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society/8840804 에서 마저 조금 적습니다.


우선 앞 글을 요약하자면


1. 일본 정부는 조선총독부를 이용하여 1938년부터 조직적으로 조선인 인력을 동원하였으며 민관경이 모두 동원되고 수많은 예산이 투입된 사업이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약 70만명의 조선인을 동원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2. 조선인 농촌에서도 인구 이출을 희망하는 인력은 있었지만 이는 조선총독부가 추산한 이출가능인구 126만명의 20%정도인 26만명에 불과하였다(1940년 조선총독부 조사). 

3. 이를 채우기 위해 중앙정부부터 말단 행정관청까지 대대적으로 동원되었으며 특히 군별로 할당을 주어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며 인원을 징발했다.

4. 일본 정부는 이들이 자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징발 과정에서는 징용자들에 대한 기합, 폭력, 도주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깎고 옷을 입히는 등 다양한 폭력적 수단이 동원되었다. 거기다가 이들은 직업지를 선택하지도 못했고 중간에 돌아갈 자유도 없었다.


우선 임금의 경우를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943년 5월 일본 노동과학조사 연구소에 의하면 각지의 탄광에서 조선인 중 90원 이하를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B광업소 71.6%) 다른 D광업소의 경우 조선인은 70원 미만이 87.3%, I광업소는 61.5% 였다. 같은 경우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많은 임금을 지급받았으며(B광업소 90원 미만 48.4%, 90원 이상 51.6% / D광업소 70원 미만 일본인 39% , I광업소 44.3% ) 재일 조선인 광부의 경우 비슷한 노임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동원 조선인의 임금 상황은 아주 열악하였다.


또 이렇게 임금을 받더라도 조선인들의 경제생활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필수품 이외에는 구입하지 않도록 통제하고, 저금을 강요하는 한편 고향에 보내는 송금도 20~30원으로 제한하고 통제하였으며 보국채권, 저축채권, 어음등의 구입하게 하였으며 국가 관념을 함양시키기 위해 우편저축과 각종 보험 가입을 지도하였다. 특히 저금액은 달성목표를 정하여 매달 개인별 수입과 저금액, 송급액, 용돈 등이 기재된 표를 작성하여 보기 쉬운 장소에 개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일부 광업소에서는 탈출방지책의 한 방법으로 1인 1월 최대 10~15원의 금액만을 지급하였으며 일부 탄광, 조선소, 제철소 등등에서는 제대로 된 돈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거나 몇푼의 용돈만이 지급될 뿐이었다. 다음은 그 증언들이다.


  - 김동업. 1914년 충남 서산 출생 야마구치현 모토야마 탄광 징용 : 돈? 돈이, 무슨 돈 벌어? 그거 모르겠네. 조금씩 나오는 거. 한 달 되면 조금씩 나오는 거 있어. 뭐 뭐, 제하고서 얼마씩 나오던데 그래. 그래서 밖에 나오면은 그걸로 뭐 사먹고 그런다고. 말하자면 2,000원 주면 거기서 1,000원은 저그들이 깐 거야. 그거 때문에 일본이 노임을 주느니 안 주느니 하는데. 돈 가지고 왔나?


  - 장인식. 1926년 충남 논산군 출생 북해도탄광기선(주) 신호로나이광업소 : 여기서 돈 있기나 하간? 여기서 돈 못 부쳐. 돈이 작을 뿐 아니라, 먹는것이 시원찮은디 어떻게 또 좀 먹어야 할 거 아녀. 집에 돈 부칠 새가 어디가 있어. 전쟁 말 항복하기 전에는 거진 뭐 밥이라고는 쌀이라고는 맨들새가 [없어]. 그러니 누가 돈 부칠 새가 어디가 있어~ 일해서 돈 쪼금 벌은 사람들은 뭐 [사]먹고, 그렇지 않으면은 일하고 버티나.


  - 이남순. 1927년 충남 논산군 출생 히로시마 도요공업 동원 : 그때 월급은 받았지. 받았는데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겠어. 집으로 보낼 정도는 안돼. 거기서 쓸 정도밖에 안됐어. 월급이라고 그러고 줬는데. 뭐 집으로 보낼 정도는 아니고. 거기서 쉬는 날 그냥 쓸 정도. 


  - 김청송 1920년 충남 서산군 출생 니가타현 전기화학공업 동원 : 그렇지. 한 달에 월급을 줬어. 그 월급을 줬는데 본래대로 안 주고. 꼭 인제 너 얼마 쓸래 해. 신청을 하지. 그럼 많으면 많다고 안 줘. 아니, 그것도 저희가 주고 싶어야 주지. 신청한다고 다 주진 않고. 그리고선 집으로 보낸다고. 그니깐 거기서 돈 가지고 있어야 필요도 없더만 그려. 사 먹을 데 음식이 있어야 사 먹나. 쓸 필요 없어.


  - 박영남 1927년 충남 당진군 출생 나가사키 미쓰비시광업 병기제작소 동원 : 월급? 주는데 그 3전 주는데 뭐. 그때 할 때 한 달에 3전인지, 30원인지 이렇게 받았다고. 받았는데, 그것도 제대로 안 주더라니까. 아이고, 나 먹고 살 거도 없는데 부칠 게 어딨어. 돈도 제대로 못 받는데 어떻게 줘.


 - 정대성 1920년 충남 서산군 출생 오사카 군수공장 : 월급을 주어요? 먹이는 것이라도 제대로 먹여주어야 하는데, 그것도 안 해주는데, 월급이 어디 있어요? 그리구 목간(* 목욕)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거 못했어요. 옷도 작업복이라고 주기는 하는데, 그때 작업복 아주 못쓸 것들만 주지. 쓸만한 건 우리 차례도 안 가요. 그냥 떨어진 거 그런 거 주는 거야


  - 박기성. 1919년 충남 서산군 출생 니가타현 광산 : 월급 받지도 못했지. 아니 말이야 올 적에 집으로 부친다고 그러더구먼. 그런디, 하나도 안 부쳤어. 나중에 보니께.


  - 김백환. 1919년 충남 서산군 출생 니가타현 전기화학공업 : 월급 준 건 기억에 없어요. 용돈은 안줬어요. 그(월급) 얘긴 못 들었어요. 일절 돈 얘기는. 설명을 해주나? 다 같이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요. 전시니까 이것도 ‘전장의 일체로, 이것도 해야는가부다.’ 라고만 생각했지. 우리가 돈 챙겨설랑 한국으로 가지고 갈라는 마음을 안 먹었거든요. 죽으려니 했죠. ‘언젠가 여기도 폭발탄 떨어져서 우리도 다 죽을 사람이다.’


  - 박용식. 1927년 충남 서산군 출생 후쿠오카현 탄광 : 월급이 어디가 있어? 거기에 월급이 어디가? 그놈의 새끼들이 월급을 줬간디? 저금통장이나 뭐 그런 것도 없어. 아무것도 안줬어. 주기는 뭘 줘. 그냥 먹여주고, 일만 시키는 거여. 먹여준다는 거, 그거여. 근디 그게 먹여주는 거여? 찬이 있어? 물이 있어? 뭐가 있어? 그거 요거만한 거, 그 주먹밥 하루 세 개, 다섯 개 그거 주는 거야. 배급품이나 이런 것도 없어. 주기는 뭘 줘. 아무것도 안줘. 그거밖에는. 월급이라서니, 그것보다는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여. 그날 그날.


* 상기 증언자들이 모두 충청도 사람인것은 해당 자료의 출처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연구이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거기다 월급이 있어도 이런 저런 명몫으로 수많은 금을 떼어갔다. 다음은 1944년 12월분 사가현 탄광 조선인 갱부의 임금 명세서이다.


월 지급총액은 176원 50전으로 나와있지만 좌측의 공제금 명목으로 기숙사비, 각종회비, 식사비, 이불비, 각종 세금과 전기세 저축 등등을 모두 떼고 나니 손에 들어오는 돈은 52원 85전으로 1/3 밖에 안된다. 그런데 공통적인 증언에 따르면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살면서도 환경은 괜찮았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강제 동원 조선인들은 입을 모아 가장 힘들었던 점이 배고픔이라고 말했다. 특고월보에 따르면 1939년 10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식사를 사유로 한 노동쟁의만 해도 45건에 달하며 이들은 파업, 태업을 전개하고 집단적으로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예시로는 북해도탄광기선(주) 상무이사(高谷金一郞)가 1940년 12월 북해도청장관에게 보낸 <진정문>과 1942년 石炭統制會 삿포로(札幌) 지부장이 전시비상석탄증산기간 격려반에 제출했던 <진정서>을 통해 당시 강제동원 조선인의 식량 부족이 일상화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정문>에 의하면, 원래 1일 약 2ℓ이었던 식사량이 1940년 12월 당시에는 약 648㎖(당초의 32.7%)로 줄어들어 출탄 능률에도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호소하는가 하면, <진정서>에는 식량 부족을 이유로 귀향을 요구하거나 성절제(한 그릇 식사만 제공하고 더 주지 않음)의 시행으로 불만이 쌓여 도식이 빈번하였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들이 음식점에 몰려드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일상화된 식량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각 기업별로 지방 실정에 맞는 대용식을 충당하게 하고, 부식물을 이용하여 포만감을 줄 수도 있도록 하는 한편 야채류를 스스로 길러 충당토록 강구하였다. 이는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있는데, 밥 대신 우동, 도꼬로땡, 대나무죽 등 대용식을 사먹거나 밥에 콩깻묵이나 고구마, 옥수수, 쑥 등을 섞어 식사량이 많아지게 했던 것이다.


이런 식량 문제에서도 조선과 일본인 노동자간의 차별이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다른 곳에서 식사하였으며 식사 대우의 차별을 느껴 조선인들이 항쟁을 한 사건도 있었다. 그 예시는 1942년 1월 후쿠오카현 미쓰비시광업 호조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77명이 일본인들에게만 방어를 준 사실을 알자 '일본인 기숙사에만 방어를 지급하고 우리들에게는 대용식을 지급하는 것은 차별 대우가 아닌가?' 라며 태업한 사실이 그것이다. 


이렇듯 이상 가장 중요한 먹는 문제와 임금 문제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심한 차별은 이미 확인되어 왔고 이들은 자발적으로 떠난 것이 아닌 강제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사실상 도망도 못가게 감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다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자료만 가지고 그것은 모두 1945년 말에나 있었던 일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까지는 나름대로 잘 돌아가는 곳도 있었지만 1943년부터는 이런 사례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자국민도 동원했다! 똑같은거 아니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건 자국민도 동원하고 식민지인까지 자신들이 벌인 수라장에 끌어들여서 철저하게 착취한 것이라고 말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전쟁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일본 제국이 일으켰습니다. 누가 조선인들을 공출하고 노역시켰습니까? 일본 제국이 그랬습니다. 일본 제국은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수많은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때 성장했다 수준으로 덮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고 봅니다. 

조선시대보다는 나았다 논리도 일제강점기의 평균 수명은 45세(1940년대 기준), 현재 북한의 평균 수명은 71.6세(기대수명)인데 그렇다면 북한 정권이 일제 정권보다 나은 정권입니까? 인구도 수배 증가했고 각종 인프라와 지표도 개선되었는데?


일본이 조직적으로 식민지를 착취한건 역사적인 사실이며 이는 어떤 이유에서도 부정될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들도 부정은 안하시리라 믿겠지만, 아무리 조금의 공이 있다고 해서 이런 역사를 절대 덮을수는 없는 것입니다. 



출처 : 2018. 노영종. 일제 말기 충남지역 노동력 강제동원과 거부투쟁. 충남대학교 박사논문.