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그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민족주의가 일어서기 시작했다.(서아시아 민족 중에서 가장 빠르게 민족주의에 눈떴는데, 이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여파 때문이었다)


일시 조지아를 포함해 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으로서 공동했던 두 국가는 얼마 후인 1918년 5월에 각각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으로서 독립했다.

 

이 직후부터 두 민족의 혼성지역이던 나히체반, 잔게줄, 그리고 카라바흐는 분쟁지로 변해 아르메니아 - 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발전했다.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남캅카스로 온 영국군(당시 영국은 이라크에서 북진하여 남캅카스와 현재의 터키 카르스, 반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에 의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분쟁지의 귀속이 결정되기전까지 잠정조치로서 카라바흐와 잔게줄의 총독으로 아제르바이잔 정치가였던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 소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두달 뒤, 소련 인민군 제 11군이 소련에서 남캅카스로 침공하여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은 사이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공산화해버렸다.(이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터키로 도망쳤다. 대통령 매해매드 애민 래술자데와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 등등.) 이 시점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잔게줄, 그리고 나히체반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귀속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강했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당수였던 나리만 나리마노프도 분쟁지의 아르메니아 귀속을 인정하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1921년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국경선을 책정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민족문제 인민위원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7월 4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귀속결정을 위한 회의가 열렸는데, 회의는 찬성 4표로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로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나리마노프가 이 결정에 불복하여 당 중앙위원회에서 문제를 다시 결정할 것을 요구해, 7월 5일에 스탈린이

출석하여 다시 회의가 열렸다.

 

출석자 9명 중 아르메니아 귀속반대파는 3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문제를 이유로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으로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인구의 94%가 아르메니아인이 점유한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통합하는 것은 아르메니아인의 반발이 예상되었기에 2년 후인 1923년 7월 7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아제르바이잔 영내에서 일종의 소수민족 자치구역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역사가들은 이를 소련-러시아에 의한 분단통치의 원칙이 표출된 것을 바라본다. 예로, 나고르노 카라바흐가 아르메니아에서 분리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도 1921년에 아제르바이잔의 속유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소련정부가 터키와의 우호를 연출하기 위해 결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이는 나히체반은 예로부터 카라바흐와 대조적으로 아제리인 다수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0년간, 아르메니아 공산당 서기장이던 아가시 한쟌 등 정치가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의 통일을 강하게 요구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도 자치구역이 말만 자치구역이었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되고 문화적인 자유도 억압당하고 있다면서 소련 중앙정부에 제소했다.

 

스탈린 사후에 이 경향은 더욱 심해져, 1963년에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2,500명이 자치주를 아르메니아 혹은 러시아로 귀속해줄것을 요구하는 탄원을 하기도 했다. 또 스테파나케르트에서 발생한 무력충돌로 18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하자 1965년과 1977년에도 아르메니아와 카라바흐 통일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1985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해 페레스트로이카 등, 일련의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하자 정치의 자유화에 목말랐던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연방최고회의에 집단으로 탄원서를 제출하고 자치주의 아르메니아 귀속을 공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는 폭동이 발생하고 아르메니아 본국에서도 통합요구시위가 벌어졌다.

 

아르메니아 국내에서 아제리인에 대한 린치 행위 등이 시작되자 대량의 아제리인 피난민이 아르메니아에서 도망쳐 아제르바이잔 숨가이트로 흘러들었다. 한편으로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의 통일 요구는 아르메니아인의 대부분과 러시아의 지식층에 지지되어 핵개발로 유명했던 안드레이 사하로프같은 저명한 반체제 활동가도 아르메니아인을 지지했다.

 

이뿐만 아니라 소련 국외의 아르메니아인 단체에서도 경제적 원조와 청원 등을 실시해 미국, 캐나다, 그리스, 아르헨티나, 리비아, 키프로스, 프랑스 등 세계각국에서 나고르노 카라바흐 통합을 지지하는 시위가 개최되었다.


결국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 카라바흐주 자치정부까지 아르메니아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이 요구를 거절했지만 아르메니아 공산당은 영토문제의 철저한 검토를 중앙위원회에 제소했다. 

2월 24일에는 자치주 당서기로 친아제르바이잔파인 보리스 케볼코프가 해임되었는데, 이와 맞춰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에서도

백만명이 참가한 소련 역사상 최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도 맞시위가 벌어져 국영신문인 <아제르바이잔>에 나고르노 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의 논설이 게재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자신들이 아르메니아어 언어 교육 및 아르메니아어 TV, 라디오 방송도 금지되고 성당 등 기독교 유적들도 아제르바이잔 당국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제소했다.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자치주의 아르메니아인 인구감소를 노려 아제르바이잔인을 유입시켜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제르바이잔화를 

추진한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1988년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75%까지 감소했다. 나히체반에서도 아제르바이잔으로 편입되기 이전에 40%이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1980년대엔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1988년 2월 26일에 고르바초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통일운동 지도자인 졸리 바라얀, 실바 캅티칸과 만나 아르메니아인의 관심에 부합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캅티칸은 군중들을 향해 <아르메니아인은 승리했다>라고 선언했지만 이것은 소련 중앙정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행위로 보여졌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연이은 분리독립과 영토분쟁이 번져나갈 것을 우려한 고르바초프는 3월 10일에 소련헌법 제 78조에 근거하여 공화국의 국경을 변경할수 없음을 선언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고르바초프의 의향에 동조했지만 아르메니아인은 고토 수복이야말로 헌법에서 정한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6월 15일에 아르메니아 공화국 최고회의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의 자국이관을 결의했는데, 그 다음날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최고회의가 이를 부인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7월 5일에는 사태수습을 위해 예레반 근교의 즈발트노트 국제공항에 도착한 소련군

병사와 예레반 시민들 간에 충돌이 발생해 시민측에서 1명의 사망자와 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에서는 반러감정이 높아졌는데 악화된 정세를 위기로 여긴 연방최고회의는 1989년 1월에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일시적으로 연방공산당의 직할지로서 두면서 사태는 약간의 진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 조치에 반발한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이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철도봉쇄를 제안하여 9월에 실행되면서 물자의 85%를 철도수송에 의존하던 아르메니아는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르메니아가 봄부터 나히체반에 대해 실시했던 금수조치의 보복이라는 반론도 있다. 결국 철도망의 마비는 일부의

아르메니아 무장세력에 의한 아제리인 철도원 공격으로 이어졌다. 반발이 커지자 연방최고회의는 11월에 다시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으로 돌리는 결의를 했지만 예레반에서는 이에 항의하며 3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참가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아르메니아 공화국 최고회의도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자국에 편압하는 결의를 반복했다.

 

민족간의 대립이 높아지는 한편, 1989년 전반기 수 개월에 걸쳐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던 아제리인과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사이에서 강제 주민교환이 이루어져 1988년 말까지 20만명 이상의 아제리인과 쿠르드인이 아르메니아의 마을에서 추방당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스피타크, 구가르크, 스테파나반에서 1988년 11월 27일부터 29일에 걸쳐 33명,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16명의 자국인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아르메니아측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살해당한 아제르바이잔인은 25명이라고 주장했다. 1989년 타임지에 의하면 1988년 2월부터 양국간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아르메니아에서 탈출한 아제르바이잔인, 아제르바이잔에서 탈출한 아르메니아인도 쌍방간 국경에서 국경수비대에게 통행료뿐만 아니라 뇌물을 지불하고 국경을 넘어야만 했다. 1988년 12월에 스피타크에서 수만명이 사망하는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아르메니아인은 <더러운 무슬림의 헌혈을 받기보단 죽는 것이 낫다>며 아제르바이잔에서 후원한 다량의 의약품과 수혈용 혈액을 폐기처분했다.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인도 지진 후에 아르메니아를 향해 <지진을 축하함>이라는 현수막을 내 건 열차를 달리게 했다. 이에 더해

이 지진으로 중앙정부에 앞서 구호활동을 실시한 단체가 아제르바이잔 강경파인 카라바흐 위원회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와 국교는 

더욱 경색되어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권위도 추락했다.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주도인 스테파나케르트의 병원에서 2명의 아제리인 여성 인턴이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윤간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22일에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아제리인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많은 아제리인이 현지의 공산당 본부를 둘러싸고 사건에 대해 집단항의했다.

 

당 본부는 살인소문을 부정했지만 군중은 이를 믿지않고 파괴, 약탈을 일삼으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행진을 시작했다. 폭도화된

군중을 저지하기 위해 당국은 천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최종적으로 자치주의 아스케란 지구에서 발생한 충돌로 인해 2명의 아제리인이 사망하고 5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경찰관, 아제리인 군중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측의 발표에선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 단체인 아르메니아 혁명연맹의 무장대원에 의한 살인사건이라는 의도적인 오보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메모리얼>에 의하면 현지의 아제리인 경찰이 발포한 결과가 사고로 이어졌다는 보고도 존재한다.

 

아스케란 사건에 호응하여 이전에 아르메니아에서 숨가이트로 내몰린 아제리인 피난민들은 28일에 집회를 열고 아르메니아인의 학살행위를 비난했는데 소련 언론은 이를 단순한 음해로 치부했다. 허나 이 집회 후 몇 시간이 지나자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개시되었다.

 

소련군이 개입한 3월 1일까지 3일간, 숨가이트의 아르메니아인은 집안팎을 가리지 않고 폭행, 강간당하고 사지절단, 참수당한 시체가

내걸렸지만 당국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공식발표에선 26명의 아르메니아인과 6명의 아제리인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은 폭력단체에 의한 사건이 학살로 발전된 견해가 일반적인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사건의 원인 아르메니아인, 또는 KGB의 공작이라는 설이 거듭 보도되어 정설화되어있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선 사건은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조직적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며, 실제 희생자 숫자는 1,500명을 넘으며 그 수법도

과거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매니아인 대학살처럼 잔학했다고 믿고 있다. 최종적으로 소련당국은 86명의 아제리인을 살인, 폭행 등의 혐의로 체포하고 그 중 한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소련 중앙정부는 감시와 정보조작으로 사태해결을 꾀했지만 횡행하는 소문과 음모론은 무력충돌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1988년 가을엔 아제르바이잔 북서부의 킬로바바드에서도 민족대립이 첨예화되어 아르메니아인은 자신들의 집을 떠나 아르메니아 본국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시내의 아르메니아인을 폭력에서 보호하기 위해 진주하여 11월 23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날은 시의 집행위원회 청사가 아제리인에 의해 습격당하면서 출동한 소련군과 충돌로 3명이 사망하고 67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이에 대해 24일 시점에서 사망자 숫자가 40명을 상회하며 그 3분의 1이 아제리인이라는 보고 외에도 아르메니아인의 사망자만 최대 130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25일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당국에서 얻은 정보로 아르메니아측에 130명 이상의 사망자와 2백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는데, 소련 외무성 보도관인 겐나디 게라시모프는 이 정보를 부인했다. 후의 회고록에서 사하로프도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한편 소련 당국은 군의 활용과 현지당국의 노력으로 학살은 없었다고 발언해 희생자는 7명으로 소련군 병사 3명, 아제르바이잔인 3명, 아르메니아인 1명으로 발표했다. 또 현지를 취재한 BBC 기자도 최소 6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다고만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