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에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인 <바쿠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더해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연방 탈퇴-독립운동도 활발화되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비상사태 선언의 발령과 군대 파병을 지시했다. 1월 20일 밤에 소련군은 바쿠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날 오전 5시에 전차가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목격한 바쿠 시민들은 첫 발포를 실시한 것이 소련군이라 증언했다.

 

계엄령, 야간 통행금지령도 동시에 발령되어 군과 인민전선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8명의 소련군 병사와 120명의 아제리인이 사망했지만 그 사이,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시내의 아르메니아인을 보호하는것 보다는 공산당의 위신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서방의 반응은 고르바초프에 동정적이었지만 이 군사행동의 실체는 기세를 불려나가는 인민전선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소련 국방장관인 

드미트리 야조프가 25일에 인정했다.

 

이 사건은 <검은 1월 사건>이라 불렸는데, 이로 인해 인민전선은 지지를 잃어 그 후 의회선거에서 공산당이 압승했다. 그러나 새로이 공산당 서기장으로 지명되었던 아야즈 무탈리보프도 민족주의를 강하게 드러내 소련 중앙정부를 등졌다. 이 때 아르메니아에선 카라바흐 위원회에서 개편한 아르메니아 국민운동의 텔 페트로샨 후보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1990년 초부터 아르메니아 북동부 국경지대의 마을인 바하니스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인민군의 거듭된 공격을 받았었지만 이와 동시에 아르메니아 의용군이 국경지대 아제르바이잔측의 가자흐 현과 사다라크 현의 마을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1990년 3월 26일 아침에 아르메니아 의용군들을 태운 몇 대의 차량이 바하니스에 도착해 그 날 저녁에 국경을 넘어 아제르바이잔으로 침입했다.

 

아르메니아 민병들은 바가니스 아일름 마을을 습격하여 20여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아기를 포함한 8~11명의 아제리인들을 살해했는데, 소련군이 현장에 도착했을때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그 후 반년이 지난 8월 19일에도 아르메니아 군부대가 아제르바이잔측에

대하여 박격포와 로켓탄을 이용한 공격을 실시해 아샤기 아스키발라와 유하리 아스키발라 마을을 점령했다.

 

20일에 소련군의 이동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 영내에서 달아났다. 이 사건에 대해 소련 내무장관은 내무성 직원 1명과

경찰 2명이 사망하고 군인 9명과 시민 13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아르메니아측의 보도에 의하면 과격파 5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고 했으며, 아제르바이잔측의 보도에선 약 30명의 사망자와 1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칭했다.

 

결국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역에서 두 민족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무탈리보프는 아르메니아 주민의 무장해제를 위해 공동군사작전을 고르바초프에게 제안하여 1991년 4월말에 샤우만 군의 마을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위해 소련군과 아제르바이잔의 특별임무 민경대(OMON)에 의한 <고리 작전>을 개시했다.

 

장갑차와 화포까지 동원된 이 작전에 대해 국제인권단체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소련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쌍방이 이 작전을 아르메니아인의 분리독립에 대한 경고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역효과를 불러 아르메니아인들은 영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력뿐이라는 생각을 굳혀 의용군의 창설이 개시되었다.

 

1991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아르메니아 민병들은 OMON에 의해 점령된 마을 중 방화를 면한 몇 개의 마을을 탈환하려고 시도했다.

가을이 되면서 아제르바이잔측이 저항을 시작하자 아르메니아측은 아제르바이잔인의 마을을 표적으로 선택했다. 이에 몇 개의 마을이 불타고 수십명의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쌍방의 거듭된 보복전과 서로에 대한 비판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고르노 카라바흐 문제에 대한 첫 평화조정이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던 보리스 옐친과 카자흐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에 의해 개시되었다. 1991년 9월 20일부터 23일에 걸쳐 바쿠, 간자, 스테파나케르트, 예레반을 시찰하여 두 당국의 합의하에 회담을 개최한 옐친과 나자르바예프는 양국 대통령에게 공동선언의 서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러시아의 젤레즈노보츠크에서 서명되어진 선언에 의해 분쟁지역에서 소련군 및 내무성 군을 제외한 전군철수, 포로와 피난민의 귀환

허가, 수송 및 통신 시스템의 정상화, 그리고 평화협상의 즉시 실시가 다루어져 평화사업은 러시아와 카자흐의 감시단에 의해 감독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선언을 발표한지 고작 두달 후에 아르메니아측 무장세력이 러시아와 카자흐의 감시단원이 동승한 Mi-8 수송헬기를 격추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카자흐측은 평화활동을 정지하고 공동선언은 이후 폐기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윽고 소련 붕과와 함께 소련군은 12월 19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27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이후 모스크바의 통제를 벗어난 나고르노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선전포고 없이 전면전을 격화시켰다. 과거 냉전의

시기에 NATO 가맹국이던 터키와 국경을 접한 아르메니아는 소련에 있어서 중요한 전략거점이었고, 과거에 터키군의 침공을 허락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주 전장이 될것을 상정한 아르메니아를 피해 아제르바이잔에 많은 병력을 배치했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에 5개 사단과 군용 비행장 5개를 둔 것에 반해 아르메니아에는 3개 사단이 배치되었지만 군용 비행장은 없었다.

탄약수송 열차의 숫자도 아제르바이잔의 1만량에 비해 아르메니아는 5백량에 불과했다. 허나 소련군의 해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군은 땅바닥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국군 만으로는 전쟁수행이 불가능하게된 아제르바이잔은 국내의 부유층과 인접국에서의 원조가 불가피하게되어 석유재벌인 슬라토 후세이노프는 사병으로 육군 제 709여단을 임시로 편제한 뒤 대량의 무기 및 탄약을 구입해 충원했다. 그 한편으로 아르메니아는

1990년 초부터 독자적인 군대편성을 시작하였기에 아르메니아군의 재편은 독립직후부터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소련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CIS)이 창설되자 터키의 군사적 개입이라는 위협을 느낀 아르메니아는 가입을 주저하던 아제르바이잔을 곁눈질하며 CIS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의 산하에 들어갔다. 1992년 1월에는 스테파나케르트에 CIS군 사령부가 세워져 이전부터 주둔했던 소련 육군 제 4군 및 제 366연대의 일부를 포함한 새로운 부대가 편제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광범위한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또 당시엔 안보조약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터키와의 국경을 자력으로 방위해야만 했기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기간 중 아르메니아군은 그 대부분을 터키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민족의 징집 연령의 남성은 대부분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중 60%가 종군-참전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무슬림이 많은 아제르바이잔인의 대부분은 소련군에서 차별대상이기에 다수가 실전보다는 공병대나 내무군 등 비전투 내지 보조군에 배치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아제르바이잔에 2개의 사관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전경험이 부족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카스피해의 유전을 통해 얻은 오일머니로 타국에서 용병을 초빙하여,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북캅카스의 소수민족(체르케스, 체첸, 잉구쉬, 다게스탄 등) 및 중앙아시아의 무자헤딘을 끌어들였다.(훗날 아프간 탈레반과 알 카에다의 강력한 동맹이 되는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의 의용군과 그 밑의 오사마 빈 라덴의 부하들도 상당수가 끼여 있었다)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군은 파잘 하쿠 무자히드에 의해 페샤와르에서 모병 및 무자헤딘의 훈련과 물자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캅카스의 의용군으로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인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같은 시기, 압하스 전쟁에서 러시아의 GRU에게 직접 군사훈련을 받고 압하지아를 위해 싸웠던 세력이었다. 아제르바이잔군 대령이었던 아제르 루스타모프에 의하면, 바사예프와

살만 라두예프가 지휘한 수백명의 체첸인 의용병은 아제르바이잔에 큰 도움이었다고 한다.(그러나 같은 아제리인의 증언에 따르면 전투보다는 민간인 학살, 전쟁 포로 참수에만 신경쓰는 전형적인 살인광이었다는 말도 있다)


허나 바사예프는 아제르바이잔이 이슬람주의보다도 민족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여 홀연히 사라져 체첸으로 돌아왔다. 소련시절 각지에서 탄압받던 유대인을 보호하여 이스라엘과 양호한 관계를 구축했던 아제르바이잔은 독립 후에도 아스라엘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부상자의 치료를 이스라엘 민간구호단체를 통해 받아들였다.(이는 오스만 제국 시절 아르메니아인이 상권을 잡아놓아 유대인들이 상공인으로 활동할 여지가 없어서 당시에 있던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 간의 앙금이 원인이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우호관계이던 터키도 아르메니아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실시하여 아르메니아의 경제제재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계 석유기업인 메가 오일(Mega Oil)도 석유 채굴권과 맞바꿔 아제르바이잔에 군사고문과 민간전투병(PMC)을 파견했다. 그러자 세계각지의 아르메니아인 단체도 본국으로 보내는 자금원조와 로비활동을 전개하여 1992년에는 미국이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군사지원을 전면금지하는 법안인 <자유지원법 907조항>을 통과시키게 했다.

 

이에 미국내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는 정유회사 및 유대계들의 <자유지원법 907조항>을 폐기하려는 공작이 벌어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르메니아에 비밀 군사원조를 실시했는데, 그 액수는 1993년까지 10억 달러를 초과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군사지원은 정부의 관여가 없이 육군의 친아르메니아 파에 의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냉전 이후에도 러시아, 미국, 유대인 및 무슬림 등의 대립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1991년 여름에 보수파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아르메니아인은 국민투표로 압도적 찬성으로 소련에서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어서 9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텔 페트로샨이 80%의 득표율로 독립 아르메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에서도 9월에 공화국 최고회의가 만장일치로 독립을 찬성하여 이어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된 무탈리보프가 인민전선에 압승을 거두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2월 10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자치주 내의 아제르바이잔인은 이를

거부했지만 아르메니아인을 중심으로 한 유권자의 85%가 투표에 참가하여 95%의 찬성으로 1992년 1월 6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고리 작전은 두 민족의 산발적인 충돌을 격화시켜 수천명의 의용군들이 모여들었다. 아르메니아는 이 분쟁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으로 겹쳐 여겨, 여성들도 간호사나 보조인력으로 군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징집에 응하지 않고 한탕을 목적으로 전사한 병사들의 물품과 돈을 약탈하여 암시장에 내다파는 자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