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현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오늘 하루 종일 대영제국 붕괴에 대한 뉴스만 온 나라에 떠들썩했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한제국이 개항을 시작한 이래 거의 130년간 전쟁을 치르며 대립해온 진짜 숙적이 바로 대영제국이다. 극동대전에서부터 시작해, 한영전쟁, 적백내전, 튀르키예 독립전쟁, 싱가포르 해역 분쟁, 버마 전역, 1차 남방전쟁, 두 차례에 걸친 건함 경쟁, 일본 독립전쟁, 중동에서의 분쟁 등, 대한제국과 대영제국은 역사학자들이 그레이트 챌린지(Great Challange)라는 이름을 붙인 패권 경쟁을 벌이며 전 지구에서 격돌했다.


그 두 제국의 경쟁으로 구대륙의 패권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대영제국이 무너졌다. 그것도 100년의 숙적 대한제국이 아니라 소비에트에게. 마치 그 140년 동안 벌여온 대대적인 두 제국의 격돌이 하룻밤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한제국은 자신들이 갑자기 전혀 새로운 세상에 놓였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김경훈이 관복을 입으면서 김민현을 보고 말했다.


“뉴스 그만 보고 아침 먹어라.”


“아버지.”


김민현이 김경훈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등청하십니까?”


“그래.”


김경훈이 관모를 쓰고 김민현 옆에 앉았다. 뉴스에서는 다음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18중 추돌 사고가 났다는데 당장 알 바는 아니었다.


“민현아.”


“네, 아버지.”


“이 애비는 이제 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민현이 고개를 들고 김경훈을 쳐다보았다. 김경훈이 고개를 도리저으며 다시 말했다.


“민현아, 이 정치판이라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곳이다. 네가 정치인이 된다면, 아무리 고결함과 순수함을 지키려고 해도, 네 초심과 이상을 유지하려고 해도,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면 넌 괴물이 되어 있을 거다.”


“...아버지는 괴물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내가 괴물이 아니라고?”


김경훈이 푸흐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김경훈이 김민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밖을 보며 외쳤다.


“들어오시게!”


곧 문이 열리고 정겨열이 걸어들어왔다. 김경훈이 말했다.


“앞으로 이 분이 집에 자주 오실 거다. 다른 호칭 없이 그냥 숙부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앞으로 내가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다.”


“누구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숙부님이라고.”


김경훈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정겨열이 다가가서 김민현 앞에 앉았다. 그리고 김민현의 작은 손을 보며 빙긋 웃었다.


“도련님이 그 김민현이라는 아이이시군요.”


“누구십니까?”


“숙부입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그러자 김경훈이 대답했다.


“바보가 아니니까 뉴스 보면 나올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하마.”


“...알겠습니다.”


김민현이 한숨을 쉬고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정겨열이 주변을 둘러보며 확인한 뒤 김경훈에게 말했다.


“이만 등청하시지요.”


“그래, 알겠네.”

 



+ + +

 



김경훈이 문 밖으로 나서자, 사헌부 대사헌 류주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헌부는 대신들에 대한 감사와 탄핵을 업으로 하는 부서였으며, 황국민정당이 완전장악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부서이기도 했다.


“나오셨습니까, 당수님.”


“홍지아 그 여자가 웬일로 회의를 다 소집했다는가?”


“저희도 모릅니다. 이만 가시지요.”


곧 차량 다섯 대가 김경훈의 집을 떠나 한양도성 안을 가로질렀다. 콘크리트 건물들과 고층 한옥들이 어우러져 있는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도성은 단일 도시로서는 지구 최대의 거대도시였다. 인구가 1,350만 명 이상이었으니까.


그 한양도성의 심장이자 대한제국 정치의 중심인 의정부(議政府. 현재의 국무회의) 앞에 차들이 멈춰 서고, 김경훈이 기자들의 요란한 플래시 터뜨리는 소리 사이로 정겨열의 안내를 받으며 묘당(廟堂. 국무회의실)에 들어갔다. 긴 탁자에 의자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경훈은 그 중간쯤에, 정겨열은 가장 말석에 앉았다.


그곳에는 공지형, 홍장방, 강명수 등, 대한제국의 집권여당인 대한정우회 소속 대신들이 먼저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에는 의전서열 5위인 이조판서 홍예찬이 고개를 돌려 김경훈을 보고 조롱조로 말했다.


"이런, 이런, 이런. 황국민정당의 당수께서 오셨구려."


강명수가 김경훈을 보고 예의상 인사를 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나도 잘 지내지 못했소."


김경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신들 때문에."


"거 성격도 까칠하셔."


강명수가 혀를 쯧쯧 차자, 공지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경훈을 향해 두 걸음 다가갔다. (김경훈의 기준에서)하나같이 무능한 대한정우회의 다른 인간들과 달리 유일하게 사람다운 작자다. 김경훈이 공지형에게 질문했다.


"국무회의는 몇 년 만이지요?"


"2년 만이지요. 긴장 좀 푸십시오."


공지형이 태연하게 대답하고 김경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적대시하고 싶지 않다는 뜻. 그리고 김경훈 또한 공지형을 아주 적대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 + +



 

근정전 밖 광화문에서 호화로운 차 한 대가 경호차량 24대를 거느리고 멈춰 섰다. 이어서 경호차량의 문을 열고 홍지아가 내렸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사진을 마구 찍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홍지아 대감! 대영제국이 망했다던데, 그럼 이제 대한제국령 남방제도에 대한 위협은 줄어든 것입니까?"


"주적이 사라졌으니 징병제는 철폐됩니까?"


"소비에트에서 수입되던 밀이나 천연가스의 공급에는 차질이 없겠죠?"


그러자 홍지아가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회의해 봐야 알 것입니다."


그녀가 기자들을 헤치고 묘당 안으로 들어갔다.


홍지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대한정우회 소속의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영상 대감 오셨사옵니까!"


홍지아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뚜벅뚜벅 걸어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김경훈이 홍지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영상 대감, 등청하셨습니까."


대한정우회라면 먹던 밥을 토할 정도로 싫어하는 김경훈이지만 홍지아에게는 고개숙여야 했다. 홍지아가 묘당 안을 둘러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소집한 회의인데, 어찌 이리도 사람이 없습니까? 다들 어디 갔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듯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의례적인 회의가 아닙니다."


홍지아가 저 정도의 열정이라도 보인 게 얼마 만인가? 국정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치부에만 열중하던 저 여자가 긴급회의를 소집한 것만 해도 감격할 일이다.


홍지아가 옆에 서 있던 내관에게 지시했다.


"일단 회의를 시작하겠으니 의례를 개시하라."


내관이 스크린을 내린 뒤, 노트북을 가지고 열심히 뭔가를 했다. 한옥 안에서 스크린에 빔 프로젝터로 노트북 화면을 투사하는 모습이, 아마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질적이리라. 그 내관이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만민의례가 있겠습니다. 모든 대신분들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을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신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겠습니다."


스크린에 대한제국의 팔괘 태극기가 걸렸다. 건곤감리의 4괘뿐 아니라 태진손간까지 들어간, 조선의 어기(御旗)를 어레인지한 태극기였다. 대신들은 모두 관모를 벗고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하나, 우리는 위대한 대한 제정연합국의 백성으로서 광명천지의 국시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둘, 우리는 만백성의 평안과 자유를 위해 제국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셋, 우리는 극동의 천조질서에 있어 중심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것을 맹세합니다."


“바로, 대한국 국제 낭독이 있겠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3항까지만 낭독하겠습니다.”


대한국 국제는 대한제국의 헌법이다.


“제1조. 대한 제정연합국, 이하 대한국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인정해 온 바와 같이 자주 독립을 누리는 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의 주권은 백성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만백성을 대리하여 국가의 주권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다.”


"바로. 용비어천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용비어천가는 2장까지만 부르겠습니다."


경쾌하면서도 웅장하게 편곡된 용비어천가의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했다. 재상들이 익숙한 가사를 음악에 맞춰 불렀다.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이시니(해동에 여섯 용이 날아 일마다 천복이고 옛 성인들 같으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밀씨 꽂 좋고 여름하나니(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밀리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무래 아니 그칠씨 내이더 바라래 가나니(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니 내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바로.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숙였다. 엄숙한 음악이 잠시 나오고, 내관은 의례를 마무리했다.


"바로. 국민의례가 끝났습니다. 전원 관모를 착패하시고 착석하시기 바랍니다."


일제히 관모를 다시 머리에 쓰고 앉았다. 최상석에 앉은 홍지아가 기지개를 펴고 한 번 묘당을 둘러보았다. 모두 33인이 참석하는 의정부 회의에 현재 착석해 있는 것은 고작 14인. 홍지아가 서류철을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이번 대영제국의 선거는 단지 국제정세 격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튀르키예에서도 공산당이 선거에 승리했고, 대표적인 친소국가인 이스라엘은 어제 메카를 함락시켰고 중동을 끝까지 제패해 버릴 기세입니다."


그녀가 서류철을 탁 내려놓고 한번 시선을 훑은 뒤, 김경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때문에 소비에트에 대한 외교에서도 여러분의 고견을 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