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2월 초, 마리베일리, 카라다글리, 아가다반의 아제리인 마을이 습격당해 민간인을 포함한 최소 99명의 사망자와 14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당시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잇던 길은 좁은 산길로 통하는 라친 협곡뿐으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유일한 공항은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약 10km 남동쪽의 인구 7천명의 아제리인 거주지역인 호잘르(호찰리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아르메니아어로는 이바냔)에 위치해 있었다.

 

호잘르는 스테파나케르트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측의 포격거점이기도 하여, 스테파나카르트에 며칠간에 걸쳐 4백발의 BM-21 그라드

탄도미사일이 아르메니아인의 아파트를 붕괴시켰다. 2월말, 아르메니아군은 아제르바이잔측에 통고 후 포격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엔

호잘르를 점령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띄웠다. 


얼마 후 호잘르의 대부분은 포위되어 26일에 아르메니아군은 제 366군의 장갑차량으로 호잘르 제압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군은 도시를 떠나기 위해 거리로 모여든 수백명의 아제리인의 피난민 행렬에 대한 살육에 나섰다. 아르메니아군은 이전에 호잘르를 공격해도 비무장 시민의 대피를 위해 라친 협곡은 봉쇄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시작되자 아르메니아군은 민간인을 포함해 호잘르의 민병대들을 무력으로 압도하면서 공항 활주로를 파괴하고 퇴로가 막혀 협곡으로 달아나려는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공격의 휘말려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 대다수도 추위와 굶주림에 동사하거나 심한 동상을 입었고 희생자의 유해에조차 심각한 훼손이 가해졌다.

 

사건의 정확한 희생자 숫자는 불명이지만 적어도 485명(아제르바이잔의 공식발표엔 여성 106명과 어린이 83명을 포함한 613명. 그러나 휴먼라이츠 워치의 공식 희생자수는 161명 내지 200여명 정도로 잡혀 있다. 그러나 희생자의 숫자보다는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살육이 자행되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며 이것이 아제르바이잔이 내세우는 명분이 되었다.)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그 외에도 1,257명이 아르메니아측의 인질이 되어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호잘르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아제리인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 등 행위도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정부에 의해 합법화되었다.

 

호잘르의 시장은 분쟁 4년간 천 명 이상이 살해되고 2백명 이상이 행방불명, 그리고 2백명이 전투에서 부상하고 3백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호잘르의 생존자들은 무타리보프가 자신의 실정을 은폐하기 위해 구원요청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무타리보프는 학살사건 그 자체가 자신을 실각시키려는 정적인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자작극이라고 맞받아쳤다.

 

아르메니아측도 무타리보프의 주장에 동조하여 학살을 날조하고 부정했다. 8만명을 넘은 항의자가 의사당을 둘러싸고 호자리의 상실과 인명의 상해에 대해 야당 인민전선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한 무타리보프는 3월 8일에 의회에서 사퇴하는데, 이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인민전선의 야쿠브 마마도프가 취임했다.


한편, 1992년 초부터 새로운 평화협정의 시도가 이란에 의해 시작되었다. 2월부터 외무장관인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가 바쿠, 예레반, 카라바흐를 방문했는데 조정은 호잘르 대학살로 인해 잠시 중지되었지만 3월에도 특사인 마흐무드 바에지가 셔틀 외교를 반복하며 최종적으로 대통령인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5월 7일에 텔 페트로잔과 마마도프, 양국 대통령을 테헤란의 회담에 불러들였다.

 

이 회담에서 군인을 포함한 양국의 고위급 대표자에 의한 협의가 다루어져 당사자 간의 모든 분쟁은 전유럽 안전보장 협력회의(CSCE)에 의해 국제법에 근거하여 해결된다고 선언했다. 바에지와 CSCE의 옵저버 개입 후 양국은 비로서 교류재개에 합의했다. 합의사항에는 국경지대의 안전확보뿐만이 아니라 연속적인 난민문제의 해결을 국제기준과 UN헌장에 의해 보장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허나 합의 다음날에 정전협정에 위반한 아르메니아군이 슈샤로 침공해 평화협상은 결렬되었다. 3월 28일에 아제르바이잔측은 스테파나케르트로 공격을 개시하여 다음날 오후에는 도심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아르메니아측에 의해 저지당했다. 호잘르 점령 후 몇 개월간 슈샤는 아제르바이잔측의 최후거점이 되어 아제르바이잔군은 다시 그라드 탄도미사일로 스테파나케르트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4월에는 스테파나케르트의 아르메니아인 5만명이 포격으로 지하 방공호에서 숨어야만 했으며 도심부 주변에서도 아제르바이잔군의 침입위험이 높아지자 아르메니아군은 5월 8일에 전차와 헬리콥터로 수백명의 병력을 동원해 슈샤의 아제르바이잔군 요새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거듭된 시가전으로 쌍방 모두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다음날에 아제르바이잔군은 아르메니아군에 의해 슈샤에서 내몰렸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측은 23,156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슈샤의 점령은 인접국인 터키에게 큰 충격을 불러와 당시 터키 총리였던 술레이만 데미렐은 자국민으로부터 분쟁에 개입해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라는 강한 요구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데미렐은 터키의 개입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을 자극한다며 개입엔 반대했다. 그러나 터키는 파병은 실시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군사지원과 고문단 파견을 아제르바이잔에 실시했다. 1992년 5월에는 CIS군 원수인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가 캅카스 정세에 대한 간섭은 제 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수 있다며 미국과 서방국가에 경고를 표시했다.


5월 18일에 아제르바이잔에서의 정쟁을 지켜보던 아르메니아군은 회랑 내의 작은 마을인 라친에 공격을 가하여 다음날 제압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군은 주변의 산악지대를 공략하여 이윽고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본국인 아르메니아를 같은 지형도로 연결하게 했다.

동시에 나히체반에도 아르메니아군의 포격이 가해지자 아제르바이잔 국내에서는 인민전선의 무장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군은 대통령 관저와 의사당, 공항을 점거하여 일시 복권한 무탈리보프도 정치생명이 끊겨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6월 7일엔

대통령이 다시 선출되어 인민전선 대통령인 아불파즈 에르티베이가 의회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에르티베이는 철저한

친터키, 친미, 주전파로 러시아와 이란에 대해 냉담했다.


슈샤 점령 후에도 평화세력 구축에 나선 바에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란은 분쟁에 의한 아르메니아측의 국경변경 요구를 

일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 해 여름에 CSCE 가맹국 중 11개국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평화조정을 목적으로

새로이 <민스크 그룹>을 결성했다.

 

CESE는 정전의 감시와 난민의 인도적 지원과 보호를 위해 NATO와 CIS에 의한 PKO 투입을 결정하여 몇 개 지역에서 정전을

유지하는듯이 보였지만 7월에 들면서 양국간의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CESE는 냉전종결 후에 차례로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분쟁,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체첸 분쟁, 압하지아 전쟁, 남오세티아 전쟁 등의 대응에 벅차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엔 영향력을 잃었다.

 

또 민스크 그룹에서 가장 강한 발언력을 가졌던 러시아가 현지의 친러세력 규합에만 나서면서 민주화에 주력하지 않은 점도 CSCE의

평화조정이 막혀버린 원인으로 꼽는다. 6월 후반에 아제르바이잔군은 나고르노 카라바흐 북부와 인접한 아르메니아측의 점령하에 있던 고란보이로 진군했다. 이에 대해 항상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내전이며 자국은 관계가 없다던 아르메니아 정부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리독립을 지원하겠다며 공공연히 아제르바이잔을 위협했다.

 

6월 18일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정부는 비상사태 선언을 발령하여 8월 15일에 로베르토 코챠란이 이끄는 국가방어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는 18세에서 40세, 장교는 50세까지의 남성과 훈련경험이 있는 여성이 군으로 징병되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측에서 이 공격에 가담했던 것은 당시 갼자에 주둔중이던 러시아 공수군 제 104 방어사단의 러시아군 병사들이었기에 이들은 아르메니아측의 설득에 응해 공격을 중지하고 무기도 양도하여 반대로 아르메니아측의 무장강화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겨울이 가까워지자 민수용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시작하여, 양국은 대규모의 공격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 의한 경제

봉쇄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에는 터키를 경유한 원조도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가 폐쇄되면서 아르메니아의 전력부족과 식량부족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더우기 인접국인 조지아와 압하지아, 남오세티야의 분리전쟁이 발생하면서 러시아로부터 아르메니아로 통하던 유일한 석유 파이프라인도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1992년부터 1993년의 겨울 한파는 에너지 공급차단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에 세계각국의 아르메니아인 단체들이 본국에 대한 지원에 나서, 1992년 12월엔 미국에서 바투미를 경유해 33,000톤의 곡물과 150톤의 유아용 분유가 아르메니아로 공수되었다. 1993년 2월에는 유럽경제공동체에서 ECU가 450만톤의 식량을 보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국내에서 발생한 난민들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두 정부가 설치한 임시캠프에서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