쭉 세워놓더니 좋은 선물이 있다면서 강 건너 소나 무가 있는 곳에 공비를 100명을 잡아다 놓았다는 겁니다. 그때 3연대 정보주임은 정진 대위입니다. 인상은 좀 무섭게 생겼어요. 그 양반이 여자를 하나 데리고 오더니 이 여자가 김지회 부인이라는 겁니다. 인민재판을 한다고 그러더니 3연대 병사가 나와서 시범을 하는데 그냥 찌르는 겁니다. 우리도 돌아가면서 하나씩 죽였는데, 어떻게 해서 잘못 찌르면 미쳐 숨이 안 넘어가서 숨이 껄떡껄떡하는데 눈뜨고 못 봅니다.그렇게 해서 내 차례가 되었는데 여자가 걸렸습니다. 한번 찔렀는데 죽지 않아서 호 속에 들어가서 또 찔렀습니다. 피가 낭자하고 냄새가 굉장해요대대장이 나를 쓱 돌아보더니 ‘눈이 좀 달라.’하더군요.”


보은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주둔을 하고 있을 때인데, 적색분자 몇 십 명을 잡아왔다며, 소위 정신적으로 무장시킨다고 소대장은 전부 나오라고 하여 M1에 대검을 착검하여 그 애들을 하나씩 죽여라 이겁니다. …(중략)…시신들은 구덩이를 파가지고 쓸어 넣었어요.

17연대 1대대 3중대 중화기부대 소대장 정득만


이러한 방식의 학살로 최대 1,000여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대대가 최대 800명, 1대대가 최대 200명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3연대는 해당 토벌작전에서 민간인을 주표적으로 삼아 학살하였다. 신병들의 담력,경험을 길러야 한다거나 인민재판을 해야 한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 학살극은 다행히도 너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당시 문경사건으로 인해 토벌사령관이었던 김백일이 3사단장으로 좌천됐고 유재흥이 태백산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지리산 전투 사령부는 무력화 됐기 때문이다.


유재흥이 태백산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 토벌대의 학살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유재흥이 잦은 부대 방문을 통하여 토벌대의 학살을 억제하도록 했으며 이와 함께 민간인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대규모 학살극이 끝났지만 지리산 전투 사령부는 김백일 떠난지 단 2달만에 해체되었고 각 토벌부대는 본 주둔지로 철수하였다. 이후 지리산에 남은 부대는 15연대와 19연대 뿐이었다.


유재흥



지리산 토벌의 결과

지리산에서 태극기를 내건 채 만세를 부르는 3연대 병사들


약 1년 간 지속된 지리산 토벌작전에서 죽은 민간인의 수는 최소 1만여명이다. 당시 토벌이 이루어졌던 전남에서는 1949년 3월 15일 기준, 사망한 사람이 총 350명으로 집계됐는데 토벌이 집중된 시기이던 6월 무렵에서는 죽은 사람이 5,379명으로 집계됐고 1949년 12월 20일에는 무려 8,280명으로 집계됐다. 


가옥의 피해도 심각하였다. 1950년 1월 19일 사회부의 집계에 따르면 전남,경남에서 소각된 가옥은 1949년 12월 20일까지 총 11,902호였다. 제주도에서 소각된 가옥의 수가 총 26,790호인걸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피해인 셈이다. 



도 별


사망자수


전소가옥


경 기

충 북

전 북

전 남

경 북

경 남

강 원

제 주


187

66

37

8,280

287

709

53

3,340

12,959


384

25

105

9,909

899

1,993

116

26,790

40,221

출처: 조선일보 1950년 01월 19일


한편 토벌대는 종합 전과를 발표하며 1948년 10월 20일부터 1950년 1월 25일까지 4,382명의 적을 사살했다고 보고하였다. 이 수치에는 여순사건 때 14연대 반란군을 사살한 것도 포함되어 있으나 당시 14연대 반란군의 숫자가 최대 2,000명을 넘기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면 해당 수치는 과장보고 또는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민간인의 희생으로서 치룬 토벌작전의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사망자는 무려 1만명을 넘겼고 이재민은 79만명에 달하였다. 정부는 이재민에 대한 구조를 여러차례 벌였으나 너무나도 큰 피해였던 탓에 전쟁 직전에도 해결하지 못하였다. 결국 토벌작전의 결과는 빨치산을 제거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잠깐 오해라 할지 모르겠지만 논쟁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서로 상대적으로 저편과 이편이 가령 반도들과 서로 죽이는 것이 하나를 죽이면 여기에 하나 죽이는 것이 같다고 하는 말씀이 하나 있고 여기에 청장 또는 연대장 그 이로서 생각하기를 국회에서 우리 국군에 대해서 어떤 의원이 반란군이 죽이는 것보다도 국군이 죽이는 수효가 많다고 이런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황호현 의원이 여기에 대해서 대답했읍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말씀한 것이지 국회의 결의가 아니라 그것은 국회에서 결의한 것이 아니라 국군을 아끼는 가운데 신망을 잊을까 해서 이런 말씀을 발언한 것이라고 잘 이해하고 알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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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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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씀했읍니다만 무안군 전체는 해변을 막은 제방이기 때문에…… 물론 보고는 받으시었을 것입니다만 제방 전체가 터저 버려서 무안군 전체가 농사를 못 짓고 이재민 수가 3만여 명이나 됩니다. 순 이재민입니다. 거기에 부수 이재민이 약 15만에 달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제방이 전부 터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막아 주실 생각이 있으신가, 이것은 제가 개인의 의견과 같읍니다만 이 제방을 막아 주지 않으면 26만의 무안군민은 전부 기아에 떨게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풍수해 구제대책에 있어서 사회부장관께서 물자를 내려보내 주신다고 말씀을 했는데 물자가 온 것 같지도 않읍니다. 물자가 어떻게 됐는지 아마 이재민의 손에 있어야 할 것인데 제가 보지를 못했읍니다이재민을 구제를 한다고 하셨는데 이때까지 하나도 이재민의 손에 하나도 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반란지구 선무반 보고와 대책강구의 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