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티베이는 아르메니아와의 평화협상에 낙관적이어서, 옐친과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에게 중재를 요구했지만 1993년 1월부터

평화의 기운은 쇠락해졌다. 3월이 되자 나고르노 카라바흐 북부인 마르타케르트 근교의 사르상 저수지에도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한

공격이 가해졌다. 고란보이에서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아르메니아의 군세는 포격지점이라 여겨진 카르바쟐로 향했다.

 

카르바쟐을 점령한 후 얼마간의 장갑차량과 전차를 포획했는데, 카르바쟐의 인구 대부분은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인이었다.

4월 2일에 아제르바이잔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5월의 제 2차 공격시 아르메니아군은 카르바쟐을 완전점령했다. 이 전투 후,

2개월간 에르티베이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징병제를 선포했다.

 

4월 30일에 터키와 파키스탄이 공동주최한 UN 안보리 결의안 822에서 모든 적대행위의 즉각중지와 카르바쟐에서 모든 점령군의

철수가 요구되었다. 고란보이와 카르바쟐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반러, 반이란 정책으로 인해 두 나라의 친아르메니아화를 초래함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에르티베이는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그리고 간자에서 군벌을 형성했던 슬라트 후세이노프 대령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에르티베이를 실각시켰다. 후임으로 전 공산당 제 1 서기였던 신아제르바이잔당 소속인 해이다르 앨리예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임시 총리로 취임했던 후세이노프도 앨리예프에 의해 체포되어 이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앨리예프에 의한 권위주의 독재체제가 시작되었다.

 

10월에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한 앨리예프는 러시아, 터키, 미국, 유럽과의 균형외교를 지향하여 에르티베이 정권하에서 탈퇴했던 CIS에도 재가입을 이루었다. 1994년 1월 초에 아제르바이잔군과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의 공동작전으로 아르메니아측에 점령되어진 이란 국경의 휴즐리 현의 일부를 탈환했지만 휴즐리의 시가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10월에는 마르타케르트로 진군하여 몇 명의 아르메니아군 병사를 포로로 잡았지만 아르메니아측이 징집병, 정규육군 및 자국의 내무군을 출동시킴으로서 곧 아제르바이잔군은 후퇴했다. 최종적으로 5천명의 아제리인과 수백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 과정에서 사망하고 아제르바이잔군은 15,000명의 병력을 상실한채 퇴각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측이 수세에 몰리게 된 원인은 개전시 양군의 상황차이 이에도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번째로 아르메니아에 비해 아제르바이잔의 사기가 낮았고, 국익보다도 사리사욕을 우선시한 아제르바이잔 정치인이 다수였다.

국비로 무기를 구입하면서 저질의 장비를 병사에게 주어 이익을 챙기는 자 외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을 몇백달러에 용병으로 아르메니아측에 전력으로 팔아넘긴 브로커도 있었다.


러시아의 정치학자인 기오르기 미르스키에 의하면 아르메니아의 젊은 의용병은 아제르바이잔인에 비해 사기가 높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어느 기자는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제복을 입은 아르메니아인 남성 가운데엔 나이든 사람이 무장하고 나선 것에 비해 아제르바이잔측은 중장년의 남성들이 카페에 모여서 차, 커피, 물담배만을 즐기며 앞으로의 일만을 걱정만 했을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사하로프도 아제르바이잔인에게서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단순히 영토문제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이것이 생사의 문제로 직결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남 카프카즈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CSCE를 버려두고 독자적인 평화공작에 나섰는데 1994년 5월에 비슈케크에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나고르노 카라바흐, 그리고 러시아의 대표가 정전협정에 조인하도록 함으로 비슈케크 협정이 발효되었다.

 

이 <비슈케크 협정>은 비공개되었지만 그 내용은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을 유지한 위에 나고르노 카라바흐로의 광범위한 자치권 부여,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안전보장 시스템과 난민문제에 대한 조정, 점령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의 철수, 라친 협곡 및 아제르바이잔,

나히체반 간의 국경선 조정 등이 포함되었다고 분석되었다.

 

6년간의 전쟁 끝에 1994년 5월 12일 오전 0시 1분 정전이 성립하여 모든 적대행위가 중단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미승인국으로 사실상 독립하여 아르메니아측은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본국을 연결하는 형식으로 아제르바이잔령의 약 14%(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체를 제외하면 9%)를 점령하에 두었다. 아제르바이잔측은 72만 4천명, 아르메니아측에선 30~50만명이 난민이 되어 주거지를 잃었다.


정전 후에 아르메니아인의 다수는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귀환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인 난민은 아제르바이잔 국내에서 난민캠프에 사는 것도 어려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점령하의 나고르노 카라바흐 일대에서는 고대부터 내려온 아제르바이잔의 모스크, 이슬람 양식의 궁전 등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고 아제르바이잔측이 주장했다.


청동기시대의 고분과 모스크의 파괴, 역사박물관에서의 도난, 고문서의 소각 등이 이루어져 아제르바이잔인의 문화적 원천인 슈사의

피해는 특히 막대했다고 한다. 점령지에서 기독교인에 의한 문화적 파괴행위가 심하다고 아제르바이잔측이 항의하자 UN을 비롯해

다수 조직이 아르메니아를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지만 국제사회는 아르메니아의 행위를 강하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측도 보복으로 나히체반에 중세부터 존재했던 쥬르파의 아르메니아인 묘지를 2005년까지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다. 아제르바이잔이 정보전에서 아르메니아에게 패했다는 의식이 공유되어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전쟁 후에도 일상적으로 TV에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관한 특별 프로그램이 24시간동안 편성되어 국내에 평화협정을 거부하게 끔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관한 보도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으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의 일부로 기정사실화한 의식이 널리 퍼졌다. 1997년부터 CSCE의 후신인 유럽안전보장협력기구(OSCE)는 다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관한 평화안을 제정했지만 어느것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이해를 구하지 못했다.

 

이 해, 텔 페트로잔은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에 양도함으로서 평화를 이어나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는데 이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지도층은 그를 아제르바이잔에 고개를 숙이는 약자라 비판하여 텔 페트로잔은 실각했다. 대통령 후임으로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출신의 강경파인 코찰란이 취임하고 아제르바이잔 측도 바쿠 - 트빌리시 - 제이한 송유관과 카르스 - 트빌리시 - 바쿠 철도를 부설함으로서 아르메니아를 배제하는 자세를 취함으로 평화로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출처 : 발레리 티시코프 <소련과 주변국의 민족주의>



막짤의 글은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부근에 아제리인들이 설치한 호잘르 학살 추모비이다.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훗날 벌어진 부다페스트 사관학교 기숙사에서 일어난 구르겐 마르가랸 소위 피살사건(같은 사관학교에 유학중이었던 아제르바이잔 육군 대위 래밀 새패로프가 구르겐 마르가랸 소위를 소방도끼로 72토막을 내 살해한 사건)과도 관계가 깊으며, 지금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국교는 불구대천의 원수 수준의 국교이며 오늘 정전이 깨지고 제 2차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의 서막이 열린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역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살아왔던 아르메니아인이 어떻게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