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약화가 중국의 미래를 어둡게 해"


Q

민주주의는 모두 procedure의 문제이고, 절차를 존중하는 민주화 과정 없이는 민주주의도 의미가 없다. 따라서 먼저 중국인들에게 시민의식을 함양해 법치를 존중하도록 만들면서 이와 병행해 민주적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것이 가능하지 잘 모르겠다. 선생의 견해는 어떤가?


교수님

그것은 전에 말했듯이 한국이 1987년 민주화 이전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문제와 유사하다. 적어도 한국에는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운동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다만 한국의 권력층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구실로 민주화를 뒷전으로 미뤄온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꿈이며 희망이었다. 지금 중국에선 학생들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오히려 기득권층이 되어, 보수화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가 도입돼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 현재의 기득권층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같은 혼란상황을 예로 들며 민주화를 뒤로 미루는 구실로 삼는다. 시민의식이 생기고 법치의식이 높아지기 전에 민주화에 착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은 현 체제를 지탱하는 엘리트 지식인의 오만으로 들리기도 한다.



Q

중국이 의미 있는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투명한 통치는 없을 것이며 중국공산당은 독점적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 그럼 우리 모두에게 중국은 '불확실한 위협'이 된다는 뜻 하닌가? 예측 가능한 미래뿐 아니라 더 먼 장래 역시 매우 불확실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수님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확신할 수가 없다. 변화의 시점이 좀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미 경제는 어느 정도 풍요로워졌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측 가능한 미래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시진핑 체제하에서라면 그 어떤 조짐도 발견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과 이를 지탱하는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중국은 경제성장동력을 찾고 있고 그게 핵심적 문제지만, 코로나가 그들의 장래에 큰 문제를 야기한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이 가야 할 길이나 지켜야 할 도리를 알고 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민주화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국유기업에 기생하는 특수 이익집단의 자산을 공개하고 그들로부터 소득세와 상속세를 통해 공정한 소득배분을 하는 것이 민주화 이전의 정치개혁이다. 이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외치며 이를 필사적으로 불식시키려 한다. 그런 점이 오히려 공산당의 정통성을 갈수록 무너뜨리고 있다.



Q

중국은 G2나 신냉전 구도같은, 자국을 강대국으로 보이게 하는 발상을 아주 좋아한다. 중국인들 발상의 원점에는 근대 이후의 굴욕감이 크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민주화나 정치개혁의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중국 스스로 next US가 되기를 원하는 건 분명하다.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교수님

없다. 중국이 인권이나 인도(人道), 정치체제 등의 국제 문제에 건설적 입장에서 개입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중국인들도 중국이 국제공공재를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국가의 장래에는 관심이 있지만 세계의 장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Q

일본이나 한국의 중국 정책을 보면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소 다로, 아베 신조 그리고 한국의 보수정당 등 미일동맹(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미일 공조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하토야마 이치로, 오자와 이치로, 데라시마 지츠로, 그리고 문재인처럼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후자는 미일동맹(한미동맹)이 다소 약화되더라도 중국과의 정치적 파이프를 부활시키고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떤 전략이 현명한가? 선생은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교수님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미한동맹이나 일미동맹이 실질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도왔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없었더라면 장쩌민 시대와 후진타오 시대의 '화평굴기'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 또한 중국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앞으로 설명할 과정에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의 ODA가 줄어들고 한국의 대중 투자가 성장하면서 한국의 공헌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이므로 일미동맹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한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중국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ODA를 제공했고 미국도 이를 지지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시기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현대화를 지원하기 위해 원조를 제공한다는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언급이 있다. 미국은 1979년까지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정책에서는 오히려 일본이 빨랐다. 그때 덩샤오핑은 일본을 중국의 발전모델로 설정했다. 이것이 1972년과 1980년 사이의 일이다.


천안문 당시에도 일본이 맨 먼저 ODA 공여를 재개해 서방의 경제제재 해제를 이끌어냈다. 미국은 뒤에서 일본이 하는 일을 지지했다. 그 후 1992년 중국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거쳐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게 됐다. 이 두가지는 서로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일본과 미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internationalization, 즉 중국을 국제사회의 이해 당사자로 바꾸는 데 공헌했다. 1996년 양안위기 당시 중국이 군사력을 사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급파해 중국에 압력을 가했다. 그 사이 일미안보, 미한안보는 재정의를 거쳐 한층 더 강화됐다. 1996년 이후 중국은 타이완 문제와 관련해 한 번도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한국의 예를 들자면 미한동맹은 중국이 북핵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과 북한의 도발을 지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다. 이는 미한동맹이나 일미동맹이 중국의 국제화나 평화적 대두에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담당해 왔다. 중국을 자본주의 진영쪽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따라 서 나는 이런 관계가 결과적으로 중국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WTO 가입 당시에도 일본은 중국의 가입을 누구보다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도 미국도 그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그에 비해 중국의 주장은 강해졌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잊어버린 채 중국이 일본 때리기를 한다며 탄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일미동맹이나 미한동맹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아시아와의 관계도 동시에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