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파벨 페트로비치, 한국식으론 최성학, 또는 최선학.


그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차남으로 1900년 11월 25일에 태어남.


10명의 형제들이 있었고 당시 아버지의 항일 운동으로 일본군을 피해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음.


3남 최 발레틴의 회고에 따르면 연해주 시모노브에서 노보키예프스크로, 그곳에서 슬라뱐카로, 슬라뱐카에서 우수리스크로 떠나야 했다고 함.


최 파벨은 1918년 연해주 한인학생동맹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 상업학교에서 제적당해 우수리스크 레알노예 학교로

전학당했고, 거기서도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또 제적당했다가 겨우 졸업을 하게됨.



하지만 1920년 4월, 일본이 연해주 근지 한인들을 학살했던 4월 참변으로 아버지 최재형 또한 일본군에 의해 죽으면서 최 파벨과 가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됨.



최재형은 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남은 가족들이 고문을 당할까봐 일본군에게 순순히 체포당했고, 일본군은 그대로 최재형을 총살했다고 함.



하지만 사건 이후 소비에트 당국은 오히려 최재형을 친일 협력 부농으로 간주했고, 그의 남은 가족들도 지원은 커녕 감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여야 했음.



1919년 9월, 최 파벨은 아누치노 지역의 쉐브첸코 그리고리 휘하의 붉은 빨치산 부대에서 참모장 직을 맡게됨.



1920-21년 그의 부대는 그로데코보 지역과 바르바로프카 지역에서 일본군과 백군과 싸웠고, 한번은 백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사형을 당할뻔 했다가 겨우 살아돌아오는 등 위험천만한 빨치산 활동을 이어갔음.



그러다가 1921년 2월, 최 파벨은 소비에트 극동공화국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최 파벨의 부대는 연해주 스보보드니(자유시)로 가게됨.



그의 부대와 다른 적군 부대들은 그곳에서 '특수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편되고 그는 참모장 직무대리로 직임됨.



그리고 지명과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 파벨은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게됨.



최 파벨의 부대는 당시 새롭게 편성된 적군 지휘부의 명령을 거부했음.



때문에 참변 이후 최 파벨과 부대 지휘관들은 이르쿠츠크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다행히 최 파벨은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그해 11월에 석방됨.



하지만 이렇게 끝날줄 알았던 위 사건은 나중에 그의 비극적인 최후의 원인으로 돌아오게됨.



시간이 흘러 1924년, 최 파벨은 레닌그라드 프룬제 해군군사학교에 가게됨.



1926년 10월 5일, 해군군사학교를 졸업하며 노농붉은해군(Морские силы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ой Красной Армии)의 간부가 된 그는 11월, 아무르 함대 스베르들로프호의 당직사관으로 임명됨.



그렇게 그는 최초의 한인 소련 해군 장교가 되었음.



1927년에는 함대 간부지휘능력향상과정에서 포병분과를 교육받았고, 1928년에는 카스피 함대의 레닌호에서 포병분과장을 맡았음.



1931년 5월에는 카스피함대 참모부에서 포병중대장 직을, 1931년 11월 10일, 발틱함대 마라트호의 포병분과장을, 1933년 11월 28일에 선임 포병중대장을 맡으며 해군장교로서 승승장구했음.



실력 또한 우수했는데, 1929년 카스피 함대 함포사격대회에서 금시계를 받기도 했으며, 1930년에도 1등상으로 리볼버 권총을 받기도 했음.



상관들도 그를 좋게 평가해, 지휘 능력이 있고, 직무에 적합한 모습을 보이며 자존심과 고집이 있지만 이런 성격적 결함은 고칠 수 있고 향후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음.



1932년, 최 파벨은 소련 공산당 당원으로 진급하게됨.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의 어두운 가정사와 안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거임.



하지만 1935년, 엔카베데가 그를 체포하면서 파국이 시작됨.



이유는 아버지 최재형의 사회적 지위를 감추어 출신성분을 속였다는 것.



최재형은 자신이 모은 재산을 항일 운동에 보탰고 그 또한 항일 운동을 했는데도 엔카베데는 억지를 부렸고, 최 파벨은 크로시타트에서 심문을 당했음.



그리고 그는 결국 볼셰비키 당원에서 제적당함. 거기다가 1936년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지시 674조 e항에 의거, 1936년 12월 경 국방인민위원부 제01512번 지시로 노농붉은해군에서 해임당해버림.



이런 부당한 처사는 사실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이 원인이었음. 그리고 나라 없는 소수민족인 한인 최 파벨도 결국 빠져나가진 못했음.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37년 4월 최 파벨 관련 사정평가위원회는 아직 예비자원으로 있었던 최 파벨을 간부직에서 완전 해임, 축출시켜버림.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아버지가 한인 대지주였다는 것. 자유시 참변과정에서 독립군 부대를 무장해제하려는 적군에게 저항하고 명령에 불복종을 했다는 것. 또한 그것을 감추었기에 정치적 신뢰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



1937년 군에서 쫓겨난 최 파벨은 아랄해 국영해운회사 항구책임자 보조로 근무를 시작함.



하지만 1938년 6월, 최 파벨은 다시 체포당했고, 1938년 10월 17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결국 총살당함.



더욱 안타까운 것은, 비극이 최 파벨에게만 그치지 않고 그의 남은 형제들과 가족들에게도 찾아왔다는 거임.



최재형의 장남, 최 파벨의 형 최 표트르는 1919년 적군 연대장이었다가 서시베리아에서 전투 중 전사함.



최재형의 차녀, 최 파벨의 둘째 누나 최 나제쥐나는 남편 강 니콜라이가 스몰렌스크에서 총살당함. 그는 적백내전 당시 119보병연대 기관총 대대의 대대장까지 맡았었는데도 숙청을 피하진 못했음.



재형의 3녀, 최 파벨의 셋째 누나 최 류보프는 노보시비르스크 국립은행 경리로 일하다가 1937년 체포돼 1938년 총살당함. 그녀의 남편 또한 죽음을 피하진 못했음.



최재형의 4녀, 최 파벨의 첫째 여동생 최 소피야는 카자흐스탄 보건인민위원이었던 남편 쇼루코프 호드줴한을 1937년 숙청으로 잃어야 했고,



최재형의 5녀, 최 파벨의 둘째 여동생 최 올가는 모스크바 에너지대학을 졸업하고 기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체포당했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와 노릴스크 수용소에서 만기 출소를 지냄. 하지만 이미 그녀의 남편 김 세르게이는 사형을 선고받아 이 세상에 없었음.



최재형의 3남, 최 파벨의 첫째 남동생 최 발레틴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 그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책임농업기사로 근무하다가 체포당했는데, 강한 심문 과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거짓자백을 하지 않았음.



최재형의 6녀, 최 파벨의 셋째 여동생 최 류드밀라는 탄압을 당하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음.



최재형의 7녀, 최 파벨의 막내 여동생 최 엘리자베타는 '스몰렌스카야 프라우다' 지의 사진기자였던 남편 텐 콘스탄틴을 사형으로 떠나보내야 했음.



최재형의 4남, 최 파벨의 막내 남동생 최 비겐틴은 1938년 아랄스크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체포당해 5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임금체불에 항의하다가 3년형을 당했고, 다시 출소했다가 또 체포당해 복역하던 중 신장병 악화로 수용소에서 사망함.



최재형의 4명의 아들과 7명의 딸 중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아들 1명과 딸 4명뿐이었음.



최 파벨과 그 형제자매들의 죽음은 당시 소련의 한인 탄압 과정 속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음.



1937년을 전후로, 한인 2500여 명이 스탈린의 탄압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했음.



아버지의 항일 운동 전력과 자유시에서 적군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한인 최초로 소련 해군 장교가 된 그를 비극으로 몰고간 원인이 된 점은 그의 인생과 1900-1930년대의 한인 사회의 비극을 보여주는 한 단락이라고 생각함.


출처: https://m.dcinside.com/board/war/35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