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본격화 이후,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명암은 더 없이 극적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욱일승천하듯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해간 반면
조선은 그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흑선 도래를 계기로 강제로 개항을 한 때는 1853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한 때는 1876년이었다.
이 23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운명을 갈랐을까?
 
2.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당시 조선에도 기회는 있었는데, 일본의 침략 야욕에 의해 근대화가 좌절되었다."고 ‘믿고’ 있다.
‘착한 조선과 나쁜 일본’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하게 좋은 놈 나쁜 놈이 치고받는 통속의 영화, 드라마가 아니다.
역사에서의 비극은, 선악의 대치가 아니라, 언제나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교훈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외면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서는 아무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3.
당시 일본이 무슨 선당이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유일한 악당이었던 것도 결코 아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일본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 가는 악당이었으며
나중의 제정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최종적으로 일본의 수중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4.
독립은 타국의 자비심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다 그렇지만
국가의 경우는 특히, 오직 외부의 공격 때문만으로 무너지는 법은 없다.
국망(國亡)은 본질적으로 자멸이며, 외세에 의한 침탈은 언제나 그에 대한 최종 확인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조일합병은 이미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존재에 대한 사망확인서 발부에 지나지 않았다.

5. 
당시 조선이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건
철저히 우리 자신이 반성해야 할 몫이다.
"일본만 아니었다면, 당시 조선이 독립을 지켜 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 스스로에 대한 낯 뜨거운 자기기만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했으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 것인가?
당시에는 청나라나 제정 러시아의 속국이,
그리고 나중에는 공산 중국이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
독립의 상실을 외세 탓으로 돌리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얘기다.
그것은 독립의 유지가 외세의 자비심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6.
독립은 타국의 자비심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으로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고종과 민비를 중심으로 한 당시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실력배양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오늘은 청나라 내일은 러시아 등 여기저기에 기대기에 급급했다.

7.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었던 건 아니다.
대원군의 개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에는 시대가 요청하는 근대적 지평이 전혀 없었다.
낡은 중농적 유교체제의 복구와 쇄국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었다.
농본주의에서 벗어나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기꺼이 대외교역에 나섰어야 했다.
이를 위해선 기존의 틀을 깨야 했다. 그게 바로 개화(開化)였다.
농본주의, 쇄국정책, 사대주의는 사실 별개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 모두가 성리학 원리주의라는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었다.
그 질서를 그대로 고수하려는 세력이 수구파였으며
그것을 타파하려는 세력이 개화파였다.
 
8.
개화파는 독립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시작은 박규수였다.
그는 원래 평안도 관찰사 재직 당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격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개화의 불가피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다.
상업과 통상을 강조한 북학파 실학자의 자손다웠다.
박규수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 신분인 오경석 등과 함께 후대의 청년 개화파를 길러냈다.
그들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이었다.
9.
1884년 그 김옥균 등이 행동에 나선 사건이 갑신정변이다.
음력 10월 17일, 김옥균 등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수구파 인물들을 척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일련의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청나라에 대해 잡혀간 대원군의 송환과 조공의 폐지를 천명했다.
청나라로부터의 자주권을 확립,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문벌의 폐지와 지조법(地租法) 개혁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삼일천하였다.
 
10.
직접적으로는 원세개가 이끈 청군의 개입 때문이었다.
일본은 김옥균에게 지원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원세개가 일본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서자 일본은 발을 빼고 말았다.
일본은 아직 청에 맞설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국가로의 도약을 꿈꾸었던 조선 최초의 시도는 그렇게 허무하게 마감됐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김옥균은 도피생활 10년만인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이다.
 
11.
개화파의 한계는 결국 조선의 한계였다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해선 근대적 개혁운동이라는 의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준비 없는 경솔한 시도라는 점과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존하려 했다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개화파들이 나중에 대체로 친일파가 된 것과도 결부되어
민족주의적 입장에선 적극적 평가를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준비부족은 몰라도
‘친일적 한계론’은 과연 공정할까?
 
12.
갑신정변 전후의 시기
일본은 조선 주변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모델 국가였다.
그 성공모델을 따라가고 손잡으려 한 것을
나중의 결과를 들어 비판할 수 있을까?
더욱이 김옥균이 무분별하게 일본을 믿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청이나 일본 모두 신뢰할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군주를 중심으로 뭉쳐서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최소한
고종 자신이 유럽 근대의 계몽군주 만큼의 자질에다 그만한 각오도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은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은 어설펐고, 김옥균 등은 미숙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당시 개화파의 한계가 아니라 조선 자체의 한계였다.
이후의 경과가 보여주듯, 갑신정변 이후 그 어떤 노력도 조선을 멸망에서 구해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어설펐다 해도 갑신정변을 한 개화파가 조선에 존재하던 근대적 세력의 전부였다.
그들이 실패한다면, 조선에서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세력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13. ‘여진 오랑캐와 왜놈 오랑캐’라는 허위의식
김옥균이 암살되던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기선을 잡으면서 갑오경장이 이루어졌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족을 쫓아낸 뒤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10년 전 갑신정변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조선에 큰 역사적 변화가 찾아왔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수백 년 간의 사대와 이천여 년 이상을 이어온 한반도에 대한 중국대륙의 영향력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선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갈등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각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멀게는 조선에 또 다른 예속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은 이제 일본이라는 새로운 강자와 관계를 설정해야 했다.
큰 나라를 섬긴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이제 조선은 일본에 사대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당치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왜놈 오랑캐들에 교린도 아닌 사대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태도는 조선으로선 역사적으로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 후금-청이 부상하던 17세기 초 조선이 보였던 자세와 매우 유사했다.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천자국이 된 이상, 조선의 사대의 대상은 청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정권의 조선은
정묘 병자 두 차례의 호란으로 겪고도
내심의 자세는 결코 바꾸지 않았다.
심지어 효종 때는 청을 몰아내겠다는 북벌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여진 오랑캐들에게 진심으로 사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웃기는 일이었다.
조선이 북벌론이라는 환상놀음을 하고
만동묘라는 멸망한 명나라 황제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시대착오적 개그를 하던 때는
청나라가 강희 옹정 건륭 3대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조선이 진심으로 북벌을 하겠다고 청에 덤볐으면, 조선은 아예 흔적도 없이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그런 최전성기의 청과는 제대로 된 교류도 하지 않더니
아편전쟁 이후 국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주저앉아 가던 청나라에 뒤늦게 기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메이지유신 이후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도,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안정적으로 구축하기보다는 반일친러로 나아갔다.
‘여진 오랑캐’에 대한 태도가 ‘왜놈 오랑캐’에 대한 것으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똑 같은 허위의식이었으며 그 결과도 비슷했다.
조선조 말 일본에 당한 것은 17세기에 후금-청에 당한 것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조선조 말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은 사실은 비극이기보다는 희극적 비웃음거리다.
 
14.
개화파의 친일이 아니라 고종의 친러정책이 국망을 불러왔다
일본에 사대를 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헛발질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악당이고 러시아는 선당이었던 게 아니다. 최소한 러시아도 똑같은 악당임은 알았어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국제정치 상황에선 러시아는 유럽 열강들의 공적이었다.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세력인 영미 세력에겐 러시아는 이미 주적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품에 안김으로서, 영미세력을 비롯한 열강 모두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이다.
일본에겐 기회였다.
러일전쟁에서 영미 등 주요 열강들은 모두 일본을 지원했고, 일본이 결국 승리했다.
이로서 조선의 운명은 끝났다.
고종의 친러정책은, 국권을 지키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러시아라는 끈이 떨어지고 열강들로부터도 외면 받는 조선을 그냥 주워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5.
김옥균과 개화파의 친일적 한계를 논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친일 개화파가 아니라 고종의 친러정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